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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역사와 세월을 품은 정의홍, 윤상미 씨의 집
정의홍・윤상미 씨의 평창동 주택은 때깔 고운 소재를 과감하게 사용해 더 돋보이는 공간이다. 오랜 외국 생활로 글로벌한 감각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이들 부부가 원하는 집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기분 좋게 쉬었다 갈 수 있는 편안한 여행지 같은 곳이다. 현재의 공간에 과거의 추억이 공존하여 그 감흥이 더욱 오래 이어질 것 같은, 아름다운 주택.
이 이국적인 집을 처음 본 것은 일 년 전쯤, 한 리모델링업체의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소파, 침대, 식탁 등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공간이었는데도 첫인상이 무척 강렬했다. 공간을 채운 핑크, 블루, 퍼플 등의 색감 때문이었는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때문이었는지, 마치 공연을 앞두고 개성 있게 메이크업한 뮤지컬 배우를 보는 느낌이랄까. 눈을 뗄 수가 없어 어느 댁이냐 물었더니, 공개할 수 없는 개인 주택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사연은 이러했다. 집주인 윤상미 씨는 가족과 함께 12년 동안 미국 보스턴에서 생활하다 3년 전쯤 한국으로 돌아와 신중히 집을 고르고 리모델링을 계획했다. 인테리어업체에 마감재 공사를 맡기고 나니 여러 잡지에서 촬영 의뢰가 들어왔단다. 페인팅 컬러를 비롯한 마감재 하나하나를 일일이 체크하고 가구, 창문, 조명, 가구 손잡이까지 모두 직접 컬렉션한 것들이라 단순히 어떤 ‘스타일’로 규정짓는 리모델링 기사로 다뤄지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행복한 가족의 스토리가 담긴 기사로 잡지에 실리면 참 좋겠다’는 딸 주희 씨의 말을 들으니 가장 먼저 <행복이 가득한 집>이 떠올랐다는 윤상미 씨. 남편 정의홍 박사가 부산 백병원에 근무하던 1992년, <행복이 가득한 집> 9월호 부산 특집으로 집을 공개한 적이 있다는 그는 그 특별한 인연으로 <행복>에 이 집을 공개했다.
강릉 ‘중화당 대약포’ 한의원집 3대손인 정의홍 박사는 한의학으로 대를 잇는 대신, 안과 전문의가 되어 교환교수로 외국 생활을 하게 된다. 하버드 의과대학에 교환교수로 근무하면서 가족과 함께 보스턴 외곽의 목조 주택에 살았던 그는 10여 년 동안 특별한 추억을 쌓는다. 눈이 오면 뒷산에서 아이들과 눈썰매를 타고, 타샤 튜더처럼 야생 정원을 가꾸는가 하면 주말에는 바비큐 파티를 열어 이웃과 정을 나누는 것.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딸 주희 씨와 골드만삭스에서 인턴십을 시작한 아들 용수 씨를 두고 귀국하면서, 부부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보스턴 집을 추억할 만한 집을 재현하기로 마음먹는다. “복잡한 강남보다는 강북이 좋았고, 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를 찾다가 가회동, 부암동, 구기동을 지나 평창동까지 알아보았죠. 우선 작은 주택을 얻어 일 년 동안 시험 삼아 살아봤어요.” 임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에 따라 해가 들고 지는 방향부터 여름에는 방수, 겨울에는 난방을 어떻게 보강해야 하는지까지 꼭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여유를 갖고 기다리다 보니 평창동에서도 명당자리라는 이 집을 발견했는데, 4층 높이의 나선형 목조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마당이 나오는 언덕 위의 이층집은 한눈에 펼쳐지는 뷰가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위) 오후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평창동 주택. 세모 지붕 구조가 살아있어 더 운치있는 2층 거실은 프로젝터와 오디오 등을 두어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다.


