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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 산이 품어주고 노을이 물들인 경주 집
어미의 마음을 가득 담아 지은 집이 있다. 그 집에서 오는 9월 딸의 결혼식이 열린다. 마당 한쪽의 작은 수영장은 언젠가 태어날 손자들을 위한 것이다. 경주 토함산을 배경으로 7백 평(약 2314㎡)의 넓은 대지 위에 앉은 임춘분 씨의 집 이야기이다.


토함산을 배경으로 한 이 집은 제주도 포도호텔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 집 왼편에는 거실과 식당, 주방이, 오른편에는 방들이 있다.

신문지에 매직펜으로 편하게 내려 쓴 엄마의 글씨. “식구들하고 맛있게 먹어라.” 택배 상자 안에는 토마토와 가지가 가득 담겨 있다. 신사동 이탈리아식 레스토랑 ‘그랑씨엘’과 그 옆에 나란히 있는 뉴욕 스타일의 브런치 카페 ‘마이쏭’의 이송희 씨 어머니가 직접 가꾸어 보내온 것이다. 한번은 삶은 달걀에 그랑씨엘 식구들의 얼굴을 일일이 그려서 보낸 적도 있다. 이어지는 이송희 씨의 집 이야기는 어머니 임춘분 씨에 대한 은근한 자랑이기도 하다. “경주 집 마당 한쪽에는 목화를 키우고 계세요. 첫 손자에게 이불을 만들어주시겠다며 키우는 거예요. 제 방에 할머니가 물려주신 농이 있는데 그것도 꼭 열어보세요.”
경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이송희 씨의 이야기를 되뇌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건축가 이타미 준의 포도호텔에서 감명을 받은 어머니 임춘분 씨가 직접 디자인을 해가며 지은 집. 대지 면적이 7백 평(약 2314㎡), 건평이 3백 평(약 991㎡), 4백 평(약 1322㎡)에 이르는 마당에는 무엇이 있을까? 면 티셔츠까지 다려주었던 어머니의 세심함이 곳곳에 스며든 집이라 했다. 원래 울산에 살았던 이들 가족, 지금은 이송희 씨와 남동생은 각각 서울과 울산에 살고 있지만 부모님은 5년 전에 경주에 정착했다. 경주시 토함산을 등지고 불국사를 이웃으로 둔 조용한 마을이다.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공들여 지은 듯한 집들이 넓은 대지에 들어서 있다. 그 가장 안쪽에, 콘크리트 기둥을 사이에 둔 모던한 나무 대문이 있다. 이곳이 바로 임춘분 씨의 집이다.


1 손자들 태어나면 놀 수 있게 수영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마감재 선택이 잘못되어 다시 공사를 할 예정이다.
2 구스타프 스티클리의 침대와 모노콜렉션의 장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안방.



3 어머니 임춘분 씨와 딸 이송희 씨 그리고 예비 사위 박근호 씨. 박근호 씨와 이송희 씨는 함께 신사동에서 ‘그랑씨엘’과 ‘마이쏭’을 운영하고 있다.


4 이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후식. 메밀싹 샐러드, 절편, 직접 만든 조청과 감주.

메밀싹, 절편, 조청과 감주로 손님을 반기다 대문이 열리자 마당 한가득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집은 낮고 길게 뻗어있었다. 임춘분 씨와, 장터에서 5천 원 주고 가족의 연을 맺게 된 강아지 ‘하늘이’가 마중을 나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임춘분 씨는 세면대를 가리키며 ‘우리 집에서 가장 필요한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세면대 옆에는 가지런히 접어놓은 타월 바구니와 비닐을 뜯지 않은 채 물을 채워 벽에 기대어놓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틈만 나면 정원을 가꾸는 임춘분 씨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복도가 유난히 긴 이 집은 현관을 기준으로 왼편으로는 거실, 식당, 주방이, 오른편으로는 서재, 안방, 손님방, 이송희 씨와 남동생 방이 있다. 식당에는 두 개의 식탁이 있고 넓은 나무 식탁 위로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고기보다는 생선이나 나물이 좋겠다 싶었어요. 많이 드시고 모자라면 말씀해주세요.” 점심을 다 먹자 나무 식탁 옆에 있는 검은색 4인용 식탁에 후식상을 따로 봐주었다. “우리 집을 찾는 손님들에게는 항상 새콤한 소스를 곁들인 메밀싹 샐러드와 절편, 그리고 직접 담근 조청과 감주를 대접해요.” 입안을 산뜻하게 해줄 뿐 아니라 쿠키나 케이크 보다는 훨씬 건강에도 이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울산에 살 때는 손님 초대를 많이 했는데 경주 오고 나서는 너무 많이 공개하고 싶지 않아 손님 접대를 주로 밖에서 했어요. 실은 이 집에 대한 책을 하나 준비하고 있거든요. 집 구경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서 올가을에 있을 제 딸 송희 결혼식도 여기서 치르려고요.”


(왼쪽) 복도가 유난히 길어 꼬맹이들이 달리기를 해도 될 정도다. 오른쪽으로는 구스타프 스티클리의 장식장이 있고 그 안에는 영국 빈티지 티웨어가 들어 있다. 왼쪽으로 흰 러그가 깔린 부분이 현관이다. 
(오른쪽) 거실은 박물관처럼 진열장을 짜서 지난 20여 년 동안 수집해온 골동품을 넣어두고, 식당 쪽 복도에는 토기와 미술 작품을 걸어놓았다.


