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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배상면주가 배영호 대표 술도 사람도 집도 비어 있어야 쓰임이 있다
“술은 감성과 문화를 담아내는 빈 술잔이다. 술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미디어다”라 말하는 배상면주가 배영호 대표. 지난 10월 그는 술을 닮고 술잔을 닮은 공간을 하나 마련했다. 경기도 포천시에 들어선 전통술 문화 체험관 ‘산사원’. 술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소통의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경기도 포천시에 4천여 평 규모의 전통술 체험 문화 공간 ‘산사원’이 문을 열었다. 배상면주가 배영호 대표가 23년간 전통주에 바친 ‘술꾼 인생’을 고스란히 녹여낸 곳이다. 한옥 건축은 정태도 대목이, 정원 설계는 가든 디자이너 안상수 씨가 맡았다.


1산사원 내 전통술 박물관 지하의 셀러. 날짜와 주인 이름이 적힌 라벨이 붙어 있다.
2, 3 박물관 풍경. 벽 장식 캘리그래피 아래 물그릇과 초 한 자루가 탁자에 놓여 있다. 예전에 여인네들이 술을 담그기 전 술이 잘되게 해달라고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학창 시절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여정의 3분의 1 이상이 프랑스 와이너리, 독일 맥주 브루어리 등 유럽의 양조장과 술도가를 방문하는 것이었지요. 우리 것이라 해봐야 어려서 보았던 아버지의 막걸리 양조장과 술도가가 전부였는데, 그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어요.” 우연한 여행길에서 술은 단순히 알코올 섞인 물이 아닌 한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담아내는 결정체라는 것을 알게 된 청년. 그는 이후 전통술 시장에 뛰어들었고 백세주, 산사춘 등으로 공전의 히트를 치며 사멸되어가던 전통술 시장을 드라마틱하게 부활시켜놓은 ‘진짜 술꾼’이 되었다.
그가 바로 배상면주가 대표 배영호 씨다. 지난 10월 경기도 포천 배상면주가에 전통술 문화 체험관 ‘산사원’이 문을 열었다. 온화한 운악산이 포근하게 품어주는 4천 평 규모의 대지 위에 자리한 산사원은 말하자면 한국형 전통술 와이너리다. 산사원은 크게 다섯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어른 서넛도 들어앉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술항아리 5백여 개가 들어서 있는 ‘세월랑’. 우리 농산물로 만든 전통술을 숙성시키고 저장하게 될 술도가다. 세월랑에서 바라보면 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으로 ‘우곡루’가 서 있다. 사찰의 누각 형태 불이문을 차용한 것으로 2층 누각에 올라 바라보면 운악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세월랑이 장관을 이룬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연못과 함께 정자 ‘취선각’, 오른쪽으로는 근대 양조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부안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에서 불이문을 지나면 대웅전을 만나듯 우곡루를 지나면 반듯한 한옥이 한 채 눈에 들어온다. ‘자성제’라 이름 붙은 한옥은 전통술과 음식 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할 계획이다.
배영호 대표가 산사원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2년 전이다. 그러나 그가 포천에 처음 둥지를 튼 것은 14년 전인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 형님과 함께 시작한 국순당에서 독립한 후 포천으로 들어와 배상면주가를 세웠다. 일부러 발전 가능성이 낮은 땅을 찾아들었다. 개발 가능성이 없어야 앞으로도 ‘술 빚기 좋은’ 청정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기에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단다. 프랑스 코냐크 지방처럼 포천을 우리 전통술의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안고서 말이다. 이곳에서 처음 3년 동안 그는 술도가 사장이라기보다 전통술박물관장 노릇을 하고 살았단다. 그동안 모아온 전통술 관련 자료를 정리해 작은 박물관도 만들어놓고 무료 시음과 세시주 행사를 벌이며 손님을 맞이하고는 했다. 전통술을 공부하며 새로운 술을 개발하던 그 시절, 그는 이미 산사원의 밑그림을 차근차근 그려가고 있었다.


4 박물관에는 배영호 대표가 그간 수집한 전통주와 민속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5 증류주인 소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소줏고리.


