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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가 나를 치유한다]나전칠기 장인 김영준 씨 아날로그는 어머니의 자개장이다
물리학 용어인 ‘아날로그’에서 우리는 책, 레코드판, 라디오, 자전거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아날로그라는 단어에는 디지털 시대와 대변되는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 만나는 아날로그는 감성의 언어로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황소처럼 느릿한 삶의 여유를 보여줍니다. 네 명의 아날로그 예찬론자를 만났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공간에 여백을 만들고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불어넣는 건축가, 아날로그는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개로 점을 찍듯 그림을 그리는 나전칠기 장인, 가구 하나를 만들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들이는 소목장. 아날로그란 시대의 역행이 아닌 선행이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1  옻칠 작업 중인 김영준 씨. 한 번 칠하고 한 번 말리고, 그 과정을 열두 번 이상 반복하는 공간이다. 그 때문에 옻칠이 잘 마르도록 방을 따뜻하게 한다.

나전칠기 장인 김영준 씨에게 아날로그란 어머니 방에 놓여 있던 자개장처럼 익숙한 것이다. 익숙함이란 달리 말하면 경험해본 것이며, 경험이란 내 기억의 또 다른 기록이다. 15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전칠기 장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영준 씨는 ‘옛날 사람들은 집 안에 놓인 자개장과 옻칠 가구를 보며 자랐기에 그것이 좋은 줄 알지, 요즘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모른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의 장롱에 배어 있던 옻칠의 그윽한 향기와 반짝이는 자개의 멋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자개의 화려함과 옻칠의 완숙미가 더해진 나전칠기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요즘 작업은 전통적인 방식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적용해나가는 것이다. 젊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가구 디자이너이자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인 하지훈 씨와 함께 개발한 자개 벤치이다. 빌 게이츠가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 선물한 게임기 ‘엑스박스’의 자개로 만든 상자도 김영준 씨의 작품이다.

2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소반.

그런데 요즘 작업하며 빈번히 부딪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시간이다. 모든 것이 빨리 이뤄지길 바라며 가구 하나 만들기까지 열흘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에게, 최소한 몇 개월에서 몇 년이 걸려야 완성되는 가구의 매력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옻칠이나 자개 같은 전통 가구는 시간이 이뤄내는 작업’이니 말이다. 그는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예닐곱 시간이고 열두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몰입한다. 눈이 침침해서 더 이상 작업을 계속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연장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몰입하며 완성한 작품을 시간의 가치를 아는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더군다나 옻칠은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바래는데 이를 ‘색이 핀다’고 할 만큼 세월이 주는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그가 만든 장롱, 화장대 등에 사용한 자개 장식은 마치 자개로 된 점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공들여 만든 가구를 어찌 기계로 단번에 찍어내고 화학 도료로 색을 입힌 가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아날로그란 손과 도구, 거기에 더해진 시간으로 만들어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3 자개 중에서도 가장 귀한 야광패로 장식한 나전칠기장 앞에 앉았다. 옻칠한 장롱 위에 조선 왕조의 이름을 순서대로 새겨 넣었다. 그가 지금까지 작업한 것 중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닌 장롱이라고 한다.


4, 5, 6 작은 조각도 하나로 자개를 끊어서 가구의 표면에 붙인다. 이렇게 장과 식탁, 화장대를 만들었다.

신이 내린 천 년의 도료 , 옻칠
김영준 씨는 옻칠을 ‘신이 내린 천 년의 도료’라고 했다. 방충, 방수, 방염 등의 기능이 있어 활용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한 곳에만 열두 번 이상 붓이 가야 하는데 붓질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일정한 온도에서 건조시켜야 한다. 이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가구는 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요즘 옻칠을 인테리어에도 적용해보고 있다. 벽에 옻칠을 하면 유해 물질을 차단하고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할 수도 있다고 한다.

김명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