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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을 찾아서]영원무역 대표 성기학 씨의 창녕 아석고택 꽃은 피었다가 지고 스러졌던 옛집은 다시 피어나네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 멀리 화왕산과 우포늪 사이에 자리 잡은 아석고택. 조선시대 말기에 건립하고 6·25전쟁 때 일부 소실되었다가 현재 다시 복원한 한옥. 한국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부침을 겪었던 이 집에 백일홍이 만개했다. 집의 역사가 곧 사람의 역사다.

연못 주변으로 드리워진 백일홍, 백일 동안 붉다 하는 백일홍이 1백50년을 이어온 아석고택我石故宅에 한창 절경을 그리고 있다. 입술연지 같은 붉은 꽃이 부끄러움도 없이 화려하게 피어나 사방을 장식하고, 가지의 그림자는 초록 연못 수면에 의젓한 선을 그린다. 누마루에 앉아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릉도원에라도 와 앉은 기분이다. 이처럼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아석고택이지만 한때 불타고 무너지고 퇴색해 10여 년 전만 해도 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던 곳이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North Face’로 유명한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 그는 현재 이 고택의 주인이자 낡은 선조의 집을 다시 복원하고 있는 후손이다. 자신의 어릴 적 기억과 조상들의 체취가 밴 채 스러져가던 이 한옥을 그는 10년 전부터 되살리기 시작했다. 올가을 예정대로 안채 공사가 완료되면 내년에는 복원 과정이 거의 끝나, 당당한 위세의 2백 여 칸 고택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시대별 한옥 변천사가 드러나는 집 ‘아석고택’ 또는 ‘성씨고가’로 불리는 이 한옥은 한국 근·현대 건축사와 함께한 집이다. 원래 1850년대에 본가가 들어섰다가 그 아들, 손자가 성장하여 일가를 이루자 그들을 위해 집을 이어 짓고 또 이어 짓고 한 것이 네 동의 한옥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각 일가별 집은 담으로 구분되는데, 시원한 누마루를 자랑하는 아석헌我石軒이 가장 먼저 들어섰던 본가로 1855년경에 지었으며, 두 번째 집 석운당石雲堂은 1860년대 대원군 시절에, 솟을대문과 안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나타나는 연못을 중심으로 한 구연정龜蓮庭은 1890년대에, 그리고 경근당慶勤堂은 1920년대에 지었다. 기와 너머 첩첩이 기와가 이어지는 전체 6천 평 규모의 대갓집 한옥이지만, 필요에 따라 조금씩 규모를 불려간 형국이므로 전통과 격식에 꼭 맞추어 들어선 것이 아니며, 각 한옥채마다 당시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그 모양과 형식이 다르다. 시대별 한옥 변천사를 한집에서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셈이다. 

1 만개한 백일홍 꽃잎이 연못 위로 떨어져 진풍경을 연출한다. 본래 연못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조성한 이 연못은 그 모양이 한반도 형태를 띤다.


2 기품 있게 휘어진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구연정은 고재를 사용해 재건되었다.

또한 아석고택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중의 명당. 강릉 선교장, 구례 운조루와 함께 3대 명택으로 꼽히기도 한다. 풍수 연구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주말이면 답사 팀이 수시로 찾을 정도. 이곳은 수백만 평의 ‘어물리 뜰’을 사이에 두고 화기가 충만한 화왕산火旺山과 마주 보고 있다. 고택 앞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는 호방함과 풍요로움을 전하고, 화왕산엔 붓 끝을 닮은 삼각형 봉우리, 즉 문필봉이 뾰족뾰족 솟아 있어 학식 있는 자를 많이 배출한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성씨 일가는 위풍당당한 대갓집이기도 했지만 배움과 신문물로써 지역 발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창녕 주민들의 수입원 창출에 일조했던 특산물, 양파 이야기다. 1960년대에 성기학 회장의 부친 우석 성재경 씨가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보다 더 일찍 경화회耕和會를 조직, 농촌 계몽에 앞장서고 양파 재배에 힘써 창녕 농민들의 살림을 윤택하게 했던 것. 양파를 구입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양파 망도 그가 고안해낸 것이라고.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구연정 누마루에서 담소를 나누는 성기학 씨 부부. 부인 이선진 씨는 마당이며 마루에 백일홍 꽃잎이 떨어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부러 쓸지 않은 채 손님을 초대하기도 했다. 통상 한옥은 정원을 후원 형태로 집 뒤에 두지만, 구연정의 정원은 일본 등 외국 문물의 영향을 받은듯 건물 앞쪽에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 드러나는 깊은 나뭇결
성기학 씨 자신은 이 집에서의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성기학 씨가 태어나던 당시는 그의 아버지가 상경하여 서울에 터전을 잡은 뒤라 출생지는 돈암동이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본가가 있는 창녕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고, 세 살부터 7년 남짓의 유년 시절이 그가 이 집에 머물렀던 시간의 대부분이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이촌향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농촌 사람들은 하나 둘 눈부신 현대의 신세계를 좇아 시골에서 도시로 떠나갔다. 아석고택은 전쟁통에 집의 상당 부분이 불타 사라진 데다, 점차 사람이 떠나고 돌보는 손길이 사라지면서 이곳저곳 무너져갔다. 이를 그저 두고 볼 수 없었던 성기학 씨는 1998년 무너지는 부분만 보수할 요량으로 처음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손을 보다 보니 조금씩 일이 커져서 결국에는 지금과 같이 집 전체를 재정비하기에 이르렀다. 연못이 있는 구연정 일대와 석운당의 사랑채는 고재를 사용하여 완전히 재건했고, 아석헌과 경근당은 보수만 했다. 목재를 잘 살펴보면 어디가 본래의 부분이고 어디가 보수한 부분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새로 보수한 나무는 드러나는 결이 없이 밋밋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낸 나무는 깊고 또렷한 나뭇결을 보여준다.