주류 사업은 낭만 사업 화학식으로 보자면 술은 효소와 탄수화물이 만나 생성되는 알코올 성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화학 기호도 인간의 감성과 만나면 차원 상승이 이루어진다. 그는 “주류 사업은 낭만 사업”이라고 말한다. 낭만 사업이라!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술은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소비되는 순간까지 수많은 경험과 추억을 만들어낸다. “시간과 세월의 차이를 아세요? 시간이라는 물리적 단위에 사람의 감정이 개입되고 경험이 더해지면 세월이 되지요. 우리 조상들은 삶이 개입된 시간을 세월이라 불렀어요. 고로 ‘세월랑’은 그저 시간이 지난다고 술이 절로 숙성되는 곳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찾아주고 항아리를 어루만져주고 향기를 맡아주고, 그 안에서 경험과 추억을 만들어갈 때 비로소 술이 익어가는 겁니다. 술의 낭만 공정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서양의 위스키나 와인이 고급 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낭만 공정,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을 잘 담아냈기 때문이란다.
세월랑을 화두로 술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자, 어디 이제 우리 미학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하며 그가 자리를 고쳐 앉는다. “산사원을 계획하면서 고민에 빠졌죠. 우리 술의 미덕과 매력을 어떻게 공간으로 풀어낼 것인지가 문제였어요.” 하나의 문화에 나타나는 미학은 건축, 음악, 미술 등 장르를 뛰어넘어 공통분모를 갖게 마련이다. 그는 우리 술의 미학과 전통 건축의 미학을 함께 공부하는 것을 택했다. “한국 사찰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재미있어요.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피안교를 건너고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죠. 다리와 문을 지나는 것은 세속에서 성의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과 속의 세계를 반복적으로 지나서야 불국토를 만나게 됩니다. 또한 특이한 점은 대웅전을 지나면 바로 산이라는 거예요. 성과 속의 세계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다 결국은 자연으로, 즉 세속으로 이동하는 거죠. 다른 문화권의 사찰들은 안과 밖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성과 속을 구분 짓지만 우리 사찰은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요. 성과 속의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둘이 아니라는 거죠.” 그는 한국 사찰을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한다. 2차원 평면을 비틀어 붙여 만든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3차원 평면. ‘불이 不二’라는 불교 사상이 우리 문화와 만나 3차원 공간으로 구현된 것이 한국 사찰이라는 것이다.

6 조선 시대부터 잦은 금주법 시행으로 양조 관련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술 관련 서적도 희귀하다.


1 배상면주가 주점이 문을 열면서 다양한 전통술을 맛볼 수 있는 테이스팅 메뉴를 내놓아 큰 인기를 얻었다.
2 세계 각국의 다양한 술잔.


불이 사상과 뫼비우스의 띠 안과 밖이 다르지 않고, 성과 속의 구분이 없으며, 주인이 객이 되고 객이 주인이 되는 모습은 우리의 전통문화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담장이 산으로 사라져버려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주택, 밖에서 보면 안이고, 안에서 보면 밖이 되는 중정, 순간적으로 연희자와 청중이 뒤바뀌는 탈놀이,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는 아악, 어느 한 자락만 불러도 한 곡의 노래가 되는 판소리 등 그는 끊임없이 예를 들었다. “‘한’이라는 단어에는 40개가 넘는 의미가 있어요. 크다, 대충, 가운데, 하나., 수없이 많은…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요. 그러나 ‘하나’와 ‘많음’이라는 대척적인 개념이 하나의 단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다른 문화에는 없지요. 옛 어른들의 ‘쌀 팔러 간다’는 말은 쌀을 사러 간다는 의미였어요. 심한 경우 돈 팔러 간다고도 했죠. 이렇듯 우리 문화에는 수많은 역설과 도치가 존재해요.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로 보면 ‘해결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들이죠.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를 두고 아무런 문제 삼지 않았어요. 여기에 바로 우리 미학의 핵심이 녹아 있어요.” 서구의 눈으로 바라보면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역설을 불이의 논리로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융통성은 전통술에서도 드러난다. “술을 약이라고도 하고 독이라고도 하지요. 술에는 약성과 독성이 동시에 존재해요. 서양 사람들에게는 술이 동시에 상반된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 바로 역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약술과 독술을 구분해놓았어요. 그러나 우리 전통술에서는 술이 약이네 독이네 하는 논란이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 조상들은 술을 음식으로 보거든요. 음식은 곧 약이라는 ‘약식동원’ 사상 아래 술을 음식으로 보면 그런 이분법적 논리가 무의미해지죠.”

3 누룩 틀. 배영호 대표의 아버지 배상면 선생이 누룩으로 전통술 시장에 발을 들였으니 남다른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6백50리터들이 술항아리 5백 여개가 들어찬 셀러 ‘세월랑’. 이곳에는 우리 농산물로 빚은 증류주를 숙성・저장할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세월랑은 밭 전 田모양으로 회랑이 나누어져 있다. 즉 4개의 중정을 두고 미로처럼 설계했다. 배영호 대표는 항아리에 술이 채워지면 술항아리를 분양하고 차후에는 주식처럼 매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계획이다.

