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프랑스 랭스의 빌라 드무아젤 좋은 집은 샴페인 향기를 닮았다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의 소도시 랭스에는 샴페인 회사 ‘포메리’가 소유한 ‘빌라 드무아젤’이 있다. 아르데코 양식의 외관, 스테인드글라스와 식물 문양이 일체화된 아르누보 양식의 인테리어까지 세월의 아름다움이 덧입혀진 집이다. 프랑스 국가 문화재이기도 한 이 집을 들여다보면 문화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유리 한 장 한 장을 아르누보 양식으로 불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와 포도 넝쿨 장식의 벽 문양은 수천 시간을 들인 장인들의 공으로 원본에 가깝게 복원한 것이다. 여기에 아르누보의 상징인 이국적인 난초를 곁들였다.

보통 사람들에게 ‘집’이란 스위트 홈이지만 나탈리 브랑켄 Nathalie Vranken에게 빌라 드무아젤은 전통에 대한 존중이자 꿈이다. 2008년 겨울, 빌라 드무아젤이 4년간의 긴 공사를 거쳐 프랑스 TV 프로그램에 공개됐을 때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아르누보에서 아르데코로 넘어가는 기간의 건축과 실내 인테리어를 이토록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것이 건축가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아닌 한 여인의 힘이었다는 사실이다. 샴페인에 대해 좀 아는 이라면 이미 눈치챘을 테지만 나탈리 브랑켄은 산하에 여러 샴페인 브랜드를 거느린 브랑켄 그룹의 회장이자 포메리 Pommery 샴페인 도메인을 소유하고 있는 폴 프랑수아 브랑켄 Paul Francois Vranken의 부인이다. 그래서인지 나탈리의 첫인상은 여장부나 다름없었다. 몇 대째 파리에서만 살아온 오리지널 파리지엔인 나탈리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남편 폴 브랑켄을 만나기 전까지 샴페인과 와인 산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처음 폴이 샴페인 브랜드이자 큰 포도밭 도메인인 포메리를 인수할 생각을 내비쳤을 때 나탈리의 첫마디는 “당신 어디 아픈 거 아니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샴페인과 와인 분야는 전통과 가문을 큰 자랑으로 삼는, 요즘에는 보기 드문 산업 분야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포메리의 공장과 포도밭이 자리한 랭스 일대는 세계적인 샴페인 종가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다. 랭스에만 해도 테탕제, 뵈브 클리코, 마르텔, 뤼나르, 랑송 등이 있고 랭스의 위성도시인 에페르네에는 볼랭제, 모엣샹동, 동 페리뇽, 페리에 주에 등 수많은 샴페인 명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유명 프랑스산 샴페인 회사들의 본거지 주소는 이 지역의 우편번호인 51을 달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랭스에서는 덥수룩한 수염에 낡은 면바지를 입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영감이라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게 불문율이다. 그만큼 그 일대에 자자손손 포도밭을 일구며 샴페인 브랜드를 가꿔온 전통 있는 가문이 많다는 말이다. 부와 명성을 자랑하는 샴페인 가문들이 모인 동네라면 더더구나 그럴 테다.

폴 브랑켄이 포메리를 인수하려고 랭스에 드나들 때 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네가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라 하더라도 돈이 다가 아니지’라는 싸늘한 태도였다. “처음 랭스에 왔을 때는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죠.” 하지만 ‘브랑켄-포메리’라는 이름은 1836년에 시작된 포메리 가문과 샴페인에 대한 브랑켄의 열정이 결합된 꿈이었다. 포메리 가문의 소유지에 빌라 드무아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 나탈리였다.
빌라 드무아젤의 역사는 1906년 당시 포메리 소유자였던 루이 포메리가 자신의 거처로 랭스 대성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지금의 자리를 사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알렉상드르 샤르팡티에 Alexandre Charpentier 같은 아르누보의 대가들과 같이 일했던 건축가 루이 소렐 Louis Sorel과 실내 건축가이자 가구 장인이었던 토니 셀메르생 Tony Selmersheim, 일러스트레이터였던 펠릭스 오베르 Felix Aubert의 설계와 시공으로 지은 빌라 드무아젤은 박공지붕에 기하학적인 아르데코 양식의 외관, 스테인드글라스와 유연한 식물 문양이 일체화된 아르누보 양식의 인테리어까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초현대식 건물이자 아티스트의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포메리 가문이 기울어지면서 서서히 페허가 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랭스에서도 보기 드문 명당에 자리한 이 빌라를 허물자는 계획이 제출되기도 했는데, 심사를 맡은 프랑스 문화재청에서 거부해 계획이 백지화됐다. 빌라가 생명을 이어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1 브랑켄과 포메리의 역사를 기억한 서재에는 아르누보, 아르데코 건축 서적이 많다.


2 벽장처럼 생긴 문을 열면 나타나는 욕조는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19세기 초의 물건이다.
3 장인이 1920년대 아르누보 양식을 본떠 만든 라디에이터는 나탈리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가 만든 벽난로 장식이었지요. 너무 크고 두꺼워서 떼어낼 엄두를 못 냈던 게 분명해요.” 대표적인 아르누보 디자이너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으로, 지금은 빌라 드무아젤의 자랑이자 마스코트가 된 이 벽난로는 1900년 만국박람회에도 출품했던 작품이다. 어쨌든 이 빌라를 복원하겠다는 나탈리와 폴의 결정은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푯대가 없는 상태에서의 복원이었다.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시대의 건물이 많이 남지 않은 것은 이 두 시대가 1,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사이에 끼인 불운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기업이 문화재를 복원하는 사례는 프랑스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다. 화장품으로 유명한 로레알 그룹만 해도 베르사유 궁전 내 루이 16세의 화장실과 목욕탕을 복원하는 데 수천만 유로를 기부했다. 심지어 이 화장실과 목욕탕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아 전혀 광고 효과를 누리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에어프랑스를 비롯해 대부분의 프랑스 기업들은 문화재 복원과 후원에 적극적이다. 심지어 이들은 파리의 다리에 매달린 조각상을 청소하고 금박을 새로 씌우는 비용이나 생마들렌 성당의 외관 먼지 제거 같은 자질구레한 복원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다. 프랑스 기업들의 이러한 복원과 후원은 대부분 문화재에 대한, 전통과 문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프랑스 문화의 일부를 이루는 기업’이라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사업에 기여하며, 얼마나 기업을 빛나게 하는지는 루이비통이나 샤넬 같은 유명 럭셔리 브랜드들을 생각하면 금세 알 수 있다.