1 성기학 씨가 유년 시절을 보낸 경근당 내부. 1920년대에 지은 한옥으로 유리 창호를 사용,  전형적인 개화기 한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고택은 한국 한옥 발달사의 후기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정되어, 아석헌과 그 주위의 다섯 채 한옥이 경상남도 문화재 제355호로 지정되었다. “많은 분들이 이곳으로 한옥 답사를 오시지만, 사실 저는 전통 유물로서의 한옥을 복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의 집을 잘 돌보고, 잘 사용하도록 하려는 개인적인 필요에서 벌인 일입니다. 그래서 꼭 과거 그대로 복원하는 것만도 아니고, 현대적인 편의시설을 더해 짓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한옥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많은 분들이 청해서 다녀가십니다. 정통 한옥 양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실망하는 분도 계셨고, 이곳을 너무나 좋아해 홀로 며칠씩 묵고 가는 분도 계셨지요.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아석고택의 대문을 열어두려 합니다. 한학 등 인문학이나 한옥을 공부하는 분들을 위한 세미나 장소로, 외국 손님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는 공간으로 지금 시대에 맞게 이 집의 가치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손님 있는 풍경이 일상이 된 한옥 그의 작은 사명감 덕분에 아석고택에는 늘 많은 손님이 들고 난다. 이번 촬영을 진행한 날에도, 그의 지인인 방글라데시 화가, 퇴계사상 연구원 등 각 채마다 손님들이 들었다. 그의 부인 이선진 씨의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 잘 만나지 못하던 지인을 오히려 이곳 아석 고택에서 마주치기도 한다고. 성기학 씨 내외와 비슷한 연배인 지인들은 이곳에서 각자 어렸을 때 자신들이 살던 한옥을 추억한다. 당시의 형편에 따라, 어떤 이는 큰 규모의 사랑채에서 향수를 느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세 칸짜리 단출한 한옥에서 궁핍한 시절 어머니의 고생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집은 또 모임이나 단체의 세미나 공간으로도 내주고, 명성을 전해 듣고 온 관람객도 박대하지 않는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은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운치를 느낄 수 있는 이 한옥에 반한다. 적지 않은 손님 치르기가 번거로울 법도 하건만 이 부부는 느긋한 표정. 오히려 식사며 화장실이며 부족한 점이 많은데도 다들 너무 좋아하고 아껴주신다며 외려 겸손하다. 손님이 오면 연못이 바라다보이는 누마루에서 다과를 나누면서 고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성기학 씨에게는 큰 즐거움. 그 자신이 혼자 머물 때는 조용히 독서할 때가 많다. 책을 읽다 눈을 들면 멀리 보이는 화왕산의 능선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낙이다. 신기하게도 어느 한옥채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화왕산은 조금씩 다른 능선을 보여준다. 구연정 누마루는 연못과 휘어진 소나무 등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있고, 아석헌 누마루는 차분하고 단정한 맛이 있다. 수십 채로 구성된 이 한옥은 어느 곳 하나 더하고 덜한 곳이 없을 만큼 흡족하다.
전쟁의 포화에 상처받고, 현대의 신문물에 밀려 뒤편에서 처져 낡아가던 고택. 이제 제 모습을 갖추어 다시 찾은 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해마다 피어나는 백일홍과 함께 찬란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마당에서 바라본 경근당. 근대 한옥에 비해 기둥과 도리, 들보가 가늘고 장식이 풍부하며, 실용적 가치가 가미되어 벽장, 다락 등 수납공간이 많다.


1 경근당으로 들어서는 돌계단 옆에는 작고 고운 풀꽃이 수줍게 손님을 반긴다.
2 담 아래 놓인 항아리가 연출하는 평화로운 풍경.



3 이층장 뒤로 보이는 기암괴석이 멋스럽다. 성기학 씨는 울산장 등 우리 고가구를 컬렉션하고 있다.
4 돌확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외출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 잡기를 씻기 위한 세면대. 남자용은 이처럼 긴 원형으로 사랑채 앞에 놓였고, 여자용은 복숭아형으로 안채 앞에 있다.



1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아석헌은1855년 경에 지은 건물.
2 이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기와지붕 너머 화왕산 능선을 감상하는 것도 성기학 씨의 큰 즐거움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