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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가 나를 치유한다]디자이너 김치호 씨 화이트는 자유로운 생각의 샘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색과 반응합니다. 다양한 색채는 힘찬 에너지로, 혹은 편안한 휴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녹색 손수건 한 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잠재의식에서 녹색은 산소가 풍부한 식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표현주의 화가 뭉크는 ‘인생의 춤’에서 청순한 소녀에게는 하얀 옷을, 성숙한 여인에게는 붉은 옷을, 노쇠한 여인에게는 검은 옷을 입혔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색이 지닌 문화적·심리적 상징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팬톤컬러연구소는 ‘2009년의 색’으로 미모사(mimosa: 꽃의 노란색)를 선정했습니다. 불황에 허덕이는 지구촌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마음으로 태양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노란색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지난해의 상징 색이 블루 아이리스였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지요. 사람마다 선호하는 색이 다르듯이 사람들의 기호도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닌 에너지가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다양한 색을 활용해 활력과 휴식을 얻는 이들을 만나봅니다.

사방을 온통 흰색으로 마감한 디자이너 김치호 씨의 사무실 전경. 빙판처럼 반짝이는 바닥 위로 빛과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른 풍광을 그려낸다.

육중한 하이글로시 도어를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부서지는 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아무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른 아침,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이 햇살에 반짝이듯 윤기가 흐르는 흰색 바닥이 티끌이나 이음매 하나 없이 매끄럽다. 역광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그려내는 새하얀 풍경에, 에스키모가 알고 있는 흰색의 종류가 40가지가 넘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방 안에서도 수많은 흰색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순백의 무결한 공간은 디자이너 김치호 씨의 작업실이다. 얼마 전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던 사무실에서 자리를 옮겨 2층에 독립된 작업실을 마련한 그는 이곳을 ‘도화지 같은 공간’이라 말한다. 디자이너의 작업실은 창조의 공간이자 비움의 공간. 작업실에서 디자이너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한번 생각해내고 만들어낸 것에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이전의 생각과 이미지의 부스러기를 모두 걷어내고 머리와 가슴을 비워내야 한다. “이 사무실은 스케치북이에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종이요.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을 의도했지요.”


책상이 있는 공간과 회의 테이블이 있는 공간을 분리하는 파티션은 조벽(건물을 지을 때 벽체 속을 채우는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값싼 건축 자재에서 패턴과 조형미를 읽어내고 이를 활용한 디자이너의 안목이 돋보인다.

흰색은 그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사물을 좀 더 정확하게 바라보게 한다며 디자이너에게 매우 중요한 색이라 말한다. 미니멀 건축가들이 건축물의 안팎을 모두 흰색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모든 관심을 건축물이 지닌 선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흰색처럼 고고하고 권위적인 색도 없다. 세상에 완전무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색은 흰색밖에 없다. 반면 흰색처럼 겸손한 색도 없다. 흰색은 세상의 다른 색이나 사물을 돋보이게 한다. 그가 사무실을 ‘하얀 방’으로 만든 또 하나의 이유다.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니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산의 모습이라 시선이 가지 않지만, 봄이 되고 초록이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이 작업실을 하얀 방이 아닌 초록 방으로 인식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렬로 늘어선 세 개의 커다란 창 밖으로 펼쳐지는 작은 숲은 사시사철 다른 색과 그림을 보여주는 자연의 팔레트이자 캔버스다. “우리가 물감이나 페인트 등으로 표현하는 수만 가지 색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색을 모방한 것이지요. 자연이 만들어내는 것만큼 아름다운 색의 조화가 또 있을까요? 자연이 만들어내 보여주는 사계절의 정취와 색감을 고스란히 들여놓을 수 있으니 디자이너에게 이보다 좋은 공간도 없을 겁니다.”
도도하고 엄격한 속성을 지닌 만큼 흰색 공간은 삭막하고 차가운 공간이 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사무실에서는 흰색의 서늘한 긴장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벽과 천장을 마감한 오프 화이트 페인트,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의 거칠고 투박한 느낌, 에폭시 바닥의 매끄러운 질감, 그리고 원목 가구와 빈티지 소품의 따뜻한 정서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1 알레시 탁상시계는 조엘 콜로보가, 조명등은 비코 마지스트레티가 디자인했다.


2 치호앤파트너스(김치호 씨가 운영하는 디자인 회사) 사무실이 있는 1층의 응접 공간이다. 화이트 공간에 메탈릭 실버를 포인트 컬러로 삼았다. 천장의 둥근 조명등은 무라노글라스 제품이다.
3 치호앤파트너스 사무실 입구 전경.


“바닥은 서서히 윤기를 잃어갈 것이고 흰색은 때가 타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숲 속에 산짐승의 길이 나듯, 제가 습관적으로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동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제 손길이 자주 닿는 벽이나 책장 한 귀퉁이는 금세 때가 탈지도 모르지요. 색이 닳고 빛이 바래는 변화를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물방울도 굴러갈 듯 매끄러운 바닥이지만 머지않아 서서히 광택이 무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며 그는 말한다. “제가 생각하는 흰색의 또 다른 매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선명하게 담아낸다는 것입니다.”
흰색에서 완전무결한 순백을 추구한다면 ‘관리’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이 바래고 손때가 타는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멋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다면 그의 작업실처럼 눈꽃같이 새하얀 공간에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4 빈티지 소품과 흰색 소품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5 조벽을 쌓아 만든 파티션 뒤로 책상이 숨겨져 있다. 정면에 보이는 김치호 씨 사진 옆 그림은 일본 작가 작품이다. 


tip
색채 조화법
단색 조화
하나의 유채색과 검은색·회색·흰색 등 무채색의 조합을 말한다. 예를 들면 베이지색이나 겨자색 등 중간색과 흰색의 조화로 흰색은 중간색을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빨간색이나 녹색 같은 순색을 흰색 공간에 포인트로 사용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동색 조화 베이지색 벽면에 갈색이나 나무 문양의 문을 다는 등 동색 계열로 변화를 주는 것. 그러나 이는 평면적인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흰색 선이나 면을 배치하면 생동감이 더해져 동색 조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유사색 조화 유채색과 그 유채색을 포함한 색의 조화를 말한다. 예를 들어 하늘색과 옅은 보라색, 핑크색과 라벤더색의 조화가 유사색의 조화다(옅은 보라색에는 하늘색이, 라벤더색에는 핑크색이 들어 있다). 라벤더 커튼에 핑크색 전등갓, 하늘색 커튼에 라벤더색 침대 커버 등 파스텔 컬러 인테리어에 많이 사용한다.
보색 조화 빨간색과 녹색, 노란색과 보라색 등 서로 보색 관계인 조화. 보색 조화가 부담스럽다면 한쪽을 파스텔 톤으로 하면 좋다. 핑크색과 파스텔 그린 등 두 가지 색 모두를 파스텔 톤으로 하는 것도 무난하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