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아트&아티스트]뱅앤올룹슨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야콥 옌센 신화를 디자인하다

50년 간 디자인한 제품 7백여 점을 콜렉션한 전시장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 마구간을 개조해 만든 큼직한 건물로 50주년을 기념해 한 달 동안 관람객을 맞이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에 덴마크 디자인의 대중적인 유행을 몰고 온 것은 ‘의자’였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베르너 판톤의 ‘판톤 체어’, 한스 베그너가 디자인한 등받이 곡선이 독특한 ‘Y 체어’, 아르네 야콥슨의 ‘앤트 체어’와 ‘에그 체어’ 등은 요즘 인테리어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진만 보아도 “아!” 하고 알아본다. 유려한 곡선, 상식을 뒤집는 이런 의자들은 20세기 덴마크 디자인을 맛볼 수 있는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산업 디자인 분야로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계 최초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졸업생이자 산업 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 덴마크 디자이너 야콥 옌센Jacob Jensen이 있다. 이름이 좀 생소하다면 힌트 하나, 바로 뱅앤올룹슨(B&O). 야콥 옌센은 27년간 명품 오디오 B&O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며 현재의 B&O 디자인을 만든 인물이다. 그 밖에 50여 년간 7백여 가지 디자인을 탄생시킨 입지전적인 존재다.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이자 ‘덴마크의 위인 50인’에 선정될만큼 자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야콥 옌센(왼쪽)과 그의 뒤를 이어 수석 디자이너로 스튜디오를 이끄는 아들 티모시.

덴마크 왕립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디자이너 하지훈 씨는 “야콥 옌센은 덴마크뿐 아니라 전 세계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단연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어느 작품을 봐도 시대를 좀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야콥 옌센의 디자인은 그만큼 획기적이었고, 그 명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확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훈 씨는 이렇게 시대를 초월한, 최첨단의 기기를 디자인하는 인물이 모던한 코펜하겐 시내가 아닌, 저 멀리 풍광이 ‘환상적인’ 시골에 산다고 덧붙였다. 젊은 시절부터 여든셋의 나이인 요즘까지 인적 드문 곳에서 신선처럼 살기에 디자인 학도들 사이에서 그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1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 건물의 뒤쪽 외관. 근방에 건물 한 채 보이지 않고 온통 푸르른 초원과 하늘로 꽉 차있다.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스튜디오
그림 같은 야콥 옌센의 스튜디오에 다녀왔다. 코펜하겐에서 네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유틀란트의 대도시인 오르후스Aarhus에 가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을 달리면 작은 마을 헤일스코브Hejlskov가 나온다. 그의 아들이자 현재 야콥 옌센 디자인을 이끄는 디자이너 티모시Timothy 야콥 옌센이 헤일스코브 역으로 마중 나왔다.
“기차역 부근에 레스토랑, 베이커리, 철물점 등이 하나씩 있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이에요. 우리 스튜디오는 이 한적한 마을에서 15km 더 가야 나와요.” 티모시는 해안가를 향해 난 외길을 따라 달렸다. 집 몇 채가 드문드문 나타나 이방인을 반겼다. 그러다 그마저도 보이지 않고 오직 하늘과 푸른 초원이 한참 동안 기다란 지평선을 그리고 있을 때, 어느덧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이 나타났다. 납작한 언덕 위에 낮게 엎드린 직선형의 건물이다.


