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조용헌의 백가기행]전라남도 나주 박장흥 고택 나주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집
나주는 호남 물류의 중심지로 조선시대에 세금 납부액이 전국 1위였을 만큼 부자 도시였다. 지주와 토호가 많이 살았지만 조선 말기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 같은 격변기를 겪으면서도 인명 피해가 크지 않았다. 나주 토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박장흥 고택을 보면 그 연유를 알 수 있다.
필자는 집을 답사할 때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 먼저 풍수 風水다. 집을 둘러싼 산세와 물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집의 역사는 어떤가, 역대 집주인의 인생은 어땠는가, 건축적 특징은 무엇인가, 정원은 어떻게 조성했는가, 어떤 나무를 심었는가, 실내 장식과 가구는 어떤가 등등이다. 우선 이 집의 택호 宅號는 ‘박장흥 朴長興 고택’이다. 현 주인인 박경중 朴炅重 씨의 고조부인 박재규 朴在圭가 전남 장흥의 군수를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한말에 나주의 세 토호 집안이 군수를 지냈는데, 정해남 鄭海南, 김해남 金海南, 박장흥 朴長興이 바로 그 집안이다. 나주 정씨 집안에서 해남군수를 지냈고, 김해 김씨 집안에서 역시 해남군수를 지냈다. 이 세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이 아니다. 나주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중인 집안으로 돈은 있었지만 벼슬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동학농민혁명을 즈음해서 군수라는 벼슬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안동 아전 衙前 3천이요, 나주 아전 3천이다”는 말이 있다. 뿌리 깊은 도시인 영남의 안동과 호남의 나주에는 아전 계층이 그만큼 두텁고 세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아전은 관아 官衙 앞 前에 사는 사람이다. 요즘으로 치면 지방 하급 공무원에 해당한다. 사또나 원님은 1~2년 근무하다가 발령이 나면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지만 아전, 즉 중인 계층은 발령이나 전근이 없으므로 계속해서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토착 기반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나주라는 지역은 호남 물류의 중심지이자, 역사적으로 물산이 가장 풍부한 곳이었다. 서해안의 목포 앞바다, 즉 신안군의 70여 개 섬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산이 영산강을 통해 나주로 집결되었다. 영산강은 삼국시대부터 나주를 번성케 한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위) 박장흥 고택을 길 건너 건물에서 내려다보았다. 옛집이 모두 사라진 나주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이다.


현재 박장흥 고택을 지키고 있는 박경중 씨의 6대조가 1880년대경에 지은 초가삼간이 후원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부를 이루었지만 못살고 어렵던 시절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나주는 내륙 도시이면서 서해안과 영산강을 통해 배로 연결되는 항구 도시였던 것이다. 수륙양용 水陸兩用 도시이다. 나주에서 배에 물건을 싣고 영산강을 통해 바다로 나오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할 수 있었다. 해류를 타면 신안군에서 개성까지 화물이 도착하는 시간이 1박 2일이면 가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 왕건 때부터 개성과 나주는 같은 문화권에 속했다. 이를테면 ‘셔틀 해류’ 문화권이었다고나 할까. 고려시대에는 나주와 광주를 묶어서 해양도 海洋道라고 부른 적이 있다. 전라도 全羅道가 전주 全州와 나주 羅州의 줄임말이지만, 실질적인 물류나 물산의 기준으로 보면 나주가 전주보다 더 비중이 컸다. 나전도 羅全道라고 해야 맞다. 그만큼 나주는 부자 도시로 조선시대에 세금 납부 액수가 전국 1위였고, 인구는 전국 5위였다. 나주 부자들의 명맥은 중인 계층을 통해서 이어져왔다. 이 중인 계층이 나주의 토족 土族을 형성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주성은 동학군에게 함락되었지만, 나주성은 동학군이 함락하지 못했다.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면 삼별초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나주를 공략했지만, 나주 토족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함락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주 토족들은 성내의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고, 물질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사병 私兵을 동원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돈이 있으면 사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사병은 한 집안에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사병은 그 집안의 종이나 소작인들이었다. 평상시에는 농사짓고 일하다가 난리가 나면 병력으로 동원되었다.


