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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기행 구한말 조선 판소리의 메카, 전주 학인당
전주는 판소리의 고장이다. 조선시대부터 팔도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은 전주로 몰려들었다. 소리꾼들의 한마당인 전주대사습놀이의 명맥을 잇기 위해, 구한말 전주의 만석꾼 백낙중은 학인당을 세워 판소리 공연장을 만들었다.


전주 학인당은 판소리 공연을 위해 지은 집이다. 1905년에 시작해 1908년에 완공한 99칸 저택의 본채로 보통 한옥 3채의 크기에 달한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세 개의 방문을 들어올리거나 철거하면 학인당은 대형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한강 이남에서 민간인이 살던 고택 가운데 가장 화려한 고택이 전주시 교동에 있는 학인당 學忍堂이다. 어떤 점이 화려하다는 것인가? 학인당의 본채 규모는 기둥 안으로만 따지면 67평이다. 처마 밑으로 환산하면 76평이다. 칸수로는 28칸 반의 규모이다. 보통 한옥 3채 크기의 규모다. 높이도 높다. 이층집 높이다. 높이와 넓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붕을 떠받치는 ‘도리’가 일곱 개나 된다. 도리가 일곱 개인 한옥을 ‘칠량 七樑집’이라 부른다. 칠량집은 궁궐의 전각이나 사찰의 대웅전을 지을 때 사용하는 양식이다. 또 칠량집은 실내 공간이 넓고 높이도 2층 건물 높이에 가깝기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방과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설치되어 있고 그 복도는 마루로 되어 있다. ‘ㄱ’자 형태의 본채를 돌아다니려면 복도를 따라서 다녀야 한다. 이는 궁궐에서만 사용되던 양식이다. 궁궐 양식을 민간 주택에 적용한 것이다. 집 내부에는 유리로 만든 여닫이문, 서재, 세면장, 목욕탕, 화장실을 갖추었다. 전기 시설과 수도 시설도 도입했다. 개화기에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첨단 시설을 모두 갖춘 셈이다. 외양은 궁궐 양식의 한옥이지만, 내부는 당시 최신식의 시설을 갖춘 개화기의 개량형 주택이었다. 방에 바른 벽지도 두껍다. 학인당은 벽지를 바를 때 여덟 번을 겹쳐서 발랐다. 여덟 번 겹쳐서 바른 벽지를 ‘팔배접’이라고 부른다. 한지를 한 번 바르고 말린 다음에 다시 바르고, 다시 말린 다음에 또 바르는 방법이다. 공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팔배접은 아주 드문 양식이다. 이처럼 여덟 번을 겹쳐서 바르면 우선 방음이 잘된다. 옆방의 소리가 차단된다. 한옥의 약점이 옆방의 작은 소리도 들린다는 점인데 팔배접을 하면 방음 효과가 우수하다. 아울러 방습・방풍 효과도 우수하다. 그렇지만 돈과 공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팔배접 도배는 쉽게 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이 역시 궁궐에서 주로 사용하던 도배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크고 화려한 집을 구한말에 민간인이 어떻게 지을 수 있었는가? 이 집은 1905년에 짓기 시작하여 1908년에 완공되었다. 대지 2천 평에 99칸의 저택이었다. 쌀로 환산하면 당시 8천 가마에 해당하는 돈이 공사비로 들어갔다. 목재도 백두산에서 나온 홍송을 뗏목으로 운반해 썼다고 한다. 압록강에서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군산항으로 운반한 다음 군산에서 다시 육로를 통해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주와 군산 사이에는 일제에 의하여 신작로가 완성되어 있었다. 집주인은 수원 백씨인 백낙중 白樂中(1883~1929)이었다. 전주의 백 부자로 만석꾼이었다. 백낙중이 자기 집을 이렇게 크고 화려하게 지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판소리 공연 때문이다. 이 집은 판소리 공연을 목적으로 공연장으로 지은 한옥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개인 주택 가운데 애초부터 판소리 공연장용으로 지은 건물은 학인당이 유일하다. 물론 99칸 전체가 공연용 한옥은 아니다.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행랑채, 문간채에서는 가족과 하인이 거주했고, 본채를 공연장 용도로 지었다. 현재 학인당은 2천 평 대지에서 5백 평 정도로 축소되었고 헐린 건물도 많지만, 본채 건물만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구한말 조선 판소리의 메카가 바로 이 학인당 본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 1900년대 초반에 지은 학인당은 궁궐식 한옥 양식에 서양 건축 양식을 더한 건물로 입식 욕실이 설치되어 있다.

