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아날로그가 나를 치유한다]건축가 유병안 씨 아날로그는 시간을 이기는 힘이다
물리학 용어인 ‘아날로그’에서 우리는 책, 레코드판, 라디오, 자전거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아날로그라는 단어에는 디지털 시대와 대변되는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 만나는 아날로그는 감성의 언어로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황소처럼 느릿한 삶의 여유를 보여줍니다. 네 명의 아날로그 예찬론자를 만났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공간에 여백을 만들고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불어넣는 건축가, 아날로그는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개로 점을 찍듯 그림을 그리는 나전칠기 장인, 가구 하나를 만들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들이는 소목장. 아날로그란 시대의 역행이 아닌 선행이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폴 빌린스키 Paul Villinski의 ‘My Back Page’. 2009년 4월 19일까지 뉴욕 아트&디자인 뮤지엄(Museum of Arts and Design)에서 열리는 전의 참여 작품.


창원 ‘더시티7’, 송암천문대 등을 디자인한 건축가 유병안 씨는 아날로그 예찬론자다. 아날로그란 단어는 물리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전적 의미는 ‘어떤 수치를 길이나 각도 또는 전류라는 연속된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의 아날로그란 사전적 정의를 뛰어넘어 감성의 언어가 되었다. 연필처럼 아날로그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향수와 그리움이 담긴 사물이 있지 않은가? 유병안 씨에게도 아날로그는 말보다는 정서로 먼저 다가왔다. 그런 그가 한마디 던진다. “성인병은 자동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잖아요? 사람은 자꾸 움직이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존재인데 편의라는 핑계로 그 사소한 움직임을 줄이다 보니 스트레스와 병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그가 바라본 아날로그의 매력 중 하나는 ‘움직임’이다. 전자동이 아닌 직접 움직이고 만져가며 기계는 사람에게, 사람은 기계에 맞추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런 사소한 움직임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이란 달리 보면 사람이 어떤 것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유병안 씨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 진공관 오디오가 있다. 그는 진공관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면서 감상의 묘미에 빠졌다. 일반 오디오로 자동 재생 및 반복되는 음악을 듣는 것과 달리 자신의 손으로 직접 조작하며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자연스레 음악 감상의 맛을 알게 되었는데 그 맛은 음색(같은 음이어도 피아노와 첼로를 통해 듣는 음의 느낌이 다르듯이 발음체나 진동 방법이 다른 데서 느껴지는 감각적인 특성)으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위) 남산 자락에 있는 건축집단 엠에이의 이태원 사무실에서 유병안 씨를 만났다. 이 공간은 그가 대학 1학년때 직접 지은 건물 지하에 있다. 마치 자신의 아지트처럼 옛날 오디오, 레코드판, 미국에서 공부하며 만들었던 건축 모형과 그가 개발한 공간 모듈러 모형 등의 애장품을 모아놓았다.

그가 말하는 음색과 같은 요소는 공간에도 존재한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무 식탁과 의자는 사물이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따뜻함을 안겨주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공간에 감정을 대입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만약 공간에서의 아날로그를 이야기한다면 ‘정직한 건축, 기교 부리지 않은 담백한 건축’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20세기 초반 건축의 기능과 기본에 충실하며 반듯하게 지었던 모더니즘 건축이야말로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건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이기는 건축은 그의 모토이기도 하다.
사실 유병안 씨가 아날로그 예찬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활이 곧 아날로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남산 아래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그의 조부모부터 그의 아이들까지 4대가 함께 사는 집이다. 그가 어렸을 적 남산에 있는 집의 수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드물었다. 집 앞에는 그가 1997년부터 사용해온 작업실이 있다. 건축집단 엠에이의 별채가 된 이곳은 유병안 씨가 대학교 1학년 때 건축업자와 함께 현장을 실측해가며 직접 지은 건물이다.

(위) 마포 사무실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보물을 찾았다. 연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감성이 있는데, 그도 역시 연필을 좋아했다. 하나 둘 모은 연필을 아크릴 박스에 담아놓았다. 추억의 ‘곰돌이 푸’ 연필도 있다.

그 안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간직해온 태극기가 걸려 있고, 추억의 장난감에, 대학 시절 공부했던 책과 모형, 미국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싼값에 구입한 탁자와 의자도 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진공관 오디오에 레코드판도 모아놓았다. 그는 이곳에 건축집단 엠에이의 모체였던 ‘유.양.정.하’라는 연구소를 만들어 건축계의 새내기로 입문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2006년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건축집단 엠에이를 세웠다. 지금 사용하는 사무실은 마포의 맥주 창고였던 건물을 장기 임대해 사무실로 개조한 것이다. 삼각형 박공지붕 아래 한쪽 벽은 책으로 채워져 있고 그 앞으로는 낡은 사다리가 있다. 창턱이 있는 창문으로 아늑함을 더했고, 벽돌 규격에 꼭 맞춰 빈틈없이 끼워 넣은 화이트 보드가 걸린 회의실이 있다. 진공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이 가득한 유병안 씨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그가 아끼는 연필과 색연필 상자가 놓여 있고 향이 피워져 있다. 그는 이곳에 앉아, 책상 옆에 빼곡히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가족 한 명 한 명에게 붓펜으로 연하장을 썼을 것이다.

그는 무엇 하나를 사더라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을 사듯 물려줄 만한 가치를 지닌 건축을 꿈꾼다. 그것은 유행을 따르는 건축과는 다른 맥락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오늘날까지도 건축의 바이블로 남아 있듯이 시대에 휩쓸리지 않는 뚝심 있는 건축을 그리는 것이다.


1 이태원 사무실의 화장실. 변기 덮개도 나무로 된 것이 좋아 미국에서 사 왔다. 거울에 비친 벽시계는 1970년쯤에 선물받은 것. ‘축 발전’이란 글씨를 지우고 다시 색을 입히고보니 꽤나 매력적으로 바뀌었다.
2 마포 사무실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액자 속에 담긴 손바닥 이미지이다. 자신의 손바닥을 복사해 마치 사진처럼 액자를 해놓았다.



3 사무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카페 ‘마당’의 전경.


4 마포 사무실은 복층으로 되어 있다. 위층에 그의 집무실이 있고, 집무실 한쪽에 창이 있으며, 그 옆 벽에는 근래에 했던 프로젝트,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등이 줄 맞춰 쓰여 있다. 그의 집무실 안에는 모든 사물이 각 맞춰 정리되어 있다. 집무실 창의 블라인드는 걷어 올리면 직원들 모습이 내려다 보이지만 직원들을 배려해서 블라인드는 항상 그대로다.
5 이태원 사무실에는 석유 난로도 있고, 미국서 가져온 옛날 의자와 탁자, 추억의 차이니스 체스도 있다.


유병안의 아날로그, ‘마당’에서 만난다
마포구 구수동에 있는 건축집단 엠에이 MA의 사무실에는 별채 ‘마당 Ma.堂’이 있다. 원래 맥주 창고였던 건물을 사무실로 고쳐 사용하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양옥집을 개조해 작은 숍 겸 카페를 만든 것이다. 건축집단 엠에이의 영문 ‘MA’에서 이름을 지어냈다. 커피를 마시고 진공관 오디오, 연필, 노트, 그림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나무 의자와 그 위에 놓인 담요 한 장만으로도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긴다. 이곳 뒷마당에는 군고구마 통도 있다. 문의 02-333-8271

김명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