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집]서초동 안명숙 씨의 빌라 전통과 현대가 소통하는 화이트 하우스
한지붕 아래 서로 다른 분위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 강한 집 안에 전통 색이 짙은 쉼터를 들이고, 대를 물린 옛 그림과 추상적인 현대미술 작품이 하얀 벽을 캔버스 삼아 함께 호흡하는 집.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화이트 하우스에서는 다채로운 공간의 멋을 누릴 수 있다.


화이트 컬러로 마감한 현대적인 느낌의 거실. 넓은 공간의 일부는 바닥을 높여 마루를 깔고, 천장에 작은 수납공간을 만들어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궁중에서 사용하던 책걸이 병풍의 그림을 다시 배접해 만든 것. 여러 가지 가구와 전통적인 요소가 화이트를 배경으로 조화를 이룬다.


1, 4 거실과 안방 사이에 있는 한실은 현대적인 색채가 강한 집에 숨어 있는 느림의 공간이다. 편안한 한옥의 정취가 살아 있는 이곳에서 안명숙 씨는 차도 마시고 책도 보면서 평화로운 휴식을 즐긴다.
2 현관에서 안방 쪽으로 바라본 풍경. 간결한 라인과 화이트 컬러가 주조를 이루어 어떤 예술 작품과도 잘 어우러진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조각가 신상호 씨의 도예 조각상이다.


뾰족한 천장을 이고 있는 서초동의 한 복층 빌라. 15년 동안 정을 붙이고 살아온 안명숙 씨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다. 이곳에 사는 동안 두 자녀가 모두 장성했고 그중 하나는 출가도 시켰으니,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부대끼며 호흡한 의미 있는 집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누구보다 이 집에 대해 잘 알고, 애착 또한 강했기에 얼마 전 15년 만의 대공사를 감행하면서 안명숙 씨는 그동안 생각해왔던 집에 대한 바람을 조심스럽게 담아냈다.

누구나 집에 대한 나름대로의 꿈이 있을 게다. 하나 마음먹은 대로 실행에 옮길 만한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일단 기회가 되면 그간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생각들을 원 없이 쏟아내려 안간힘을 쓰곤 한다. 그러다 가끔은 공간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의지가 너무 앞서는 바람에 정작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에게 공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공간에 사람을 끼워 맞추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멋들어진 집,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집을 갖고 싶다는 헛된 욕심엔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행하는 특정 스타일을 하나 정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기에 맞추려는 억지도 부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그저 사람이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집이 가장 좋은 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만큼은 아니더라도 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밝은 집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고미술에 관심이 많으셨던 시아버님이 생전에 수집하신 그림이며 도자기 같은 작품들을 일상적으로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욕심은 좀 부려봤어요. 또 제가 모아둔 요즘 시대의 그림이며 조각 작품도 있으니 과거와 현재의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지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3 입체적이고 경사진 천장이 인상적인 2층 패밀리 룸. 안명숙 씨 바람대로 따사로운 햇살을 맘껏 받으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이런 것들 모두가 삶의 일부이니 이를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희망사항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신구철 씨(A&A 대표, 문의 02-512-0121)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깨끗한 화이트 컬러와 심플한 라인으로 마감한 집은 보는 이를 단번에 매료시킬 만큼 충분히 돋보인다. 이 두 요소의 강렬함은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도 확실하게 시선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개성 강한 예술 작품의 배경으로도 그만이다.

공동 공간인 거실과 다이닝 룸을 제외한 나머지 개인 공간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살짝 숨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부부의 독립된 공간인 안방과 한실, 미혼인 자녀의 공간, 그리고 손님방과 패밀리 룸으로 이루어진 2층. 이렇게 뒤로 숨은 공간들은 기본 바탕은 비슷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조금씩 다른 구석도 있다. 화이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거실이 중후하고 이국적이라면, 자녀의 방은 빈티지 느낌이 살짝 가미되었고, 2층은 중후한 1층에 비해 다소 가볍고 캐주얼하고, 안방은 유일하게 컬러감 있는 패브릭으로 악센트를 주었다.

