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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가 나를 치유한다]인테리어 디자이너 최경희 씨 아날로그에는 손맛이 있다
물리학 용어인 ‘아날로그’에서 우리는 책, 레코드판, 라디오, 자전거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아날로그라는 단어에는 디지털 시대와 대변되는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 만나는 아날로그는 감성의 언어로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황소처럼 느릿한 삶의 여유를 보여줍니다. 네 명의 아날로그 예찬론자를 만났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공간에 여백을 만들고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불어넣는 건축가, 아날로그는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개로 점을 찍듯 그림을 그리는 나전칠기 장인, 가구 하나를 만들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들이는 소목장. 아날로그란 시대의 역행이 아닌 선행이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스케치 책상에 앉은 최경희 씨. 그의 집무실에는 두 개의 책상이 있다. 하나에는 컴퓨터와 다이어리가 놓여 있고, 다른 하나에는 옐로 페이퍼 뭉치와 펜, 모양자 등 온갖 스케치 도구가 놓여 있다.

최경희 씨에게는 ‘아날로그’라는 보물상자가 있다. 이는 그가 디자인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적인 작업을 묻자 보물상자 더미와 누런 종이 뭉치를 뒤적인다. 보통은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 폴더를 클릭하는데 말이다.
그의 회사 스팩만 어소시에이츠에서는 현대카드 본사와 현대카드 M카페, 숭실대학교와 인천국제공항 내 네이버 인터넷 라운지를 디자인했다. 집과 오피스를 주로 디자인하는 최경희 씨의 보물상자는 가로세로 각각 45cm인 정사각형이다. 그 안에는 마루, 타일, 벽지, 카펫, 패브릭 등 다양한 마감재 샘플이 들어 있다.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공간별로 마감재 상자를 만든 것이다. 미팅할 때 이것을 가져가 직접 만져보고, 커피도 쏟아보고 닦아보면서 소재를 테스트한다.


1 현대카드 본사 1층에 있는 현대카드 M카페. 주사위 모양의 테이블은 접힌 종이에 어쩌다 펜의 잉크가 번졌는데 거기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최경희 씨는 21세기에 손으로 도면과 투시도를 그리는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이렇게 작업하는 이유는 완성된 공간의 실제 느낌을 온몸으로 직접 상상해보기 위해서다. 종종 줄자를 바닥에 늘어놓기도 하고, 책상 의자를 발로 밀어보며 ‘남자라면 이 정도’ ‘여자라면 이 정도’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생각이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이렇듯 자신의 방 안에 무언가를 늘어놓고 상상하면서 답을 찾는다. 사실 컴퓨터 작업에 능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의 묘미를 즐긴다. 그러다 보면 모든 프로젝트가 새로운 것으로 느껴지는데 속도는 더디더라도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그에게 디지털은, 무언가를 단정 지어 0과 1 사이의 세상에 우리를 가둬두려는 속성이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일을 하다 보면 ‘디지털 없이는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최경희 씨도 디지털의 효율성과 필요성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살이라는 것이 효율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여전히 마음은 이메일보다 종이에 손글씨로 써내려간 편지를 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업무 환경에서 디지털을 강요받기에 개인적인 공간에서만큼은 아날로그적인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최경희 씨는 ‘공간에는 못난이도 하나 있고 할머니 소파 같은 것도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책을 뒤집어 꽂아놓으면 빛바랜 종이의 질감이 공간에 새로운 감성을 불어넣는다.

2 공간별로 상자를 만들어 마감 재료를 넣어둔다. 

 
1 현대카드 M카페의 내부. 헌책을 거꾸로 꽂아 데커레이션 했다.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던한 공간은 아무 매력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는 요즘 카페들이 빈티지 소품처럼 아날로그를 코드로 한 못난이 같은 요소를 하나씩 갖추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다. 못난이는 못생긴 것이 아니다. 공간에서 숨통을 트여주는 일종의 빈틈 같은 것이다. 최경희 씨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함께 있어야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상호 보완 역할을 하는 것이다. 햅틱폰이나 티볼리 오디오처럼 요즘 인기 있는 첨단 제품들은 오히려 아날로그의 감성을 흉내 내려 하지 않는가. 사람이 곧 아날로그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역시 아날로그적인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발 앞선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쥐고 있는 것이다.

2 컬러 마커, 연필, 컴퍼스 등은 즐겨 사용하는 도구다.


3 최경희 씨의 집무실에는 샘플로 만든 소파와 미국에서 일할 때 썼던 도면 뭉치가 있다.
4 스팩만 어소시에이츠 회의실의 한쪽 공간. 그가 좋아하는 색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5 한쪽에는 색연필만 따로 모아놓았다. 그 뒤 벽에는 아들 생일 파티를 위해 손수 그린 초대장, 아들의 그림, 그의 모교인 미국 스미스 칼리지 로고가 새겨진 마그넷 등이 붙어 있다.
6 책상 위에 쌓인 여러 장의 투시도.


사진이 공간에 숨통을 트여준다
그는 공간에 사진이란 요소를 활용해 경쾌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다. 현대카드 M카페에는 카드의 부분을 촬영한 사진을 걸어놓았고, 본사에는 독특한 분장을 한 임직원 얼굴 사진으로 벽의 한 면을 채웠다.

김명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