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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집] 양재동의 김시정 씨 빌라 새와 바람이 머무는 그림 같은 집
창문 밖의 자연은 커다란 그림이 되고, 예술가가 창조한 그림은 다시 자연이 된다. 화폭 위의 고운 색감이 자연의 숨소리에 묻어날 것 같은 그림 같은 집. 가만히 등을 대고 앉아보니 저 멀리서 아련하게 새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생동하는 녹음이 절경을 이루는 정원, 자연에서 묻어난 듯 차분한 색감, 단아하게 놓여 있는 마룻장 테이블…. 김시정 씨의 양재동 빌라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1 거실에서 바라본 안방 입구. 우리 전통 고가구와 오수환 씨의 작품이 어우러져 고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 거실에 걸린 액자에 초록빛 정원이 그대로 반사된다.


울긋불긋 꽃대궐을 이루는 아담한 정원이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양재동의 한 빌라. 마치 비밀의 화원을 발견한 듯 신기한 눈으로 대문 안을 훔쳐보니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철제 대문, 목련나무가 드리운 정겨운 돌담, 어딜 가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주택 구조에 반가운 마음이 든다. 사람이 호흡하듯 집도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흙 밟고 살 수 있는 단독주택만을 고집해온 김시정 씨. 가정을 꾸리고, 세 아들을 출가시키고, 퇴직한 남편과 함께 노년을 설계하게 된 지금까지 그가 사는 집에는 늘 자연이 함께해왔다. 남들은 작은 화단 하나 가꾸는 것도 번거롭다 하지만 그에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은 숨 쉬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고급 자재가 어떻고 신소재 마감이 어떻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거든요. 바람이 들면 바람을 맞고, 따사로운 햇빛 아래 빨래도 말리고, 풀 향기 폴폴 풍기는 사람 살기 좋은 집이 가장 집다운 집이죠. 박제된 공간이 아닌 자연의 숨이 관통하고 생명력이 느껴지는 집이랄까요? 사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례와 색감은 모두 자연에서 옵니다. 자연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죠.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살아 숨 쉬는 나무와 꽃처럼 아름다운 것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3 새 좋아하는 김시정 씨를 위해 동서가 추석 때 선물해준 새 모양 도자기. 도예가 신상호 씨 작품이다.
4 스카이 블루 컬러가 인상적인 정물화가 걸린 서재.


그러고 보니 이 집 어디서도 자연 본연의 색을 해치는 인공적인 색감은 찾아볼 수 없다. 현관을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거실은 그저 고요하다. 그 옛날 선조들이 쓰던 마룻장으로 만든 기다란 테이블 하나가 단출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최고급 자재로 치장한 세련된 인테리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남향으로 크게 낸 거실 창을 액자 삼아 그림 같은 자연경관을 담았다. 커다란 소나무며 느티나무가 우거진 정원에는 짙은 남보랏빛 붓꽃, 개패랭이, 하늘거리는 마가레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정원과 집 안 곳곳에는 우리 전통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오리나 새가 사뿐히 앉아 있는데, 이는 마치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한 묘한 여운을 남긴다.


5 돌과 나무 그리고 예술 작품이 어우러진 거실. 벽면에 걸린 그림은 오수환 씨 작품이다.
6 클래식한 소파와 조화를 이루는 그림은 김시정 씨가 직접 그린 것.


정원을 바라보고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창문만 한 크기의 그림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대담하게 뻗어나간 필적이 느껴지는 그림은 그가 특히 좋아하는 화가 오수환 씨의 작품이다. 오수환 작가는 늘 색채를 극도로 아끼지만 그 신중함 속에서 강하고 대담한 효과를 배제하지 않는다. 김시정 씨는 그것이 바로 오수환 작가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그림은 고요한 듯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자연을 닮았다. 그의 집에서는 그림 역시 자연의 일부가 된다. 화폭 위의 색은 절대 혼자 도드라지지 않으며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듯 조화롭게 걸려 있다.


