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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서울의 살롱 창덕궁 옆 은덕문화원
창덕궁과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은덕문화원. 원래 궁궐 내 군기창 자리였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창덕궁의 정취를 앞마당처럼 담고 있는 집이다.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곳이지만 종교 색을 뛰어넘어 열린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은덕문화원은 다양한 문화계 인사들에게 서울의 살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왼쪽) 마당은 마사토로 채워져 있다. 마사토 위로 남겨진 정갈한 비질 자국이 인상적이다.
(오른쪽) 은덕원에 찾아오는 손님들과 차를 마시며 대접하는 다실인 세심당 내부. 먹장석 다기장이 멋스럽게 다실을 장식하고 있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나 일본의 동경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궁궐이 가장 좋다’는 점이다. 격조가 있고, 역사가 있고, 풍경이 있는 건물이 바로 왕이 살던 궁궐이다. 북경의 자금성 紫禁城, 동경의 황궁 皇宮이 그렇다. 궁궐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가장 운치 있고 경관 좋은 집은 이 궁궐 옆에 있는 집이라는 사실이다. 궁궐 옆에 집이 있으면 아침저녁으로 궁궐의 경치를 내려다보면서 그 그윽한 풍광과 역사를 공짜로 감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울의 궁궐은 경복궁 景福宮과 창덕궁 昌德宮의 이원 체제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로 2백70년간이나 비어 있었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조선시대 내내 존재해 있었던 궁궐이다. 그러므로 창덕궁이야말로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것이다. 이 창덕궁과 자그마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의 붙어 있다 싶은 집이 하나 있다. 바로 은덕문화원 恩德文化院(이하 은덕원)이다. 원래 이 터는 창덕궁 내에 있던 군기창 軍器倉 자리였다고 전해진다.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그러니까 궁궐 내부에 속해 있던 구역이었다. 1910년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 창덕궁 구역이 축소되었고, 이 공간이 담장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 주택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은 서울 원서동에 속한다. 대지 6백 평에 자리 잡고 있는 은덕원은 정갈하면서도 격조 있는 한옥이라 표현해야 맞는 집이다. 한옥이라 특히 분위기가 난다. 궁궐 옆에 있다 해도 콘크리트 집이면 별로 재미가 없는데, 기와를 올리고, 나무로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은 전통 한옥이므로 창덕궁의 분위기와 어울린다. 서울 북촌에 여러 한옥이 있지만, 창덕궁을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한옥은 은덕원이다. 그만큼 위치가 기가 막힌 곳이다. 그런 데다가 한옥의 규모도 크다. 한옥은 대지가 최소한 2백 평은 넘어야 한다. 그래야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은덕원은 대지가 6백 평이고, 여기에 있는 건물 면적도 줄잡아 50칸은 된다. 가회동의 30~40평 되는 올망졸망한 한옥들과는 다른 무게가 느껴진다.