예측하지 못한 의외의 공간을 만나는 것도 이 집에서 경험하는 재미 중 하나다. 거실 뒤쪽의 안방과 연결되는 한실이 대표적이다. 현대적인 분위기가 강한 공간 한편에 가장 한국적인 방을 마련한 것. 화이트를 주조색으로 한 다른 공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한실은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고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작은 옹달샘 같은 곳이다. 천장에 서까래를 얹고, 바닥에 마루를 깔고, 벽에는 한지와 거친 나뭇결이 살아 있는 고재를 붙이니 그윽한 한옥의 향기가 배어나는 듯하다. 여기에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쓰시던 고가구를 들였는데 원래부터 한 사람의 것이었던 것처럼 서로 딱 맞아떨어진다. 시아버님이 쓰시던 평상엔 큼직한 대나무로 기둥을 엮고 삼베로 만든 조각보를 드리우니 제법 운치 있어 보인다. 문을 닫으면 그야말로 일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하고 독립적이다. 안명숙 씨가 낮 시간을 즐겨 보내는 곳도 바로 여기다. 시간에 쫓겨 숨 가쁘게 헐떡이며 살다가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 이 멋진 평상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 향기로운 차 한 잔 하면 더없이 행복해진다.

한실만큼은 아니지만 손님방과 패밀리 룸이 있는 2층도 아늑하다. 현관 옆 계단으로 연결되는 이곳은 1층에 비해 아담하고 무엇보다 햇살이 좋아 평소에도 자주 올라와 휴식을 청한다고. 뾰족하고 경사진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입체적인 천장은 옛날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데 덕분에 창문도 수납장도 모두 사선이다. 또 고개만 들면 하늘이 보이는 천창이 있어 아파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작은 호사도 누릴 수 있다. 맑은 날엔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을 맘껏 받고, 비 오는 날엔 머리 위로 토도독토도독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도 좋으리라.


1 다이닝 룸의 이색적인 세면대. 손님들이 오면 일부러라도 손을 씻어볼 정도로 흥미로워하는 코너이다.
2 작지만 아늑하고 독립적인 부부 침실은 유일하게 블루 톤의 패브릭으로 악센트를 주었다.


집 안 곳곳에는 고미술과 현대미술 작품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어디에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매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응용미술을 공부한 안명숙 씨의 몫. 어떤 때는 있는 작품만 바꿔놓기도 하고, 옛 서화는 상태에 따라 배접을 다시 하거나 낱장 그림을 여러 장 모아 하나의 액자로 만들기도 한다. 거실에 가로로 길게 걸린 그림도 원래는 궁중에서 사용하던 책걸이 병풍이었다. 시아버님이 물려주신 것인데 일부가 낡아서 그림만 다시 배접해 액자로 만드니 근사한 또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밤이 되어 그림을 비추는 조명만 밝혀두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그 맞은편에는 우리나라 근대 인물화의 대표 주자였던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가 세워져 있는데, 빨간색 치마에 연두색 당의를 입고 서 있는 여인의 자태가 어찌나 단아한지 자꾸만 바라보게 된단다. 현관과 거실, 안방으로 이어지는 동선에는 조각가 강희덕 씨의 작품과 도예가 신상호 씨의 동물 형상 도예 조각상이 나란히 있다. 거실의 작품과는 느낌도, 시간의 간극도 꽤나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시선이 자연스럽게 옮겨 가는 건 안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안목 덕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 안 구석구석 안명숙 씨의 감각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곳이 참으로 많다. “어떨 땐 이 집이 나의 캔버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여기엔 무슨 그림을 걸어볼까 고민하고 완성하는 즐거움이 있죠. 또 하얀 벽에는 어떤 작품을 놓아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집을 맘껏 활용하는 여유도 생기는 것 같아요.”
상반되는 분위기의 작품과 다른 콘셉트의 공간이 조화롭게 어울려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집. 이 집에서는 이곳저곳 노닐며 조금 분주하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 갤러리에 온 듯, 조용한 한옥에 온 듯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공간을 한껏 누리면서 말이다.

3 입구의 기둥과 아치형 프레임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다이닝 룸. 15년 동안 사용한 가구와도 잘 어울리는 이곳은 안명숙 씨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다. 간이 주방이 마련되어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주부로서의 행복을 만끽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