7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과 온갖 그림이 늘어서 있는 2층 작업실.


새하얀 눈밭을 연상시키는 오수환 씨의 그림 맞은편에는 쓸쓸해 보이는 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판화 작품이 걸려 있다. 둘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수고했다며 남편이 선물한 것이다. 남편은 무뚝뚝하기로 치면 따라올 인물이 없을 만한 전형적인 한국 남자지만 기념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선물 대신 현금을 건넨다(그림 취향까지 알아줄 만큼 세심한 성격은 못 된다고). 거실 소파 앞에 놓인 티 테이블과 복도에 놓인 콘솔은 금속 공예가의 작품이고, 콘솔 위 강렬한 컬러의 도자기는 도예가 신상호 씨의 작품이다. 후정에 사뿐히 앉아 있는 수십 마리의 새 역시 도예가 김이정 씨의 작품. 거실, 주방, 복도, 화장실, 정원 등 어딜 가도 만날 수 있는 그림과 도자기로 이 집은 갤러리를 방불케 한다.


1  따사로운 나무 그늘 아래 데크를 만들었다. 샴페인 카트는 청담동 가구숍 씨엘(02-548- 8586)에서 구입한 것.
2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우물.


“그림을 걸 때는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림을 걸 장소에 어떤 가구가 놓여 있는지 고려하는 것이죠. 가구 형태나 스타일을 고려해 어울릴 만한 색과 모양을 선택합니다. 또한 도자기나 우물과 같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물건을 좋아하는데, 이는 우리 전통 목 가구에도, 현대적인 모던 가구에도 무척 잘 어울립니다. 정원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특별한 오브제 역할을 하지요.”


3 바위 위에 옹기종기 놓인 사과 모양 오브제가 재미있다.
4 친언니가 선물해준 새 오브제.


1층 공간은 전반적으로 한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거실과 주방에서 연결되는 데크는 원래 대리석이 깔려 있었으나 이를 모두 들어내고 나무 마루로 교체했다. 거실에는 궤와 반닫이, 안방에는 지장과 소반 등 우리나라 전통 목 가구가 놓여 있고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에도 우리나라 전통 물확과 도자기·석조 작업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네모반듯한 형태와 투박한 돌 질감이 정겨운 물확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동시에 집 안에서는 자연의 가습기 역할을 한다. 유럽풍 클래식 가구가 놓여 있는 2층 작업실은 1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지만 이곳 역시 코너마다 그림이 걸려 있다. 여성스러운 라인의 화이트 책상 뒤에는 클래식한 느낌의 골드 프레임 액자에 넣은 정물화를, 올리브 그린 색상의 소파 뒤쪽으로는 옐로·그린·브라운 컬러가 어우러진 추상화를 걸었다. 이 추상화는 김시정 씨가 오묘한 색상의 클래식 소파에 어울릴 만한 색감으로 직접 그린 것. 2층 공간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만의 작업실이다. 직접 가꾼 아름다운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날마다 냄새도 빛깔도 다른 햇살과 자연을 느끼며 그림도 그리고 차도 마신다. 비 오는 날도 마찬가지다. 리듬을 타듯 가벼운 북소리를 내는 경쾌한 빗방울을, 슬픔을 가득 머금은 서글픈 빗줄기를 알아볼 수 있다. 늘 자연과 벗하며 지내니 감성이 더욱 풍부해진다.


5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멋진 물확. 김시정 씨는 시간 날 때마다 집에 어울릴 만한 돌과 오브제를 구하러 인사동을 찾는다.


예술이 자연이 되고 자연이 집이 되는 집. 어느 것 하나 도드라지지 않는 평온하고 고요한 기운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집. 햇살이 너무 좋은 어느 날, 색깔 고운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산책로를 걸을 때면 생각날 듯하다. 멋진 정원을 바라보며 따듯한 커피 한 잔 대접받았던 이 그림 같은 집이.

성정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