12평 남짓한 대청마루의 앞・뒤쪽 들장지를 모두 들어 올리면 1백여 명의 사람이 모일 수 있는 회합의 공간이 된다. 박장흥 고택의 박경중 씨(왼쪽)와 필자 조용헌 선생이 박장흥 고택을 비롯한 나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장흥 고택은 나주의 중인 계층, 나주의 토족 가운데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희귀한 집안이다. 고택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고택은 전체 대지가 1천5백 평인데 사랑채가 5백 평 규모이고, 안채가 1천 평 크기이다. 사랑채는 음식점으로 외부인에게 임대했고, 안채만 집주인이 거주한다. 그런데 이 안채의 건물이 볼만하다. 건평이 무려 50평이나 되는 안채는 쉽게 구경할 수 없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큰 집에 해당한다. 고건축 용어로 표현하면 칠량 七樑집이다. 칠량집은 거의 2층 높이의 한옥이다. 궁궐이나 사찰이 칠량집이 많은데, 민간 고택의 안채를 칠량집으로 했다는 것은 곧 재력을 상징한다. 방의 구조도 7칸 겹집이다. 겹집은 방이 양쪽으로 배치된 구조를 말한다. 앞에도 방이 있지만, 뒤에도 방이 있다. 말 그대로 겹이다. 겹집은 홑집에 비해 두 배나 되는 인원이 묵을 수 있다. 영남보다는 호남에서 이러한 겹집이 많이 보인다. 겹집이다 보니까 여기에 붙어 있는 마루도 아주 볼만한다. ‘ㄷ’자 형태의 마루다. 네모진 안채에서 부엌 쪽만 마루가 없고 나머지 삼면은 돌아가면서 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내가 본 우리나라 고택 가운데 이 집만큼 마루가 크고 윤기 나게 정돈된 집은 없었다. 마루의 길이는 14m다. 앞뒤의 마루가 각각 14m인 것이다. 그 중간 부분을 연결하는 마루는 8m다. 마루의 폭은 모두 1.5m다. 한옥의 특징은 마루다. 마루는 처마 밑에 있으므로 비를 맞지 않는 공간이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햇볕과 공기는 직접 접촉할 수 있다. 실내이면서 동시에 실외에 해당한다. 마루는 나무로 되어 있다. 차가운 쇠붙이가 아니다. 나무는 사람의 살이 닿을 때 독특한 촉감을 준다. 친근한 촉감이다. 이게 마루가 지닌 특징이다. 마루는 내외 겸용 內外兼用의 독특한 공간이다. 실내와 실외를 연결하는 중간 완충 공간 緩衝空間이기도 하다. 이 완충 공간은 정서적 기능이 있다. 바로 여유다. 한옥이 주는 알 수 없는 한가로움과 여유는 바로 이 마루에서 나온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나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 마루를 거쳐야 한다. 거치면서 감정이 여과된다. 바쁜 마음이 느슨해지고, 성난 마음이 가라앉는다. 완충 공간이 지닌 장점이다.


이 집은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에 지었다. 나라가 망하자 궁궐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박장흥 고택은 그 궁궐 출신 목수들이 지었다. 그런 탓에 기둥도 궁궐식인 도리기둥(둥그런 기둥)이다. 일류 목수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이 집안의 당시 재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집은 바깥 마루뿐 아니라 방과 방 중간에 위치한 대청마루도 위엄이 있다. 대청마루는 그 넓이가 12평이다. 약 30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다. 특히 여름에 대청마루는 그 진가를 발휘한다. 앞・뒤쪽으로 들장지를 올려서 걸어놓으면 뻥 뚫린 공간으로 변모한다. 바람이 앞뒤로 소통하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 ‘병신춤’으로 유명한 공옥진 씨가 이 집의 대청마루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들장지를 올려놓아 1백여 명 넘는 사람이 이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열린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공간이 대청마루라고 하겠다. 이 대청마루 위에는 시렁이 있다. 그 시렁에는 소반이 여러 개 놓여 있다. ‘나주 소반’, 명품 소반이다. 구조가 단순하면서 가벼운 것이 나주 소반의 특징이다. 소반은 가벼워야 한다. 밥사발과 음식 사발을 얹은 상태로 수시로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인이 단순해지고 그 대신 튼튼하면서 가볍게 진화되었다. 나주 소반의 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주 소반, 해주 소반, 통영 소반이 우리나라 3대 소반이다. 모두 해로와 연결되는 지역에서 생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류 때문이다.

대청마루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물은 쌀뒤주다. 거대한 쌀뒤주가 놓여 있다. 어느 정도 크기냐고 주인에게 물어보니 “쌀 10가마 반의 분량이 들어간다”는 대답이다. 실내에 들여놓는 쌀뒤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닌가 싶다. 경주 최부잣집 마당에 수백 석이 들어가는 창고가 있지만 실내에서 사용하는 쌀뒤주는 이만한 크기를 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사도세자가 갇혔던 뒤주의 크기에 해당할까? 이 집 뒤주는 하도 커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 1m 높이의 자그마한 사다리가 뒤주 옆에 놓여 있다. 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야만 뒤주 속의 쌀을 꺼낼 수 있다고 한다. 쌀이 10가마 반이라면 이 집의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다. 큰 뒤주 옆에는 반절 크기의 작은 뒤주가 같이 놓여 있다. 이것도 역시 5가마는 들어갈 성싶다. 두 개의 뒤주에 15가마의 쌀을 비축할 정도면 한 달에 밥을 먹는 식구 내지는 식솔들이 얼마나 될까? 40~50명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집에서 일하는 하인은 집 밖에 살았지만 밥은 주인집에서 먹었다. 하인들과 딸린 식구들의 먹을거리도 역시 주인집의 뒤주에서 나왔다. 그런가 하면 사랑채에 머무는 과객들의 밥도 이 뒤주에서 나왔을 것이다. 과객과 손님이 하루에 5~6명만 되어도 하루에 세끼를 곱하면 한 달에 거의 4백~5백 명분에 해당하는 밥을 제공해야 한다. 이 집에서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은 줄잡아 수백 가마 분량이었을 것이다.

