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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충남 논산 명재고택 풍류와 실용이 가득한 집

집위 명재 윤증 고택의 굴뚝은 1미터 정도 높이로 나지막하다. 그 이유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부잣집 굴뚝 연기는 위화감 조성의 원인이었다. 또한 명절 무렵에는 추수한 나락을 곧바로 창고로 옮기지 않고 일부러 대문 바깥에 일주일 정도 야적해놓았다. 주변의 배고픈 사람들이 조금씩 퍼 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한옥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비슷하다. 아마추어가 볼 때는 이 집이 그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다. 그러나 프로가 뜯어보면 모두 다르다. 다른 점을 발견하는 데 바로 한옥 감상의 묘미가 있다. 무엇이 다른가? 우선 집터가 모두 다르다.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앞산의 모양과 위치가 다 다르므로 집에서 보는 전망이 백이면 백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나라 아닌가. 산자락 끝이나 언덕의 경사면에 집을 짓게 되므로 자연히 주변 경관이 모두 다르다. 그 다음에는 집주인의 취향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집은 안채에다 비중을 두었고, 어떤 집은 사랑채에 중점을 두었는가 하면, 어떤 집은 학자가 배출된다는 문필봉文筆峰이 보이도록 방향을 잡았다. 목수도 중요하다. 사찰의 대웅전같이 큰 집 짓는 데 능한 목수는 가정집도 크게 짓는 경향이 있고, 다락을 잘 만드는 목수는 다락에다 특기를 집중한다. 목수 취향에 따라 처마 선과 서까래, 들보를 아담하게 만든 집이 있고, 단순하면서 웅장한 집을 잘 짓는 목수도 있다.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1) 고택은 한옥이 지닌 이러한 총체적인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고택이다. 내가 그동안 다녀본 한국의 고택 가운데 가장 숨은 그림이 많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처음에는 숨은 그림이 있는 줄 몰랐다. 다니고 또 다니고, 집주인 말 들어보고, 여러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는 과정에서 깨달은 무림비급武林秘, 즉 한옥비급武林秘을 체득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20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1 1709년에 지어진 명재고택은 제자들 수십 명이 십시일반해서 지었기에 그들의 아이디어가 모두 반영된 독특한 구조이다.명재 선생이 돌아가시기 5년 전에 완공했지만 선생은 과분하다며 끝내 그가 살던 초가집을 떠나지 않았다.


2 집주인이 신경 써서 만들어 놓은 석가산. 동양의 전통 조경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석가산이다.

먼저 명재고택의 숨은 그림은 석가산石假山에 있다. 석가산은 인공으로 조성해놓은 조그만 돌산을 가리킨다. 서양의 정원에는 없는, 하지만 동양의 조경 전통에서는 아주 중시했던 포인트가 바로 이 석가산이다. 동양의 식자층들은 입산수도入山修道를 하고 싶어했다. 몸은 세간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산을 그리워했다. 그렇지만 먹고사느라고 산에 갈 수 없으니까, 집 안에 산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정원에 있는 석가산을 보면서 등산 욕구를 대리 충족했다고나 할까. 명재고택 바깥 사랑채 마루 밑에는 검은색을 띤 높이 30cm 크기의 돌들이 땅에 박혀 있다. 어떻게 보면 수석 무더기를 박아놓은 것 같다. 바로 금강산을 상징하는 석가산이다. 금강산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사랑채에 앉아서 마루 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금강산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재고택 사랑채는 금강산 구름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집주인은 가정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 위에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 금강산 아래쪽 마당에도 돌무더기가 쭉 이어져 있다. 언뜻 보기에는 화단을 둘러싼 돌로 보인다. 이 돌들은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상징한다. 중국에 있는 산 이름으로 한자 문화권의 시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한 산이 바로 무산십이봉이다. 중국 양쯔 강을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협곡이 나온다.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은 여기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황토색의 강물은 소용돌이를 치고 급격하게 내려가는데, 사람을 태운 배는 마치 일엽편주처럼 빙글빙글 돈다. 양옆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버티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현실 세계를 잊도록 하는 장엄한 광경이 몇 시간 동안 연출된다. 세 개의 협곡을 통과한다고 해서 삼협三俠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에 있는 협곡이 무협巫俠이다. 무협 옆으로 포진한 봉우리들이 무산巫山이고, 이 무산에는 다시 십이봉이 있고, 이 십이봉에는 선녀가 산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한·중·일 삼국의 남자들은 이 무산십이봉에 사는 선녀와 한번 데이트해보고 싶은 염원을 지녔던 것이다. 명재고택의 사랑채 아래에는 조선 제일의 명산인 금강산이 있고, 다시 그 밑으로는 중국 제일의 경치 가운데 하나인 무산십이봉이 있다. 고개를 들어 50리 밖을 바라다보면 날카로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계룡산의 암봉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다! 아래로 보면 금강산, 무산이요, 멀리 보면 계룡산이 첩첩산중으로 포진하고 있는 전망이다. 이만한 전망이면 가히 ‘럭셔리’가 아닌가!