모시는 마음, 모심의 미학 우리 선조들은 이 역설의 상황과 불이의 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는 그 답을 ‘모시는 마음, 시 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자기를 누르고 상대를 배려하고 모시는 마음, 그로 인해 상대로부터 나 또한 모심을 받고 결국은 스스로를 모시게 된다. 자연과 인간, 너와 나, 성과 속, 시작과 끝에 구분이 없으니, 타인과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자연을 배려하는 것은 곳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사원을 통해 이 ‘모심의 미학’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곳은 누가 보아도 분명 술이 주인인 곳이죠. 하지만 객이 찾아들면 술은 슬쩍 자리를 비켜줍니다.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지 않으니 객이 쉽게 드나들고 함께 어우러져 노는 풍류의 공간이 됩니다. 술도 마찬가지죠. 배상면주가 술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대포’예요. 큰 잔이라는 의미의 대포는 우리 술의 미학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이죠. 술은 비어 있는 술잔처럼 기쁨과 슬픔 등 감정을 담아내고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죠. 나를 비운다는 것이 곧 모시는 마음이지요.” 사찰 이야기를 시작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그는 우리 전통문화에 녹아 있는 불이 사상과 모심의 미학에 대한 강의를 들려주었다.
“우리 술이 잘되면 세상이 좋아질 거라 믿어요. 우리 술은 생명의 술이고 풍류의 술입니다. 우리 술에는 모심의 미학이 담겨 있어요. 모심의 미학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모두가 이로워지는 힘이에요.” 그는 우리의 미학은 보석이고 21세기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위) 산사원에 수령 2백년 산사나무 12그루를 심었다. 이 열매가 바로 산사춘의 원료다.


1 배영호 대표가 아내 최선주 상무와 함께 세월랑을 거닐고 있다. 최선주 상무는 산사춘을 비롯해 배상면주가의 전통술을 개발한 일등 공신이다.
2 자성재 내부. 편액은 추사 글씨로 스님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3 어루만지고 향기를 맡으며 감성을 녹여내면 그것이 바로 명품술이 되는 것이라고 배영호 대표는 말한다.
4 연못을 앞에 두고 자리한 정자 ‘취선각’.


머릿 속으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이상과 한 손에 들려 있는 계산기, 이 둘이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키면 술 말고 또 무엇이 만들어질까? 그가 말하는 모심의 미학이 비즈니스를 통해 구현되는 모습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다. “전통술이 주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채 3%가 되지 않는단다. “문제는 다 우리 같은 생산자에게 있어요. 우리 전통술조차 우리 농업과 연계가 없어요. 국내 술 원료의 99%가 수입 농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따라서 고유의 지역색을 갖고 성공한 양조장도 없어요. 명품이 나오려면 지역 양조장이 발전해야 하는데 말이죠.” 지역 양조장이 발전하지 못하니 술과 관련된 지역 문화도 없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한다.
지난해 일어났던 배 파동 사건은 그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안겨주었다. 과잉 생산으로 배 값이 폭락하자 농민들은 일 년 농사를 다 갈아엎는 상황이었다. 이를 보고 그는 배 생산 농가를 찾아가 1백 톤의 배를 구입해 술을 빚었다. 그러고는 평년이었다면 2만 원대에나 가능했을 배 술을 3천 원대의 가격으로 시장에 선보였다. 농민들은 애써 농사 지은 배를 내다 버리지 않아도 되니 좋았고 소비자들은 값싸게 좋은 술을 맛볼 수 있으니 좋았다. 이를 계기로 올해 그는 아예 전국의 특산물 산지를 일주했다. 나주 배, 단양 마늘처럼 과잉 생산된 농산물을 파악했다. 그렇게 전국을 달린 것이 한 달 동안 4만km다. 그는 이 전국 투어를 통해 우리 전통술이 우리 농업과 공생하는 길을, 지역 양조장 개발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 결과 배상면주가는 이제 전국에 10개의 지역 양조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문득 그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인생들을 만나다 보면 존경스러운 사람, 성실한 사람, 뛰어난 사람, 착한 사람, 멋있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을 만나지만 실로 그들이 모두 행복해 보이거나 닮고 싶거나 부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상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함께 이로운 삶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믿음.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철학이 있고, 성공적인 실천이 있는 인생.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 삶이 부럽기도 하고 닮고도 싶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