2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 2층의 작은 창으로 본 풍경. 창문만 내면 벽면에 장식품을 걸 필요가 없다.
3 덴마크 여왕의 이름을 딴 ‘마르그레테 볼’(1950).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균형감있는 디자인이란 무엇인지를 한눈에 깨우쳐주는 제품이다. 이 빨간 양푼 하나가 50년 넘게 베스트셀러라는 사실로도 야콥 옌센의 신화가 증명된다.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은 아버지가 50년 동안 디자인한 작품을 소장한 개인 컬렉션 공간입니다. 원래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올해 아버지의 디자인 50주년을 기념해 4월 28일부터 한 달 동안 문을 열었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기업을 중심으로 단체 관람객을 받았지요. 또 하나의 건물은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저와 디자이너들의 작업 공간이지요. 디자인 스튜디오는 아버지가 40년째 살고 있는 인근의 집을 모티프로 해서 제가 새롭게 지은 건물이에요.”
티모시가 곳곳을 안내했다. ‘하우스 오브 야콥 얀센’은 마구간을 리모델링해서 지은 건물이다. 먼 풍경으로 봤을 땐 외관이 아담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널찍했다. 미니멀한 선반을 활용해 야콥 옌센의 작품을 총망라해 진열했다. “50년간 디자인한 7백여 점의 작품 중 일부만 있어요. 몇 년 내로 모두 모아볼 예정입니다.”
B&O 스테레오부터 덴마크 마르그레테Margrethe 여왕의 이름을 딴 볼(양푼), 청소기, 전화기… 모두 생활 전반에 필요한 제품들이다. 일상 어디에선가 공간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제 고유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디자인이다. 그래서 덴마크 사람들은 그의 디자인을 두고 ‘소리 없이 강한 아름다움(quiet beauty)’이라 이른다.
‘디자인 스튜디오’는 가정집처럼 꾸민 가옥 구조의 작업실이다. 일반적인 덴마크 인테리어와 좀 다르다.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아식 가구를 배치했음에도 동양적 여백의 미가 느껴졌다. ‘스칸디에이시안(스칸디나비안+아시안) 스타일’이라며 그는 동양 문화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스튜디오 입구에 족히 열 켤레가 넘는 장화가 줄지어 서 있다. 대청소를 자주 하느냐고 물었더니 티모시가 웃는다. “손님이 방문하면 골치 아픈 회의를 하기 전에 일단 장화를 신겨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우선 온몸으로 느끼고 나면 회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돼요.” 말이 끝나자마자 장화를 신고 그를 따라 나갔다.
초원을 따라 3분 정도 걸어 나갔더니 거짓말처럼 바다가 펼쳐진다. 아늑한 초원이 무장해제시킨 가슴에 피요르드 해안이 소리 없이 안겨왔다. 한마디 말이 무색할 자연이었다. 티모시가 침묵을 깬다. “아침 대여섯 시에 일어나서 해안가를 5km쯤 산책해요. 걷고 또 걸어도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죠. 저녁이 되면 또 언덕과 해변을 따라 10km 정도 조깅해요.” 티모시는 매일 거닐어도 아름답게 여겨진다는데, 하물며 단 한 번 그 풍경을 마주한 사람들이라야…. 그는 멍하게 서 있는 객들의 손을 끌고 좀 떨어진 초원으로 갔다. 티모시와 아내의 반지르르한 말들이 저 푸른 초원에서 그림처럼 뛰놀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살아온 터전을 눈으로 보고 두 발로 걸어본 것이 열 마디 설명보다 강렬했다.
다시 작업실로 들어왔다. 작품 하나가 탄생하는 과정 중에 만들어진 모형을 진열한 전시실부터 지평선을 끌어안은 커다란 통창까지 공간을 구석구석 탐색했다. 구경하는 틈틈이 야콥 옌센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현재 여든이 넘은 야콥 옌센은 디자인 작업을 하지 않으며, 또한 언론 인터뷰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먼 길을 달려온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러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티모시의 입으로 야콥 옌센의 신화를 들어본다.


1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에는 이들이 디자인한 주방 가구나 버튼만 누르면 스스륵 책장이 이동하는 자동식 서가 같은 덩치 큰 제품부터 헤드셋, 손목시계같은 소품과 액세서리까지 진열되어 있다.