2층 덱에서는 평창동 일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섬세한 섬세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이국적인 풍경 집을 리모델링하는 데 걸린 시간은 3개월. 인테리어 작업을 할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철거를 하거나 벽면을 뜯어냈을 때 뜻밖의 공간을 만나는 것인데, 천장을 뜯어내니 1층 거실은 벽난로 굴뚝이, 2층 거실에선 세모 지붕과 나무 골조가 그대로 드러났다. 1층 거실 천장에 고재 나무를 장식하고 현관과 거실 사이에 아치형 가벽을 설치해 공간을 분리, 각각 하늘색과 연보라색으로 페인트칠하니 더욱 이국적인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흔히 집에 색을 입히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만 과감한 컬러를 부분적으로 사용해 강약을 주면 공간이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다.“2층 거실은 녹두색’을 원했는데 딱 맞아떨어지는 색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어요. 계속 시행착오를 겪으며 붓을 물에 씻었는데, 붓이 씻긴 물은 그토록 원하던 ‘녹두색’이었죠. 별것 아닌데 마치 신기루를 발견한 것처럼 기쁘더라고요.”색색의 컬러를 조악하지 않게 정리하면서 개성을 유지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미묘한 컬러와 각기 다른 재질이 효과적으로 믹스 매치된 이 집은 윤상미 씨가 컬렉션한 가구가 합세하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조부모에게 물려받은 전통 고가구와 외국에서 생활할 때 사용하던 빈티지 가구를 조화롭게 매치했기 때문. “집을 꾸밀 때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구조예요. 거실 정면으로 보이는 공간은 막힌 공간이었는데 주방 쪽 벽면을 헐고 테이블을 두니 오픈형 다이닝 룸이 되었죠. 구조를 잘 결정하면 데커레이션은 기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합니다. 가구 스타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고재 가구, 유럽 빈티지, 미국의 콜로니얼 스타일 등 굳이 세트가 아니어도 모두 잘 어울리죠.” 시할머니께서 혼수로 해 왔다는 자개장, 한의원에서 사용하던 앉은뱅이책상과 뒤주, 미국에서 사용하던 빈티지 소파와 묵직한 마호가니 식탁 등 오래 묵은 것들이 잘 정제되어 빛을 발하는 듯한 느낌. 오래되고 마모된 서양 빈티지 가구를 전통 가구와 한 공간에 적절히 배치하니 더욱 근사하다.


1 이 집의 압권은 주택 특유의 입체적인 구조를 살리고 컬러감을 더한 디자인이다. 한쪽 벽면을 보라색으로 페인트칠하고 수제 타일로 장식, 정면 창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시공해 더욱 이국적인 느낌이다.


2 보라색으로 페인트칠한 딸 주희 씨의 방. 붙박이장 안쪽 패브릭은 모두 동대문에서 손수 맞춘 것.
3 카메라와 바닷가 소품을 장식해 여행의 추억을 담았다.


오래된 것에서 위안을 얻다 동양과 서양의 것, 앤티크와 새것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하지만 진짜로 가치 있는 것들의 영근 매력은 서로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여대생 시절부터 당시 유행하던 양장을 마다하고 난전에서 구제 블라우스를 사다 직접 리폼해 입었던 진짜 멋쟁이 윤상미 씨와 조상의 물건을 보며 그 애틋함을 시로 표현하곤 했던 정의홍 씨가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고 동반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플리마켓, 야드 세일 등을 많이 둘러보다 보니 오래된 물건의 가치를 알게 되었어요. 조부모님으로부터 내려온 고가구와 약장, 장독대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두게 되었죠.”고민을 충분히 하지 않거나 저렴한 가격에 현혹되어 산 가구는 쉽게 버릴 수 있지만 오랜 이야기와 추억이 담긴 가구는 평생 함께할 수 있다. 더구나 다른 이의 손을 한번 거친 제품은 까다롭거나 젠체하는 법이 없으며 살아온 시간만큼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부부 모두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마주 앉아 약을 포장했던 앉은뱅이책상은 정의홍 씨가 가장 애착을 갖는 물건. 자신을 포함한 6남매를 뒷바라지해준 일등 공신인 책상은 가장 볕이 좋은 자리에 두고 오래된 전축을 올려두었다. 1992년 <행복>에도 출연했던 커튼을 조금씩 리폼해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을 정도. 예측하지 못한 의외의 공간을 만나는 것도 이 집에서 경험하는 재미 중 하나다. 현관 옆 서재를 지나야 침실이 나오는데, 이러한 구조 덕에 침실은 무척 내밀한 공간이 되었다. 빛바랜 면 소재 핑크 커튼, 약간 노르스름해진 퀼팅 이불, 또 제법 잘 어우러지는 자개장 등 침실 역시 가족의 역사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듯하다. 현관 정면 계단으로 연결되는 2층 가족실은 가족 개개인의 취미를 한데 모은 공간. 1층에 비해 아담하고 햇살이 좋아 부부가 자주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세모 지붕이 옛날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데, 맑은 날에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낮잠을 청하고 비오는 날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여도 좋은 운치 있는 공간이 완성되었다.