사랑채는 남자들의 공간이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요즘 말로 뷰view가 좋다. 누마루에서 들창을 열고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황금비율로 보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집 자체는 소박한데 주변 풍광은 럭셔리하다.

사랑채의 구조도 묘미가 있다. 우선 방문턱의 높이이다. 30cm 정도 높이인데, 이 높이면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팔을 걸기에 적당한 인체공학적 높이이다. 방에 앉아 방문턱에 팔을 걸고 멀리 계룡산을 보기에 적당하다. 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워 있어도 밖에 있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시야를 가려주는 높이이다. 무장해제하고 누워 있을 때에는 밖의 사람에게 안 보이는 것이 편하다. 프라이버시를 감안해서 방문턱의 높이를 적당히 높여 놓았던 것. 사랑채 끝에는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한옥에는 누마루가 있어야만 품격이 있고, 여름에 시원하다. 그런데 명재고택의 사랑채 누마루는 다른 집과 달리 높게 설치되어 있다. 60cm 정도이다. 그 이유는 유사시에 학술 세미나를 열 수 있는 강단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명재明齋는 소론의 지도자였다. 임금이 벼슬을 준다고 40번을 넘게 불렀어도 끝까지 벼슬을 거절한 인물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명재의 코를 보면 콧대가 우뚝 서고 코가 길게 내려온 용코(龍鼻)이다. 코가 이런 모습이면 결단력과 신념이 대단히 강하다. 따라서 이 집은 당시 가장 강력했던 야당 지도자 주손胄孫의 집이었다. 찾아오는 손님도 끊이지 않았다. 1년에 먹는 쌀이 3백 가마는 될 정도였다. 때로는 명재의 제자들이 학술 토론회를 개최하던 아카데미이기도 했다. 당연히 강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좌장이 누마루의 중간에 앉아 있으면 사랑채의 방 2개 칸막이를 철거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좌장이 정면으로 바라다보는 벽면에는 창문을 설치하지 않고 흰 벽으로 막아놓았다. 강의를 할 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일부러 대칭적인 구조로 만든 것이다. 대칭적인 구조는 사람을 안정시킨다.