‘경험을 담아야 사람과 친한 디자인이다’
야콥 옌센의 아버지는 가구 장인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그는 7년 동안 정규 학교를 다니다가 부모님 밑에서 가구 견습생으로 일했다. 1947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가구점을 열기도 했다. 이렇게 가구를 통해 디자인 세계에 입문한 그는 체계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고 싶어 ‘스쿨 오브 아트&크래프트’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가구 디자인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당시 아버지의 스승이자 시드니의 유명한 건축물 오페라 하우스를 디자인한 거장 외른 웃존Jorn Utzon이 세계 최초로 산업 디자인 학과를 창설했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1952년, 세계 최초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북유럽 국가 중 산업 디자이너를 고용할 수 있는 곳은 스웨덴 왕자가 파트너로 참여한 어느 스튜디오였다. 야콥 옌센은 6년간 이곳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에 디자인한 ‘마르그레테 볼’은 현재까지 생산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실용적인 디자인 콘셉트를 공부했고, 이 경험과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결합시켜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의 토대를 쌓아갔다. 그리고 1958년 코펜하겐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었다가 예상 밖으로 크게 확장되자 인원을 줄이고 이곳 피요르드 해안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은 B&O와의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아버지는 1964년 B&O와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B&O 본사와 50km 정도 떨어진 이곳에 살게 된 것이지요.” 야콥 옌센이 B&O 디자인에 쏟아 부은 노력은 혁명적이었다. 그가 B&O 디자이너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그의 어록 하나. “우리가 고작 라디오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장 해고될 겁니다.” 그의 도전 과제는 라디오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특별한 가치가 더해진 라디오’를 창조하는 게 목표였다.
그는 디자이너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B&O 디자인에 담겨야 할 가치는 바로 ‘경험’입니다. 이 ‘기계’랑 같이 살고 싶어요? 그럼, 이걸 볼 때마다 행복합니까? 이걸 만질 때, 제품과 통한다는 느낌이 듭니까? 반드시 제품과 소비자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품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커뮤니케이션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제품을 보고 만지며 미소가 떠오르게 해야 합니다.” 그는 가령 버튼을 누르면 슬라이드식 뚜껑이 스르륵 ‘명상하듯’ 열리도록 디자인했다. 외형뿐 아니라 ‘터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수석 디자이너로 27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했다는 사실로도 야콥 옌센의 명성을 증명한다. 그동안 스테레오, 카세트 등 B&O 제품 2백34점을 디자인했다.
1976년 야콥 옌센이 50세 생일을 맞았을 때, B&O 이사회는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우리에게 끼친 지대한 영향과 노고는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1960년대 초 덴마크에는 20여 개의 라디오와 TV 생산 업체가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B&O 하나만 살아남았다. 다른 경쟁 업체들은 주로 일본과 같은 해외의 값싼 브랜드에 밀려났다. 반면 B&O는 해외시장을 겨냥해 독자적인 디자인에 포커스를 맞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현재는 국제적으로 선두를 달리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덴마크 아트&디자인 박물관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 홈스테드 올센은 이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1970~1980년대에 B&O가 성공한 요인은 야콥 옌센의 선구적인 전략을 수용하는 모험에 기꺼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2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의 입구. 손님이 방문하면 ‘겉옷을 벗고 당신의 집처럼 편하게 둘러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샤프하고 모던한 오디오 디자인과 이처럼 위트있는 디자인이 한 명의 디자이너에게 공존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1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의 직선형 건물에 큰 창을 내는 것만으로 공간에 곡선과 여유를 들였다. 브랜드 매니저 토마스 씨와 야콥 옌센의 아들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티모시 야콥 옌센.

티모시는 야콥 옌센이 시도한 디자인이 아주 독특하지만 보편성을 지녔다고 평한다. “은색과 검은색이 대비되는 컬러에 간결하고 우아한 형상이 특징이지요. 그래서 누구라도 야콥 옌센 디자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야콥 옌센’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이름이나 어떤 디자인 스튜디오의 이름 또는 특정 제품명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야콥 옌센식 디자인’의 대명사지요.”
티모시는 특히 아버지의 작품이 뉴욕 모마MoMA에 전시되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1978년 디자이너로는 이례적으로 야콥 옌센의 B&O 오디오 작품 28점이 모마에 전시되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뉴욕 타임스> 리뷰. “20세기 산업 디자이너로 독보적인 인물이라 하기에 손색없다.” 야콥 옌센의 위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문구였다.