4 거실 한켠에 자리잡은 앉은뱅이책상.
5 녹두색으로 페인트칠한 2층 패밀리 룸. 모던한 공간과 고가구가 멋스럽게 어우러진다.


둘이 함께해서 더 좋은 일상 풍경 촬영이 있던 일요일 오전에는 잠깐 비가 내렸는데, 비 온 후의 나무 냄새는 아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을 정도로 향긋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밀짚모자 쓰고 손수 심은 장미 나무에 물 주기. 보통 주말 아침에는 삽살개 찰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된다. 리모델링할 때 계단을 없애고 엘리베이터를 시공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그 운치 있는 계단을 없앤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단다.“사실 주택은 아파트보다 손이 많이 가요. 번거롭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웃바람이 있으니까 겨울에는 벽난로를 켜고, 또 거기에 보리차를 끓여 먹을 수도 있잖아요. 주상 복합 아파트에 사는 게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을 얻는 주택이 더 편한 사람도 있죠.” 요즘은 햇빛 좋은 날 고추와 과일을 말릴 수 있어서 무척 신이 난다. 가족이나 다름없는‘찰리’가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벗 삼아 커가는 것도 마냥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상이 데자뷔 현상 같기도 하다. 남편이 2005년에 출간한 시집에 마당에 감나무를 심고 장독을 두고 좋아하는 삽살개를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시가 수록되었기 때문. 제목은 ‘먼 훗날’이다.


1 침실의 모습. 컬러가 조금씩 바랜 가구들이 주는 따뜻한 느낌을 좋아한다.
2,3 가구와 컬러 선택에서 안주인의 섬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4 마치 외국 주택을 보는 듯한 아치형 벽면과 계단의 구조.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아내와 내가 늙어간 다음/ 적적하여 아내가 싫다 하여도/ 산 기슭에 작은 집 짓고/ 어설픈 농부가 되고 싶다/ 앞마당 가득 꽃씨 뿌리고 나면/ 삽살 강아지와 노란 병아리와/ 어린 사과나무와 배나무와 감나무 데려다 키우고/ 어서어서 자라거라 속삭여주고/ 봄비와 햇살도 흠뻑 맞혀주고 난 후/ 흙 속에서 깨어나는 어린 뿌리들의 웅성거림과/ 벌어지는 꽃잎의 살폿한 소리를 들으리라 -<정의홍 시집> 중
먼 훗날의 소원을 이룬 남편 정의홍 씨에겐 또 다른 희망 사항이 있다. 은퇴 후 강원도 한적한 숲 속에 조그만 농장을 가꾸고 닭과 오리, 거위를 키우며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을 흉내 내는 것. 하나는 영화 속 트랩 대령과 마리아처럼 사랑하는 이와 발갛게 볼을 붉히며 아름답게 왈츠를 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해 질 녘 어두운 정원의 큰 나무 아래에서 서로 이마를 맞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란다. 그래서 요즘 춤과 노래를 배우느라 주말에도 무척 바쁘다. 아내 윤상미 씨 역시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뭔가 새로운 것이 눈에 띄면 정신이 번쩍 납니다. 눈에 익숙한 걸 계속 보면 정지된 느낌이죠. 하다못해 가구와 소품이라도 수시로 위치를 바꿔 색다른 변화를 주곤 합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할 수 없는 것을 지워나가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부부. 무엇보다 이 집이 매력적인 이유는 캔버스 위의 오래된 풍경화처럼 취향과 감각을 멋스럽게 터치한 그녀의 남다른 재주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 때문은 아닐까. 한결같이 자신들의 취향과 철학을 고수한 부부의 집이 유독 멋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5 인왕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전망은 이 집의 백미.

윤상미 씨 집에서 배우는 스타일링 팁
1
핸드메이드 타일과 투박한 목재 등의 소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것. 수공으로 제작한 타일은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찍어낸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손맛과 온기를 더해주는 아이템이다.
2 가족실을 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들고 싶으면 소파를 마주 보게 배치한다. 공간이 넓지 않다면 2인용 소파와 편안한 암체어 2개를 ㄷ 자로 배치하는 것도 방법이다. 짝이 맞지 않아도 멋스럽다.
3 사진은 훌륭한 데코 소품이 된다. 선반이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거나 그림 대신 벽에 걸 수도 있다. 벽에 거는 액자는 모던한 프레임을 고를 것.
4 함지박, 궤짝, 소반 등 전통 소품은 스타일리시하게 바닥에 둔다. 같은 디자인이 있다면 쌓아두는 것도 멋스럽다.


이지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