은덕원에서 또 하나 볼 만한 건물은 인화당이다. 왜정시대에 지은 일식 집으로 인촌 김성수 씨의 동생인 김연수 씨가 지은 집으로 전해진다. 왜정시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회합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는 이곳 인화당은 이제 각계각층 문화계 인사들에게 열린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서울의 살롱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옥의 내부도 세련되었다. 서까래가 보이고, 창호지를 바른 문이고, 기둥으로 사용한 목재도 모두 전통 격식에 맞다. 전통적인 분위기이면서도 생활하기에는 불편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선 실내에 전기선이 보이지 않는다. 방의 바닥과 벽 사이로 내장되어 있어서 노출되지 않는다. 에어컨도 천장에 숨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창문과 방문도 삼중으로 되어 있다. 모기장, 여닫이, 미닫이, 분합이 같이 조립되어 있다. 여름철의 모기와 겨울철의 시린 바람도 막아준다. 한옥의 단점이 겨울철의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찬 바람인데, 이 찬 바람을 완전히 차단하는 시설이다. 방 안에 있는 옷걸이도 눈에 띈다. 높이가 1미터 20센티 정도라서 높지 않다. 소목장에게 특별히 주문한 옷걸이 같다. 실내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 높이이다. 이 점을 감안한 높이다. 다기 茶器를 넣어두는 다기장 茶器欌도 마음에 든다. 나는 좋은 집에 가면 다기장이 있는지 여부를 눈여겨보는데, 다기장이 있어야 주인의 품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거칠어지기 쉽다. 5단으로 된 다기장은 그 장식이 검은색인 ‘먹장석’이다. 흰색의 백동 장식보다 검은색 쇠로 만든 먹장석이 훨씬 중후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다기장은 처음 본다. 방 안에 자질구레한 골동이나 물건은 없다. 단순할수록 도 道가 높은 것이다. 방 안에 물건이 많으면 기 氣가 흩어지고 정신이 산만해지기 쉽다. 되도록이면 간단한 살림살이가 공부를 한 사람의 방 안 풍경이다. 방 안에다가 물건 많이 놓는 것이 아니다.손님들이 찾아오면 차를 마시는 장소가 세심당 洗心堂이다. 은덕원의 다실 茶室인 셈이다. 다구 茶具가 완비되어 있다. 이 방은 칸막이를 열어젖히면 하나의 방이 되고, 각기 칸막이를 닫으면 세 개의 방이 된다. 방문객이 숙박을 해야 할 경우에는 칸막이를 닫는다. 개폐 開閉가 자유롭다는 것이 한옥의 특징이다. 평소에는 칸막이를 열어놓는다. 방 세 개가 하나로 연결되니까 툭 터진 느낌이 온다. 툭 터졌다는 느낌은 아파트에서 경험할 수 없다. 이쪽 방과 저 끝 방이 서로 보이는 느낌을 아파트에서 어떻게 느끼겠는가! 공간이 트이면 이 공간에 머무르는 인간의 사고와 의식도 열리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한옥은 열린 공간이다. 열렸다는 것은 자유의 확장을 의미한다. 아울러 공간이 열리면 상상력이 증가하는 법이다.
다실인 세심당의 창문은 네 군데나 된다. 동서남북이다. 이 네 군데 창문을 여니까, 공간이 더 확대되는 느낌을 받는다. 먼저 남쪽 창문을 열면 창덕궁의 기와지붕과 나무, 그리고 담장의 채색된 그림들이 들어온다. 시야가 창덕궁까지 확보되는 셈이다. 북쪽 창문으로는 정원의 오래된 소나무와 정원석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인화당 仁和堂의 모습이 들어온다. 동쪽과 서쪽의 창문을 열면 역시 마당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집의 마당은 특징이 있다. 바로 ‘마사토 磨砂土’다. 마사토는 화강암이 흙으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의 흙이다. 비석비토 非石非土라고도 부른다. 약간 흰빛을 띠면서, 흙도 아니고 돌도 아닌 상태이다. 모래보다는 굵은 알갱이다. 이 흙은 지관 地官들이 특히 좋아하는 흙이다. 왜냐하면 묘를 쓰기 위해서 땅을 파낼 때는 이 마사토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1~2미터 정도 땅을 파면 마사토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흙을 파지 않고 이 마사토 위에다가 죽은 자의 백골 白骨을 올려놓는다. 마사토 위에 백골을 얹어놓아야만 망자의 백 魄이 지기 地氣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평창동처럼 화강암 위에 바로 집을 지으면 너무 지기가 강하다. 반대로 황토 위에 집을 지으면 지기가 약하다. 그 중간이 마사토다. 스테이크에 비유하면 중간으로 익힌 ‘미디움’에 비유할 수 있다. 지기가 약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다. 산 사람 집도 이 마사토 위에 있으면 좋다.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해진다. 서울의 북촌 일대와 인사동의 지하는 대부분 이 마사토가 깔려 있다. 그래서 명당이다. 이 집도 역시 공사를 할 때 땅을 파보니까, 전체에 마사토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자연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선시대에 궁궐 기초 공사를 하면서 배수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밑에다 마사토를 깔아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 됐던 이 집에서는 공사하다가 출토된 마사토를 마당에다 깔아놓으니까, 방문객이 정갈하면서도 개운한 인상을 받는다. 마사토는 흰색이 섞여 있으므로 낮에 햇빛을 반사시키는 작용을 한다. 한옥 지붕은 처마가 길다. 그래서 햇빛을 차단시켜 내부 공간이 약간 어두울 수 있다. 마당의 마사토에서 반사되는 빛이 실내에까지 반사되면 은은한 자연 채광이 된다. 더군다나 은덕원의 마사토 마당은 매일 관리를 한다. 마당에 빗살무늬가 나 있다. 일본 사찰에 아침 일찍 가보면 대나무 빗자루로 쓸어놓는다. 마당에 들어가 그 빗자루 무늬를 보면 마음이 정돈된다. 이는 동양 건축의 미학이다.