꿈을 이뤄준 세 번째 집 짓기 ‘자연 속에 누운 집.’ 이 집을 찾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는 첫인상이다. 지금까지 세 번 집을 지어보았다는 임춘분 씨는 그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 세 번째 집을 짓기에 이르렀다. 이 집을 짓는 데에는 1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5년 전 이사를 왔다. 집은 동서로 나뉘는 구조이다. 40m 가량의 긴 복도, 그 중앙에 창밖으로 중정이 있고 이를 축으로 서쪽으로 가족들이 함께하는 공적인 공간을, 동쪽으로 방과 서재 등의 사적인 공간을 두었다. 임춘분 씨는 “제주도에 있는 포도호텔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낮게 펼쳐진 호텔과 그 안의 긴 복도가 참 인상적이었어요”라며 자신의 집도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다니다 경주 토함산 자락에 산이 품어주고 노을이 물들이는 단층집을 지었다. 어느 날 집을 배경으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고선 ‘노을이 아름다운 집’이란 이름도 붙여주었다.
집 안에는 식당과 마주한 곳에 다실이 있다. 서울, 울산, 부산서 온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기 딱 좋을 법한 공간이다. 다도에 관심이 많아 다기를 갖춰놓고 시간 나면 이곳에서 차도 마시며 여유를 즐기곤 한다. 다실 한쪽 벽에는 낯익은 장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바로 모노콜렉션 장응복 씨가 만든 장이다. 비단 다실뿐만이 아니다. 이송희 씨와 동생의 방에는 모노콜렉션에서 맞춤 제작한 가구 세트를 들여놓았다. 안방에는 미국 아트&크래프트 운동을 주도했던 구스타프 스티클리의 침대와 모노콜렉션의 장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집 안에 있는 살림살이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차와 동서양의 축을 두고 묘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구스타프 스티클리의 가구와 모노콜렉션의 가구, 또 신라시대의 토기와 영국의 빈티지 찻잔 세트 등이 그러했다. 한창 집을 지을 때는 살림을 장만하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서울과 경주를 오갔다. 논현동 가구 거리 드나들기를 내 집 드나들듯이 했다. 그러면서 우연히 모노콜렉션 매장을 찾아가게 되었고 꼭 맞는 취향의 가구와 패브릭, 소품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욕실 설비도 직접 건축 업자와 함께 다니며 알아보았다. 어느 하나 신경 안 쓴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세심하게 준비했다. 감색, 검은색, 회색을 주요 색으로 집 안의 색감도 통일했다. 또한 임춘분 씨의 세심함은 손님방에서 더욱 돋보이는데, 욕실에는 악소르 Axor의 원형 샤워부스를 들여놓고, 마당과 직접 연결되는 별도의 출입문을 두어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으며, 방문을 이중으로 해놓아 완벽하게 소음을 차단하는 등의 배려가 엿보였다.


1 모노콜렉션 장응복 씨의 가구를 맞춰 넣은 다실.
2 목화에서 솜을 따다 모아놓았다. 올 9월 시집가는 딸이 얼른 손자부터 안겨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임춘분 씨는 이 솜으로 이불을 지어주겠다 한다.



3 식당 벽장에는 수집해놓은 그릇과 소반들이 들어 있다.


4  ‘호텔 같은 욕실’을 그리며 건식 욕실을 만들었다. 넉넉한 공간에 샤워실과 변기를 안쪽에 따로 설치해놓았다.

여생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한 자리 이 집은 남은 생을 바라보며 지은 집이다. 또한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을 위한 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과 최대한 가까이 닿도록 했다. 마당에는 손자들을 위한 얕은 수영장도 만들었다. 결혼하고 울산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임춘분 씨는 나중에 나이 들면 꼭 경주에서 살겠다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주말이면 경주로 와서 온천을 하고 산책을 하고 감포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울산에서 사업을 하는 그의 남편은 여전히 한 시간 거리인 경주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오로지 아내 살고 싶은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리로 옮겨 온 것이었다.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곱게 살림을 하던 임춘분 씨에게 딸 이송희 씨를 키우는 것은 마치 취미생활처럼 즐거웠다. 이불 지으러 갈 때, 커튼 맞추러 갈 때, 그릇 사러 갈 때, 언제고 그는 딸과 함께 다녔다. 어려서 무엇을 알까 싶었는데, 엄마 손 잡고 따라다니며 본 것들이 결국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 되었다고 말하는 딸이 되었다. 지금 임춘분 씨는 결혼을 앞둔 딸의,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들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분주히 보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손자들이 이 집에서 좀 더 안전하고 자유롭게 뛰놀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수영장도 만들고, 책상도 마련해놓았다.
임춘분 씨는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 책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집 짓는 이야기부터 살림 사는 이야기, 정원 가꾸는 이야기 등 그동안 아껴둔 이야기들을 들려줄 계획이다. 아이들 도시락통처럼 애정이 깃든 보조 소품들도 등장할 것이다. 책에 수록될 사진은 예비 사위가 촬영할 계획이다. 주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촬영이 끝나갈 즈음, 이송희 씨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예비 신랑 박근호 씨와 함께. 문 열기가 무섭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와 엄마와 꼭 끌어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딸, 그리고 그 옆에서 서글서글한 웃음과 농담 몇 마디를 건네는 예비 사위. 어머니에게 그런 사위는 딸이 안겨준 고마운 선물이기도 하다. 자연은 집을 품고, 집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다시 자식을 품는 행복의 풍경이 머무는 자리, 그곳이 바로 이송희 씨의 경주 집이었다.


5 식당 쪽에서 중정을 통해 임춘분 씨의 서재를 바라본 모습. 집 안 어디에서도 자연을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6 임춘분 씨의 서재. ‘ㄷ’자 형의 집으로 창밖으로 중정을 거쳐 식당이 보인다.

김명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