사랑채에는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도원桃源’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의미한다. 이 집은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이라는 뜻이다. 사랑채에 앉아 내려다보면 금강산이 있고, 멀리 보면 계룡산이 포진하고 있는 전망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사랑채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동시에 기거했던 공간이라는 말이다. 누마루가 붙어 있는 가장 큰 사랑방은 당연히 집안의 어른인 할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이었다. 큰 사랑방 옆에는 크기가 작은 사랑방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는 여기에서 거처했다. 명재고택에는 조부의 방과 아버지의 방 중간에 1.5평 크기의 아주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다. 일종의 완충지대이다. 조부가 아버지 방으로 가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조부의 방으로 들어갈 때 곧바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일단 1.5평 방을 한 번 거쳐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부자지간일지라도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서로 존중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조그만 방은 평상시에는 집안의 가동家童(어린 종)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던 대기실 용도로도 쓰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방과 바로 붙어 있는 방에 손자가 기거했다. 이 손자 방은 방문 중간쯤에 조그만 창문이 있다. 방향은 동쪽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이 손자의 방에 바로 들어가도록 그 위치를 고려했다. 10대 초반의 어린애들은 아침 햇볕을 직접 받도록 해야만 일찍 일어나고, 건강에도 좋고, 영성靈性을 개발하는 데에도 좋다. 산에서 도를 닦는 도사들도 창문을 반드시 동쪽으로 낸다. 아침 해의 정기를 받기 위해서이다. 살림살이에는 남향이 좋지만, 영성 개발에는 동향이 필요하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이 큰 사랑방과 가동의 대기실 방을 구분해주는 문門이다. 이동식 문으로 평상시에는 칸막이 용도이다. 그러나 좌우로 열고 닫을 수도 있고, 유사시에는 앞뒤로 밀칠 수도 있게 설계된 독특한 문이다. 손님이 많이 오면 아예 문을 철거할 수도 있다. 밤에 잠을 잘 때는 다시 문을 달 수 있다.


1 안채에 있는 가구들은 4대 이상 써온 것으로 200년의 세월이 묻어 있다. 왼쪽에 놓인 제사상은 석 자를 넘지 않는 소박한 크기다.
2 양반가의 이부자리는 천지인의 원리를 담고 있다. 사랑채의 이부자리.
3, 5 한옥의 장독대는 정원이다. 후원인 셈이다. 실용적이면서도 감상하는 하나의 경치다.


이렇듯 사랑채에도 숨은 그림이 많지만 여자의 공간인 안채에도 숨은 그림이 많다. 안채는 바깥에서 보이지 않지만 안채에서는 바깥 풍경이 잘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안채는 ㅁ자 구조이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왼쪽 모서리 부분에 공간 틈새가 있고, 이 틈새로 100m 바깥의 하인 집이 보인다. 삼돌이가 쌀이 떨어져 불만이 있으면 그 모습을 안채의 마루에 앉은 안주인이 미리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안주인은 집안 구성원들의 애로사항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불만이 표출되기 전에 안주인이 얼른 삼돌이 집에 쌀을 보낼 것 아닌가. 안채로 들어오는 대문의 구조에도 배려가 숨어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안채로 들어올 수 없다. 일단 벽이 가려져 있다. 밖에서는 안채 마루를 바로 볼 수 없는 구조이다. 그리고 그 벽의 하단부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다. 일단 문 밖에 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주인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바깥 차단벽의 아랫부분을 30cm 정도 비워놓은 것이다. 방문객의 신발과 발목 부분이 보이는데, 안주인은 그 신발과 버선 모양을 보고 신분을 알 수 있다. 대갓집 마님 같으면 가죽신이나 비단신일 것이고, 지체가 낮은 부인네 같으면 짚신을 신고 올 수 있다. 그 신발 모습을 보고 안주인은 준비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명재고택의 가장 흥미로운 숨은 그림은 안채와 부엌 사이의 공간에 있다. 이 공간이 참으로 절묘하다. 우선 부엌의 지붕 높이와 안채의 지붕 높이가 다르다. 양쪽 지붕 높이가 같으면 하늘이 가린다. 지붕 높이가 같으면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안채가 컴컴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양쪽 지붕의 높이를 다르게 했다. 처음에 집을 지을 때부터 이 점을 세밀하게 계산한 결과이다. 안채와 부엌 사이의 공간은 위쪽이 좁고, 아래쪽은 넓다. 북쪽은 좁고, 남쪽은 넓다.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왜 그런가? 여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많이 받아야 한다. 그래야 시원할 것 아닌가. 따라서 남쪽 방향의 공간은 넓게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다. 되도록 적게 받아야 한다. 당연히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적게 받기 위하여 그쪽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 북쪽은 지형이 높고, 남쪽은 지형이 낮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쏟아지면 배수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높낮이를 주었다. 남쪽의 건물 모퉁이는 흙을 약간 높게 쌓았다. 여기에 올라서면 집 밖으로 누가 오고 가는지를 볼 수 있다. 오늘은 어떤 손님이 오는지, 몇 명이 오는지를 안채에서 파악해 밥의 분량을 맞출 수 있다. 그러려면 여자들이 바깥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전망대가 필요하다. 담장 밖을 봐야 하니까, 그 높이를 높게 만든 것이다. 안채 건물 모서리 쪽의 높은 모퉁이는 친정 식구들이 왔다가 돌아갈 때, 동구 밖까지 가는 모습을 안채에서 볼 수 있는 기능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여자들은 친정 식구를 대문 밖에까지 나가 배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안채와 부엌 사이의 공간은 남쪽이 넓고 북쪽이 좁다. 높낮이도 다르다. 안채 쪽이 높아 통풍과 배수가 잘 된다. 안채에 기거하는 마님의 방에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들도록 배려한 것이다.