(왼쪽) 은덕원은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문화원으로 원불교 교무인 이선종 씨가 원장이다. 이곳이 문화계 인사들의 살롱 역할을 하는 데는 그의 여장부다운 면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른쪽) 인화당 곳곳에서 세월의 손길이 묻어 있는 가구와 소품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대부분 주변의 지인들이 본인 소용에 닿지 않는다고 준 것이다. 소박하고 정갈한 물건들이 어우러져 옛건물인 인화당의 정취를 더한다. 


이 집에서 또 하나 볼 만한 건물은 바로 인화당 仁和堂이다. 왜정시대에 지은 일식 집이다. 서울에서 희귀하게 남아 있는 일식 건축이 바로 인화당이다. 일식 건축의 특징은 내부가 나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천장도 나무 판이고, 바닥도 마룻바닥이다. 중간 중간에는 유리가 달린 나무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다. 이 인화당은 왜정시대에 인촌 김성수 선생의 동생인 김연수 씨가 지은 집으로 전해져온다. 인촌 집안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특히 호남의 부자들은 서울의 명륜동과 이 원서동 일대에 넓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서울에 있는 집이라고 해서 경택 京宅이라 불렀다. 어지간한 호남 부자들은 서울에 경택이 있었다. 보통 대지 1천여 평에 40~50칸 규모의 한옥이었다. 김연수 씨도 바로 이 자리에 경택을 지었던 것이다. 형님 집인 김성수 선생의 집은 여기에서 걸어가면 15분 거리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1920~30년대에 지어지지 않았나 싶다. 살림도 했지만, 주로 손님들을 만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일식 집의 장점은 여름에 시원하다는 점이다. 마룻바닥이고, 유리가 달린 방문들을 열면 역시 회통적 공간이 조성된다.
‘도미덕풍 道味德風’이라고 쓰여 있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도의 맛은 덕풍으로 나타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집에 들어가 보니까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정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공 사무실도 아닌 분위기이다. 집주인의 중도적 中道的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왜정시대에는 이 건물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비밀 회합을 했다고 한다. 장부상에 기록할 수는 없었겠지만 집주인 김연수 씨는 독립 자금을 비밀리에 제공하였다. 이 인화당은 아래쪽에 한옥과 접합되어 있다. 한옥에다가 붙여서 일식 건물을 지은 묘한 형태이다. 이름 하여 ‘조일혼합 朝日混合’ 양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식 건물과 한옥이 한몸으로 붙어 있는 경우는 이 집 말고는 없다. 원래 한옥의 한쪽을 헐어내고 일식 건물을 새로 추가한 것이 분명하다. 한옥은 아래층이고, 일식은 2층에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인화당에서 아래층 한옥으로 연결되는 목조 계단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집 구조가 복잡하다. 처음 오는 사람은 집 구조가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들이 비밀 회합을 하다가 유사시에 일본 경찰의 검문검색이 있으면 복도 옆의 방문을 통해서 아래채로 피신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살기에는 복잡하고, 탈출하기에는 용이한 구조인 것이다. 겉으로는 일식 건물이니까 일본 사람들의 의심도 덜 받았을 것이다.