1 에밀 갈레의 등이 달린 빌라 내의 ‘샹브르드 뮤슈’.
2 나탈리 브랑켄이 모은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의 문양 데생과 그 시절의 사진, 마조렐 도자기 등으로 장식한 벽난로.



3 대대로 샴페인 가문의 집을 수리, 복원해온 랭스의 공방에서 손으로 제작한 현관문.
4 10m에 달하는 아르누보 양식의 등이 달린 중심 계단.


그중 빌라 드무아젤이 특별한 이유는 복원 과정에서 나탈리와 폴의 역할이 단지 기부만 하는 기업주의 입장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탈리는 포메리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던 오래된 서류 더미 속에서 빌라의 설계도와 당시 사진들을 찾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직접 공부해나갔다. 랭스의 다른 가문들의 대저택을 수리, 복원하는 일을 대부분 랭스에 자리 잡고 있는 장인 공방에서 맡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리 만드는 장인에서부터 나무 깎는 장인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인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19명이 넘는 문화재급 장인들이 꼬박 4년을 매달린 끝에 완성한 빌라 드무아젤에는 벽에 달린 등 하나까지도 기성품이 없다. 그야말로 문화재급의 복원이 제 빛을 발한 것이다. 벽에 달린 늘어진 꽃잎을 닮은 아르누보 조명등은 생루이 크리스털의 장인과 랭스의 세공 장인인 장 보를리 Jean Bourly의 합작이다. 장인이 일일이 그린 벽의 식물 문양을 만드는 데만 22캐럿짜리 금으로 만든 도금 종이가 2만 장이 넘게 소요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탈리의 자랑은 빌라에 얽힌 자신과 남편의 기억들이다. 1층에 놓여 있는, 아르누보의 유명 가구 장인이었던 마조렐이 만든 가구는 다름 아닌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인 뤼카 카르통의 수석 웨이터가 쓰던 카운터였다. 뤼카 카르통이 전통적인 내부 장식품들을 경매에 내다 팔고 내부 장식을 새로 한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한때 뤼카 카르통에 물건을 납품했던 폴 브랑켄은 한달음에 뤼카 카르통의 주인을 만나러 갔다.

 
5 나탈리와 남편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마조렐의 의자와 탁자는 경매장에서 어렵게 구한 귀한 물건으로 이 집의 마스코트 역할을 한다.

경매에 출품되었다면 몇만 유로를 주고도 낙찰받지 못했을 카운터를 빌라에 들이게 된 것은 폴 프랑켄과 뤼카 카르통의 인연 덕택이었다. 빌라 복원을 결정한 뒤부터 아르누보, 아르데코를 다루는 경매와 전문 갤러리들을 찾아 다니던 브랑켄 부부는 먼지 속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개의 보물을 찾아냈다. 그중 루이 마조렐 Louis Majorelle이 직접 만든 의자와 집 안 곧곧에 설치한 에밀 갈레 Emile Gallet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탈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조렐의 의자는 파리에서 열린 경매에서 구입했는데 낙찰받고 나서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단순히 기뻐서가 아니라 의자를 놓을 바닥에 깔 아르누보 시대의 카펫을 구해야 하는 게 더 걱정돼서 그랬죠.”


1 빌라 드무아젤의 외관은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시대 건축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보기 드문 형태다.

정작 문제는 10m에 달하는 아르누보 양식의 샹들리에를 다는 것 같은 큰 부분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집의 인상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루이 소렐의 작품인 침대를 구했을 때는 침대보와 커튼이 문제였다.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와 어울리는 침대보와 커튼은 결국 그 시대의 텍스타일 문양 자료집을 하나씩 뒤져가며 가장 비슷한 것으로 주문해야 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생산하는 업체가 없어 나폴레옹의 의자를 복원하기도 했던 업체인 레미 브라제 Remy Brazet에 의뢰했다. 아르누보 시대에는 없었던 중앙 난방식 장치인 라디에이터를 빌라에 설치하는 것도 큰 고민거리였다. 어울리는 모델을 찾아 헤맨 끝에 1920년에 만든 아르누보 양식의 꽃 문양 라디에이터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발견했고, 그 결과 빌라의 라디에이터는 1920년대 모델을 따라 장인이 만든 희귀한 라디에이터가 되었다.
지금 빌라 드무아젤은 포메리의 공식적인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공사를 마친 후 처음으로 초대한 사람은 랭스의 주요한 샴페인 가문 사람들이었다. 나탈리가 랭스를 제2의 고향으로 느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고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여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 뒤로 바쁜 일정 중에도 나탈리는 빌라 드무아젤에 하루에 한 번 이상 들르게 되었다. 꼼꼼하게 청소 상태를 살피고, 커튼을 매만지고, 방문객들에게 빌라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그의 모습은 1백 년 된 샴페인 가문의 여느 안주인 못지않았다.가문의 영광, 바로 그것이다.

2 포메리-브랑켄의 문양이 새겨진 샴페인 잔.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