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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의재 허백련 선생의 무등산 춘설헌 예인의 풍류와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집
전남 무등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춘설헌은 한국 근대사에서 호남 제일의 살롱이었다. 의재 허백련 선생이 머물렀던 이곳에 호남 제일의 예인들과 사상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찻잔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가도 흥이 나면 붓을 들었다는 의재 허백련 선생. 춘설헌에는 그가 품었던 예인의 풍류와 민족 사상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1 증심사 건너편 계곡의 춘설헌은 양쪽의 계곡물이 합쳐지는 합수처에 자리 잡고 있다. 양쪽 물이 합쳐지는 지점은 산의 화기와 물의 수기가 만나는 곳이기에 예로부터 명당이다.
2 의재 선생은 그림 공부하는 제자들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들을 배출해내기도 했다.


문화는 밥 먹고 난 뒤의 일, 즉 식후사 食後事다. 배고프면 문화가 나오기 힘들다. 밥이 어디에 많았는가. 전라도 땅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가장 먹고살기 풍족한 곳이 전라도였고, 식후사의 원리에 따라 한국의 전통 예술은 호남에서 발달했다. 호남은 먹고 노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을 비롯한 판소리를 비롯하여 음식, 의복, 서화 書畵 전문가들이 대부분 전라도에서 배출되었다. 예인 藝人의 본향이 전라도이다. 전라북도가 상대적으로 서예가 발달했다면, 전라남도는 그림이 강세다. 그림을 놓고 본다면 남도의 맥은 일단 진도 운림산방의 허소치가 중시조이다. 허소치에 집중되어 있던 화맥은 이후 두 줄기가 갈라진다. 하나는 광주의 의재 毅齋 허백련 許百鍊(1891~1977)이고, 다른 하나는 목포의 남농 허건이다. 흔히 호남을 예향이라고 하는데, 그 예향의 양대 맥을 이루는 지점이 광주와 목포인 것이다. 광주는 의재 허백련의 영향력이 컸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라는 말이 있다. 그 수양산이 바로 의재이다. 그리고 그 의재의 창작 공간이자 호남 예향의 살롱 역할을 했던 장소가 무등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춘설헌이다. “한 사발의 봄눈은 제호보다 낫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말이 바로 봄눈, 춘설 春雪이다. 증심사 건너편 계곡의 춘설헌은 그 터도 예사롭지 않다. 양쪽의 계곡물이 한군데로 모아지는 합수처 合水處에 자리 잡았다. 고대로부터 양쪽 물이 합해지는 지점은 명당이다. 산의 화기와 물의 수기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의 수기를 받아야만 장수하고 재물도 오래가는 법이다. 그래서 유명한 절터나 기도 터를 보면 합수처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춘설헌 터도 이런 곳이다. 더군다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 水口, 즉 좌청룡과 우백호가 만나는 부분이 뻥 뚫리지 않고 닫혀 있어서 좋다. 이처럼 조건이 갖추어진 터를 옛날 사람들이 그냥 놔두었을 리 없다. 춘설헌 자리는 원래 석아정 石啞亭 자리였다. ‘돌 벙어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던 최원순 씨가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려고 조그만 토굴을 지었던 것이다. 돌 벙어리가 되겠다는 작심을 하고 지은 이름 같다.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았다는 반성의 다짐이었을까? 그다음에는 이 자리에 오방정 五放亭이 들어섰다.


1, 2, 4 춘설헌의 5평 작은 방은 의재 선생의 숙소이자 응접실이고 작업 공간이었다. 춘설헌은 원래 방 두 개짜리 조그만 집이었으나 의재 선생을 찾는 객이 많아져 후에 방의 수를 늘렸다고 한다.

이 이름 또한 가관이다. ‘다섯 가지를 놓아버렸다’는 뜻이다. 명예욕, 물질욕, 성욕, 식욕, 종교적 독선이 그 다섯 가지다. 오방정의 주인은 최흥종이었다. 그는 원래 광주 깡패였다. 깡패 시절 이름은 ‘망치’. 망치는 사람을 패고 다니다가 회심을 하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목사가 되었고, 광주 YMCA를 창립하고, 최초로 나환자촌을 만들어 그들을 돌보면서 살았다. 그가 56세에 이 오방정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기에 들어오면서 ‘최흥종은 죽었다’는 부고장 訃告狀을 돌리고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사회적 삶을 모두 포기했다는 뜻이다. 의재보다 11년 연상이었던 최흥종은 의재와 의기투합했다. 농업학교 창립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둘이서 같이 했다. 춘설헌은 이 오방정을 이어받은 셈이다. 석아정과 오방정을 거쳐 춘설헌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 춘설헌 자리는 한국 근대사에서 광주의 정신이 뭉쳐 있는 곳이다. 이 3대 현판 글씨가 새겨진 현판이 의재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판 앞면의 ‘석아정 石啞亭’ 글씨는 성당 김돈희가 썼고, 그 현판 뒷면에 ‘오방정 五放亭’이라 새겨져 있다. ‘춘설헌 春雪軒’은 소암 현중화의 글씨이다.