6 10년 전부터 명재고택을 지키고 있는 윤완식 씨(왼쪽)와 칼럼니스트 조용헌 씨.

현재 집을 지키고 있는 후손인 윤완식(53세)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집은 요모조모 참 볼 것이 많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집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 고택에 상주한 지 10년째다. 물론 내가 태어난 집이지만 사실 나도 이 집에 대해 잘 몰랐다. 40대 중반이 되기 전까지는 건축적인 부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종손인 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내가 종손 노릇을 하면서 10년쯤 상주해보니까 고택에 배어든 건축적 노하우가 보이더라. 실제로 살아보아야만 느끼고 보이는 부분이 많다.” “이 집은 원래 종가 음식으로 유명한 집이라고 들었다.” “구십 노인이신 우리 어머니가 종가 음식을 잘하신다. 수백 년 동안 집안에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방법으로 간장과 된장을 담근다. 저쪽에 보이는 장독들이 바로 된장 독, 간장 독이다.” “외부에서 집을 구경하러 오는 방문객이 많은 것 같다. 집 관리하기에 어려운 점은 없나?” “한 달에 1천5백 명 정도 우리 집을 방문한다. 그중에는 사전 양해도 없이 불쑥 사랑채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에 마음이 좀 불편하다. 하지만 명재 후손이라는 사명감으로 그 불편한 마음을 다스린다. 옛날에는 집에 하인이 많아 관리하기가 수월했겠지만, 지금은 노동력이 없어서 가족들이 직접 쓸고 닦고 해야 한다. 양반 집안 후손으로서 접빈객接賓客을 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 욕 안 먹고 산다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명재고택에 대한 여러 가지 건축적 노하우를 알게 된 것은 후손인 윤완식 씨를 통해서였다. 뭐니 뭐니 해도 집주인이 자기 집에 대한 정보는 가장 많이 알고 있기 마련이다. 어쨌든 명재고택은 생활에 필요한 아기자기한 장치와 배려가 숨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을 지을 때 명재 선생의 제자들 수십 명이 돈을 모았기 때문에, 그 제자들의 아이디어가 모두 반영된 탓이다. 말하자면 ‘집단지성’이 반영된 집이다. 아마도 당시 집을 지었던 목수는 이 집단 아이디어를 반영해 집을 짓느라 머리 좀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편리했을 것이고, 수백 년 후에 나 같은 과객에게 이 집을 구경하는 재미를 주었으니까, 목수들의 고생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청운靑雲 조용헌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청운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현재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저서로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방외지 사>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등이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