현재도 이 인화당에서 많은 모임이 이루어진다. 집주인인 원불교 이선종 교무가 여장부이기 때문이다. 원불교 법호로는 그를 종타원 宗陀圓이라 부른다. 종타원은 문화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분이 있어서 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여성 운동가들이 이 인화당을 방문한다.


(왼쪽) 인화당은 2층을 얹듯 한옥 지붕 위에 연결해 지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오른쪽) 은덕원은 대목을 네 명이나 바꿔가며 공들여 지은 한옥이다.


여성6자회담에 참여한 6개국(러시아, 뉴욕, 일본, 북한, 중국, 한국) 여성 지도자들도 이 방에서 모였다. 생명평화탁발순례의 도법 스님, 생명평화운동의 김지하 선생, 상생과 화해의 수경 스님, 평화재단의 강대인 선생이 이 방에 많이 왔다. 생명포럼의 정세현 선생도 매달 한 번씩 인화당에서 모임을 갖는다. 말하자면 인화당은 서울의 열린 공간이자 살롱이다. 문화계 인사들이 살롱으로 이용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 은덕원이다. 집주인 종타원이 여성이므로 남성과는 다른 편한 점이 있다. 유사시에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모여 회의도 할 수 있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건물과 실내장식, 주변 환경도 한국적인 전통이 물씬 배어 있다. 거기에다가 종타원 선생이 유불선과 함께 기독교까지 아우르는 회통사상의 소유자다. 종교 색에 관계없이 이 집에서 차 마시고 놀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처럼 비상한 위치에다가 이처럼 멋진 한옥을 짓게 되었습니까?” “전생 인연입니다. 25년 전에 태국에 갔다가 숙명통 宿命通을 한 도사를 우연히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이야기에 의하면 제가 전생에 두 번이나 궁궐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궁궐에 한 번 더 들어가서 살 거라고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황당한 이야기로 들렸지만, 제가 결국 창덕궁의 군기창 터에 집을 짓고, 여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궁궐에 들어와 살고 있는 셈 아닙니까?” “우리 속담에 ‘50살이 넘으면 새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환갑이 넘으신 나이에 이처럼 큰 집을 지으면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많았습니다. 공사 도중에 대목을 네 명이나 바꿨습니다. 집을 대충 지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옥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조상이 정신이 배어 있는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집을 지으면서 한국의 여섯 가지 정신, 즉 얼?흥?정?멋?맛?격이 있는 집을 지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신은 없습니다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집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낀다면 저로서는 만족입니다.” “집의 대들보에서부터 문틀과 가구, 찻잔에 이르기까지 세련된 느낌이 듭니다. 이런 미감은 언제부터 익혔습니까?” “저는 태어난 집도 한옥이고, 원불교 교무로 발령이 났던 교당도 한옥이었고, 서울에 와서 생활한 종로 교당도 한옥이었습니다. 평생 한옥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옥에 대한 나름대로의 체감미학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70년대 후반 <뿌리깊은 나무>를 발간했던 한창기 선생과 교류가 많았습니다. 한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안목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전통문화에 대한 공부는 결과적으로 전생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은덕원은 ‘서울의 살롱’이다.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제일의 전망에 드나드는 손님들도 교양이 있고, 건물은 격조 있는 한옥이다. 거기에다가 집주인이 유불선과 기독교를 포용하는 열린 정신을 지닌 마담(?)이 아닌가! 최상의 조건을 갖춘 살롱인 것이다.


(왼쪽) 인화당 외부 전경.
(오른쪽) 인화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돌은 모두 집터에서 나온 것.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 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 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저서로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방외지사>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등이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