3 춘설헌이 근대 호남 제일의 살롱으로 격을 갖추는 데 일조한 것은 바로 춘설차라 할 수 있다.

1956년에 지은 춘설헌은 원래 방 두 개에 마루가 있는 조그만 집이었다. 그러다가 의재를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건너편에 방을 두 개 더 늘렸다. 건너편 방은 평소에 제자들의 거처였다. 현재 본채는 방 두 개에다 거실, 부엌, 화장실이 딸려 있다. 4평짜리 방과 5평짜리 방이다. 의재는 이 방에서 내방객들을 맞았고, 밤에는 그 좁은 방에서 손님들과 같이 서로 몸을 붙이고 잤다. 춘설헌의 단골 멤버는 지운 김철수였다. 다석 유영모도 광주에 올 때마다 꼭 들렀고, 그 제자인 함석헌도 자주 왔다. 우리나라 차계 茶界의 어른인 효당 스님도 놀러 오곤 했다. 여수에 살던 백민 선생은 시를 잘 짓던 한량이었는데, 역시 자주 놀러 왔던 단골이었다. 추석이 되면 지운, 의재, 백민 세 사람이 모여 시와 그림을 지으면서 놀았다고 한다. 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당 창립 멤버이다. 경력으로 보면 김일성보다 선배이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도 만사 輓詞를 지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모든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부안에 은둔해 살았다. 중간에 감옥살이도 많이 했고 사상범이었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꺼리던 인물이었지만, 의재만큼은 정보부 눈치를 보지 않았다. 지운이 감옥에 있을 때 면회도 자주 갔다. 지운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는 춘설헌에 와서 있었다. 의재는 지운 손자들의 양육비에 보태라고 때마다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 그림을 팔아 70대의 노혁명가인 지운은 손자들을 돌보았다. 지운이 감옥에 있으면서 난초가 보고 싶다고 하면 의재가 엽서에다가 난초 그림을 그려 보내주었다. 현재 춘설헌 주변에는 여러 가지 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대부분 지운이 심은 것들이다. 지운은 의재에게 폐만 끼친다고 생각하였는지 틈날 때마다 꽃나무를 구해 와서 춘설헌 주변에 심었다. 춘설헌 문 앞에 백설 같은 꽃잎을 피우는 백진달래도 지운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함석헌도 머리 아픈 일이 있으면 자주 와서 며칠씩 쉬어 가곤 했다. 의재는 함석헌에게 “혈기 많은 젊은 사람들 너무 선동하지 말게!”라는 충고를 자주 했다. 1970년대에는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춘설헌에 두 번이나 방문했다. 도포를 입고 허연 수염에다 대지팡이를 짚고 춘설헌과 무등산 자락의 녹차 밭을 왔다 갔다 하는 의재는 동양화에 나오는 신선을 연상시켰다. 동양의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닌 의재에게 반한 게오르규는 한 번 다녀간 뒤 몇 년 후 다시 무등산을 찾았다. 게오르규가 말을 꺼냈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 말을 받아 의재가 “동양에서는 난초와 같다고 그럽니다. 세상이 탁하면 난초가 죽습니다.” 그러자 게오르규가 의재의 손을 꼭 잡았다. 여류 작가 루이제 린저도 여기에 다녀갔다. 게오르규나 루이제 린저도 춘설헌의 차를 마시고 간 것이다.

5 춘설헌 뒷마당에 피어있는 수선화


1 춘설헌은 의재 선생이 30년간 화실로 사용한 작은 집이다. 석아 최원순 선생, 오방 최홍종 목사가 머물렀던 터에 집을 지은 것으로 광주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역사 유적이다.