판소리 전성기는 대원군 시대였다고 한다. 대원군 본인이 엄청나게 판소리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소리꾼을 수시로 운현궁에 불러들였고, 소리꾼에 대한 대접도 후했다. 당시 소리꾼으로서 최고의 출세는 대원군 앞에 불려 가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 소리꾼들은 주로 전라도에서 공급되었다. 판소리는 전라도에서 발달했는데 전라도 소리꾼들이 모여들던 곳이 바로 전주다. 전주는 이성계의 고향이자 전라감영이 있던 도시였으므로 물산이 집중되던 곳이고, 서울의 대궐과 직접 정보가 교류되는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다. 대원군에게 소리꾼으로 불려 가려면 일단 실력을 검증받아야 했다. 그 검증 방법이 전주대사습놀이였다. 호남을 비롯한 전국의 소리꾼들이 전주에 와서 실력을 겨뤄야 했다. 구한말에 대사습놀이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에서 진행했다. 어느 쪽에 청중이 더 많이 모이느냐를 보고 기량 있는 판소리 고수를 판단했다. 명창이 있는 곳에 관중은 몰려가기 마련이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주대사습놀이를 전라감영과 전주부 같은 관청에서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의 관료 기구가 유명무실하게 된 탓이다. 결국 전주대사습놀이는 민간에서 맥을 이어갔다. 민간이라 하면 백 부자 집인 교동의 학인당을 말한다. 그러니까 학인당은 판소리 맥을 잇기 위해 지은 집이다. 왜 학인당이 이처럼 판소리에 집착했는가? 공연장까지 지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씨 집안과 대원군의 의리 때문이다. 이 집안과 대원군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원군은 정권을 잡기 전에 전국을 유랑하는 낭인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인연을 맺었다. 대원군이 유랑 시절 전주에 왔을 때 학인당의 주인 백낙중의 부친인 백진수 白晋洙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해졌다고 전해진다. 만석꾼이었던 백진수가 빈털터리 낭인 대원군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했던 모양이다. 그 뒤로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상황이 일변했다. 전주 만석군 백진수는 대원군의 정치 자금을 대는 후원자가 된 것이다. 백진수는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재산을 모은 사람이다. 그는 원래 무반 武班 집안의 후손이었다.


2, 3 학인당은 1960년대 전주의 문화 살롱 역할을 했다. 소리꾼을 비롯하여 서예가, 화가, 문필가 등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그 시절을 말해주듯 집 안 곳곳에 당대 서화가들의 작품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무반들이 생계를 위해 상업에 종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큰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다. 백진수도 이러한 사례인 것 같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이라는 큰돈 드는 사업을 추진할 때 백진수도 거금을 댔다. 그 대신 백진수는 세 가지 소원을 대원군에게 이야기했다. 첫째는 큰 집을 짓게 해달라는 것이다. 당시는 명문거족이 아닌 하급 무관 또는 중인 계층에서 돈이 있다 해서 아무나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큰 집은 신분이 높아야 지을 수 있었다. 둘째는 전라도에 부임했다가 임기가 끝나 떠나는 모든 벼슬아치들의 이임 인사를 백 씨가 할 수 있게 해달라 했다. 이는 상당한 처세술이다. 부임하는 관료들의 인사를 받겠다는 것은 중인 계층인 백씨가 엄두를 낼 수 없는 권력이었지만, 떠나는 사람들의 환송회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된다. 전라도에 부임했던 관찰사를 비롯하여 목사, 군수 등의 벼슬아치들은 전라도를 떠날 때 백 부자 집에서 열어주는 환송연에 참석했다. 일단 돈을 쓰는 일이므로 명분은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백 부자는 소문이 났다. ‘전라도에서 벼슬을 하려면 백 부자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는 소문이다. 환송연을 하면서 관료들과 인연을 맺었고, 자연스럽게 백 부자와 대원군과의 돈독한 관계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이 전라도의 모든 고급 관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으로 작용했을 것은 뻔하다. 백진수의 출신 성분은 중인이었지만, 대원군 치세하에서 실제 지녔던 영향력은 전라도의 인사권을 총괄했던 셈이다. 대원군과 백 씨의 긴밀했던 관계는 백진수의 둘째 아들인 백남신 白南信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백남신은 백낙중의 친형이다. 원래 백남신의 이름은 백낙신 白樂信이었는데, 고종이 ‘남쪽에서 믿을 사람은 너다’라는 뜻으로 ‘남신 南信’이라는 이름을 직접 내려주었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에게 전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는 왕실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후의 사태 수습을 원만하게 처리한 사람이 바로 백진수의 둘째 아들인 백남신이었던 것이다. 이때 백남신은 2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는 경복궁 중건에 거금을 내놓았고, 아들은 동학혁명 이후의 전주를 포함한 전라도의 혼란한 인심을 수습하고 후속 조치를 원만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백남신이 모악산에서 도를 깨우쳤던 강증산과도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백남신 역시 강증산을 위해 10만 냥이라는 거금을 희사했다. 이 정도 돈을 내놓을 정도라면 보통 관계가 아니다. 강증산은 앞을 내다보았던 당대의 이인 異人이다. 짐작하건대 동학이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는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무장 武將 백남신은 강증산에게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자문했던 같다. 살다 보면 갈림길이 얼마나 많고, 그 갈림길에서 한 번 잘못 판단 내리면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백진수가 대원군에게 요구했던 세 번째 조건은 궁궐에 물품을 단독으로 납품할 수 있는 납품권이었다. 이는 상당한 이권이었다. 대원군은 이 궁궐 독점 납품권을 허락한다. 백진수 대에 성취한 저택과 인사권, 경제권 이 세 가지가 백씨 집안을 당대 전라도 제일의 부자로 만들었다. 전주 학인당은 백진수의 6남인 백낙중이 지었고, 2남인 백남신은 한일병합 이후 익산으로 가서 화성농장을 운영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 아들 대에 익산의 남성고등학교를 비롯한 화성학원이라는 교육 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1 2층 높이의 커다란 다락에서 장독대를 내려다본 풍경.
2 운치 있게 꾸며놓은 연못 정원.