‘아이디어, 유머 그리고 광기로 디자인해라’
평론가나 큐레이터는 야콥 옌센 디자인의 강점을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이라 평한다. 20~30년 전 만든 오디오는 물론 50년 전에 디자인한 빨간 양푼이 지금도 롱런하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우리나라에서 핸드폰이 하나 출시되면 그 디자인이 1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과 상반된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디자인이 장수하는 비결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첫째, 제품 하나를 디자인하는 데 월등히 많은 시간을 투입하기 때문입니다. 긴 시간 애정을 담아서 돈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해 디자인합니다. 아름다움을 찾아 디자인하면 돈이 따라오지요.” 티모시는 야콥 옌센이 35년 전에 디자인한 라디오 사진을 펼쳐 보이며 이 제품의 기능을 연구하고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겪는 동안 실제 사이즈 모델을 76개나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랐을 때도 야콥 옌센은 단 한 번도 자만하지 않았다. “그 제품이 담당할 기능이나 기술적인 분석을 철저히 합니다. 그런 뒤에 굳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감추어서 되도록 심플하고 매끈한 표면을 만듭니다.” 야콥 옌센의 작품이 심플하고 유려한 선을 자랑하는 비결이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작품에 어떻게 신화를 새겨 넣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차가운 기기가 어떻게 사람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을지를 염두에 둔 것이죠. 아버지가 그 제품을 사용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저 색다른 디자인이 아닌, 진정으로 옳은 디자인,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는 게 목표였고요.”

2 커다란 마구간을 리뉴얼해서 만든 널찍한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은‘채우기’가 아닌 ‘비우기’를 콘셉트로 디자인했다. 역시 ‘오직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야콥 옌센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1 디자인 스튜디오의 다이닝 룸. Y체어를 비롯해 심플하고 내추럴한 북유럽 인테리어의 전형을 보여준다.


2 ‘산책부터 하시죠?’ 작업실 입구에 하이힐 신은 손님을 배려한 산책용 장화가 있다.

디자인 학도들에게 듣기로는 ‘야콥 옌센은 TV도 보지 않는 괴짜’라고 했다. 진짜 그럴까 싶어 물어봤다. “하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디자인 박람회나 전시회 등에 전혀 다니지 않고,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참고하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나 봅니다. 아버지는 오직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신화가 아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1990년부터 아버지로부터 ‘야콥 옌센 디자인’을 물려받아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티모시는 정규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곧 디자인에서는 위대한 스승이었으니까. “열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 디자인 수업을 받았어요. 첫날 제게 분필을 쥐여주시더군요. 똑바로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두 손으로 분필을 쥐고 벽에 붙인 큰 종이에 수직으로 선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며칠 반복한 뒤, 그다음에는 같은 자세로 수평으로 선을 그리도록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을 그렸어요. 나중에 아버지는 수직선은 삶, 수평선은 죽음, 원은 순환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수년간 그는 야콥 옌센 곁에서 기초 디자인부터 모델링까지 두루 배웠다.
거장 디자이너가 아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아이디어입니다. 특히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중히 여기셨지요. 둘째는 유머예요. 유머가 더해져야 삶에 윤기가 흐르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생겨요. 마지막으로 ‘완전히 미쳐라’하고 강조하셨습니다. 미쳐야만 한 걸음 깊숙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문득 눈을 돌려 ‘하우스 오브 야콥 옌센’에 진열된 작품을 찬찬히 본다. 1960년대 야콥 옌센이 만든 턴테이블과 1980년대 중반 야콥 옌센의 디렉팅으로 티모시가 디자인한 전화기와 2000년대에 티모시가 디자인한 시계가 한데 어울려 공존하고 있다. 처음도 모르고 끝도 모를 천혜의 자연은 아마 이들의 디자인에 길고 긴 생명력을 이어줄 것 같다.

3 B&O의 스피커 ‘베오박스 큐브 2500’(1967). 제작 시기를 짐작하기가 좀체 어려운 제품이다. 야콥 예센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