춘설헌의 5평짜리 방은 의재가 잠을 자고, 손님들과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가 흥이 나면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붓을 들고 산수화를 그리던 곳이다. 숙소이자 응접실이고 작업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모든 일이 5평짜리 조그만 방에서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할아버지 심부름을 하던 손자가 현재 춘설헌 계곡 건너편에 있는 의재미술관의 허달재 관장이다. 그는 할아버지 옆에서 먹도 갈고, 찻주전자에 물을 담아 오기도 하고, 방문객들 심부름도 했다. “손님들이 오면 어린 저를 불러서 할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서울에서 이름 있는 분이나 높은 분들께서 오시면 저를 부르지 않고 제자들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시골에서 촌로들이 오시면 손자인 저를 불렀습니다. 제자들이 이름 있는 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보면서 어린 저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왜 나를 부르지 않을까? 나도 유명한 분들과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그 이유가 짐작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컸던 것입니다.”
의재는 제자 욕심이 많았다. 인재를 양성해야 나라가 잘된다는 믿음이기도 했다. 저녁에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한문 공부를 시켰다. <명심보감> <논어> <대학> <중용> 등이었다. 그는 고전을 섭렵해야만 사람이 격이 높아진다고 여겼다. 그런데 노장 사상 老莊思想은 뒤로 미뤘다고 한다. 노장 사상은 나이가 좀 든 뒤에 배우면 좋다고 보았다. 의재 문하의 제자들은 유교 경전을 섭렵했기 때문에 대부분 시・서・화에 안목을 갖게 되었다. 의재는 연진회 鍊眞會를 조직하여 그림 공부 하는 제자들을 양성했고,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농업 분야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런가 하면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사상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의재가 호남 남종화 南宗畵의 거목이기도 하지만, 그는 화가라는 범위를 뛰어넘어 사회운동에도 상당히 깊이 관여했던 것 같다.


2 의재 선생이 직접 가꾸었던 녹차 밭, 춘설다원. 무등산 기운을 받고 자란 춘설차는 그윽한 맛과 향으로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다석이나 지운, 함석헌과 같은 당대의 사상가와 운동가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서로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뭐 하러 무등산 골짜기까지 왔겠는가. 지금은 원로가 된 시인 고은, 사진작가 주명덕, 강운구와 같은 사람들이 일찍이 20대 청년 시절에 춘설헌을 들락거렸다. 젊었을 때부터 대가 大家의 풍모를 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나이 들어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르다. 대가를 접해보아야 한다. 춘설헌은 그런 문화계 인사들의 감각을 기르는 산 교육장이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스케일이 있어야 한다. 의재는 20대에 일본 메이지 대학에 유학을 갔다. 처음에는 법학을 하려고 했지만 그림으로 행로를 바꿨다. 6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이때 일본 화단과 지식인들을 접촉하면서 안목이 넓어졌다. 당시 호남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갔던 인촌 김성수, 무송 현준호, 고하 송진우와 같은 인물들과도 교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지운은 일본 유학 시절 인촌과 아주 친한 사이였다. 의재는 일본에서 돌아와 전국을 방랑했다. 식민지 지식인의 울분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무등산에 들어온 것이다.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는 섬 진도 珍島. 진도의 허씨 집안 출신이 지녔던 화재 畵才와 일본 유학 그리고 식민지와 사회 현실, 의재 본인의 타고난 넉넉한 성품 등이 어우러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대의 명사들이 한번 만나보고자 했던 인품과 카리스마가 형성된 것이다.
춘설헌이 근대 호남 제일의 살롱으로서 격을 갖추는 데 일조한 물건이 있으니 그게 바로 춘설차이다. 춘설헌 주변의 무등산 자락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차 밭이 있었다. 해방 뒤 이 차 밭을 의재가 관리하게 되었다. 의재 본인도 원래부터 차를 좋아했다. 1950~60년・대에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춘설헌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의재는 무등산에서 나는 춘설차를 내놓곤 했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을 춘설헌이라 짓게 된 것이다. 차는 동양의 고급 문화이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자신만의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춘설헌에는 한국의 고전 풍류가 모두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바로 차, 그림, 글씨, 시, 그리고 민족 사상이다. 의재는 이 다섯 가지 오풍류 五風流를 가지고 한세상 멋지게 살다 간 인물이다. 그 오풍류의 현장이 춘설헌이다.

3 춘설헌 입구.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 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 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조용헌의 명문가> 등의 저서가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