3 궁궐식 한옥의 복도 구조와 서양식 가옥의 여닫이 유리문이 공존하는 학인당 내부.
4 학인당은 칠량집으로 실내 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높이도 2층 건물 높이에 가깝다.


그러니까 학인당 본채는 대원군에게 기량 있는 소리꾼을 발굴해서 올려 보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판소리를 공연하려면 집 안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야 했을까? 우선 천장이 높아야 한다. 천장이 낮으면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채 높이가 높다. 본채에는 다락이 있는데 다락 구조가 2층으로 되어 있다. 다락이 2층이므로 아래층까지 포함하면 본채의 높이는 3층이 된다.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판소리 공연은 본채의 대청마루에서 이루어졌다. 대청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방이 한 개이고, 서쪽으로 두 개의 방이 있다. 공연 시에는 이 세 개의 방문을 모두 들어 올리거나 철거하게 되어 있다. 팔분합들문(여닫이)과 팔분합창호지문(미닫이)이 그것이다. 문 밑에 있는 문지방을 분리하면 문턱도 없앨 수 있도록 설계했다. 대청마루 좌우가 전부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된다. 대청의 남북에 있는 유리사분합문(유리문)도 철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툇마루까지 하나의 공간이 된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하여 공간이 엄청나게 확대되는 것이다. 40평 정도의 공간이 확보된다. 이 확대된 공간에서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인원은 1백여 명 이라 한다. 학인당 본채가 1백여 명의 청중이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한옥 극장으로 변모하는 셈이다.


1 현재 걸려 있는 학인당 현판은 효산 이광열 선생의 글씨다.
2 전주 학인당은 1백 년 된 집이다. 집 안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물건이 눈에 띈다.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뽑아 만든 전주 한지 부채. 종잇장처럼 얇은 부채가 만들어내는 바람은 가히 환상적이다.



3 대청마루에서 공연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대청마루와 연결된 세 개의 방문을 모두 열거나 철거했다. 방과 방 사이의 미닫이문뿐 아니라 바닥의 문지방을 분리해 문턱도 없앨 수 있게 설계했다.

학인당은 해방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쇠락해갔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전주의 문화 살롱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백낙중의 아들인 백남혁 白南赫(1905~1981)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30년대 중반부터다. 전라도의 소리꾼을 비롯하여 서예가, 화가, 문필가, 정치인들이 한데 모여 연회를 여는 문화 예술 담론의 공간이었다. 백남혁은 전북 서화계 書畵界의 어른이었던 효산 曉山 이광열 李光烈 선생을 모셨다. 효산이 창설한 한묵회를 중심으로 심농 조기석, 유당 강희순, 성재 김태석, 설송 최규상, 소파 송명회, 중당 김근진, 성산 이순재 등이 학인당을 즐겨 찾던 서화가들이다. 백남혁이 이들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했음은 물론이다. 백남혁의 절친했던 친구로는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 금추 이남호, 소정 변관식, 묵로 이용우, 의재 허백련 등을 꼽을 수 있다. 국악계 인사로는 전주 전동에 ‘행원 杏園’이라는 유명한 음식점을 운영하던 남전 허산옥을 중심으로 만정 김소희, 박녹주, 김연수, 박초월 등이 있다.
6백여 채의 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전주 한옥 마을. 그 한옥 마을의 핵심이 학인당이다. 앞으로는 전주천이 감아 돌고 전주천 너머로 승암산, 남고산성, 곤지산이 학인당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세다. 이제 학인당에서는 그 후손들이 한옥 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돈을 내면 외부인이 와서 잠을 잘 수 있는 집이다. 뜰 앞에 계단을 통해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 우물이 인상적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 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 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조용헌의 명문가> 등의 저서가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