(위) 나주 소반.


1 민간 가옥으로 앞・뒤・옆면의 마루 폭이 같은 경우는 이 집이 유일하다.
2 살림살이 곳곳에 1백여 년의 세월이 묻어 있다.


이 집 마루에는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누마루는 앉아서 바깥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곳이다. 부채를 들고 누마루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앉아서 바깥의 산세나 구름, 안개, 비가 오는 모습 등을 감상하는 공간이 사랑채의 누마루다. 한옥에 누마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격조의 차이라고나 할까. 한옥을 새로 짓는다면 돈이 들더라도 누마루는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런데 이 집은 사랑채가 아닌 안채에도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후원 쪽 마루에 누마루가 있는데 전망이 서북쪽을 바라본다. 서북쪽으로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 錦城山이 보인다. 금성산은 명산으로 서북쪽을 막아주는 산이다. 서북쪽은 살풍이 불어오는 곳이다. 그러므로 풍수에서는 서북쪽이 열려 있으면 집에 도둑이 끓거나 재앙이 찾아 든다고 믿는다. 서북쪽이 열려 있는 집터는 별로 좋지 않다. 나주는 서북쪽을 금성산이 튼튼하게 막아주고 있어서 재물이 새지 않고, 나주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이 금성산은 둥글둥글한 모습이다. 괴팍하거나 날카로운 바위산의 모습이 아니다. 둥그런 산은 금체형이라고 부른다. 금체형은 점잖은 양반의 모습이라고 해서 선비들이 선호하던 산으로 노적봉이라고도 부른다. 노적봉은 부자의 상징이다. 참고로 경남 의령군 정곡면의 이병철 생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바로 이 노적봉이다. 노적봉이 주변에 많으면 부자가 나온다고 믿는다. 이 집 안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돈 많은(?) 부자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름이 봉우리에 걸쳐 있는 모습이나 여름비 내리는 경관을 누마루에 앉아서 감상한다. 여자들을 위한 배려이다. 이렇게 여자를 위해서 누마루를 설치한 집이 얼마나 될까.


3 후원 쪽 누마루.
4 10가마 반이 들어가는 쌀뒤주. 속이 깊어 앞에 놓인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


이 집은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에 지었다. 나라가 망하자 궁궐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궁궐 목수들이 여수의 흥국사를 지은 뒤 바로 이 박장흥 고택을 지었다. 기둥도 둥그런 도리기둥으로 궁궐식이다. 안채의 누마루도 화려하다. 궁궐 목수들이 지은 탓이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이 집안은 만석꾼 집안으로 일류 목수들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 많은 재산은 어떻게 모았을까? 집은 1820년대부터 나주에서 콩 장사를 시작했다. 영산강가의 포전 浦田에 콩을 심어서 팔았다. 그 콩 장사 장부들도 아직 보관 중이다. 콩 장사가 잘되니까 팥죽도 끓여서 팔았다. 그리고 이러한 물품들을 운반하기 위해서 나중에는 소 장사도 했다. 소가 병이 나면 어떻게 치료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재된 문서도 남아 있다. 소는 1백50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의 재산은 1870년경 3백 석을 하다가 그 뒤 비약적으로 증가해 조부인 박준삼 朴準參 대에는 8천 석을 하였다. 8천 석이면 만석꾼이라고 불렀다. 조부는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갔다 왔는데 3・1운동에도 참여했고, 나주학생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한 인물이다. 광주학생운동은 통학 기차 안에서 박기옥이라는 조선 여학생이 일본 학생 후쿠다에게 머리채를 잡히면서 시작되었다.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인 박준채 朴準彩가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후쿠다를 두들겨 팼다.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박준채는 바로 박준삼의 동생이다. 박기옥이라는 여학생도 이 집안 사람이다. 광주학생운동 외에 나주학생운동이 있었는데, 그 주모자 네 명(박공근, 유찬옥, 박동희, 양영택)이 모두 재판을 받고 실형을 받았다. 박공근은 조부인 박준삼의 친척이고, 유찬옥은 박씨 집안의 외손이고, 박동희는 박준삼의 당숙이고, 양영택은 박준삼의 어머니 제주 양씨 집안이었다. 모두 이 집과 연관 있는 인물이므로 이 집에 자주 와서 밥 먹고 놀던 사람들이다. 박장흥 고택은 나주학생운동의 배후 조종 집안인 셈이다. 지주와 토호가 많이 살았던 나주가 한국전쟁 때 인명 피해가 적었던 이유도 이 집안이 좌우익의 중간에서 거중 조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조부 박준삼이 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부잣집의 화려한 마루와 누마루가 난리 통에도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 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 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조용헌의 명문가> 등의 저서가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