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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중부 도시 리즈에서 살고 있는 사이먼 윌킨슨과 류정숙 씨 3백 년 세월 위에 둥지를 튼 부부이야기
따로 또 같이 하나가 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부부라고 한다면 고개를 저을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연인처럼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 높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는 낮은 담을 지나 그들의 문을 두드려본다.

며칠 전 새 단장을 마친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이먼 가족.정원은 모두 사이먼의 아버지가 손수 가꾸었다.

풍경화처럼 펼쳐진 이국적인 자연 속에서 사이먼 윌킨슨 Simon Wilkinson 가족의 보금자리를 찾아내는 일은, 흡사 짙은 갈대 숲 사이에 숨겨놓은 새집을 찾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선 조심스러운 눈과 호기심 가득한 발자국으로 다가가서 주인장을 청하지도 않은 채 창문부터 기웃거려본다. 하지만 내부를 살피기도 전에 성큼 문이 열리고 선한 인상의 영국 신사, 사이먼이 악수를 청해 온다.

애니메이터인 사이먼은 마감에 쫓겨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작업을 했단다. 그런데도 활기찬 목소리와 가벼운 걸음걸이가 피곤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이제 갓 백일 된 아기를 안고 나온 류정숙 씨는 꾸밈이나 과장됨이 없는 시원한 말투와 웃음으로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살며시 아빠 곁에서 낯선 이를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눈망울, 애너벨이다.

이 가족의 안주인 류정숙 씨는 한국에 있을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다. 아이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기 위해 1999년 리즈 대학교에서 TESOL(Teachers of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과정을 이수하던 중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던 사이먼을 만났다. 포켓볼을 치면서 처음 만나게 된 인연의 끈을 길게 늘어뜨리기라도 하듯, 야외 테라스엔 커다란 포켓볼 테이블을 마련해놓았다. 이들 부부가 만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알콩달콩 연인처럼 살아가는 비결, 어쩌면 연애 때의 그 설렘을 간직하고 있는 이 테이블 덕분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공들을 매만져본다. 부딪힐 때마다 또독 또독 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공처럼, 함께할수록 서로에게 더욱더 맑은 울림이 되는 존재, 그게 바로 이 부부의 모습 아닐까?

1 이 집에서 유일하게 17세기 분위기가 남아 있는 욕실. 당시의 마룻바닥과 앤티크 욕조가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앤티크 시장에서 오래된 욕조를 구해 와 사이먼이 직접 색을 칠했다.
2 부부 침실은 두 사람의 성격을 반영이라도 하듯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언제 누가 찾아와도 항상 잘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는 부부의 부지런함이 집 안 곳곳에서 느껴진다.

“첨엔 바람 많고 비 많은 리즈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사이먼이 큰 힘이 됐죠. 학생회관에서 만났는데 그때도 포켓볼을 치고 있었어요. 4백 원 정도 넣어놓고 하루 종일 쳤죠. 아마 사람들이 저희를 엄청 미워했을걸요.”
특별한 러브 스토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운명적인 만남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때를 회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약속이라도 한 듯 수줍은 웃음이 살포시 자리한다.

“저는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는데 피오나(류정숙 씨의 영국 이름이다)와 사귀면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접하게 되었어요. 한국 전통 가구나 그림, 도자기 등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갈하고 세련된 한국 문화에 매료되기 시작했지요. 정원에 대나무로 만든 정자를 만들고 게스트 룸과 리빙 룸을 동양식으로 꾸민 것도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야 하는 피오나를 위한 배려인 거죠.”
문득 류정숙 씨를 바라보며 ‘외롭진 않았는지’ 묻고 싶어졌지만, 꿀꺽 말을 삼킨다. “영국의 겨울은 7월에 끝나고 8월에 시작한다”는 영국 시인 바이런의 잔인한 읊조림이 이 나라를 대변하곤 한다. 이런 날씨와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적응하면서 외롭진 않았을까?

“처음엔 사람들이 왜 하필 리즈냐고 했어요. 날씨도 안 좋죠, 한국 식품점도 없죠, 런던에서도 멀죠. 하지만 당시엔 TESOL 과정이 영국에선 리즈 대학교 하나밖엔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사이먼을 만났고, 결혼도 빨리 했어요.”


3 주방은 두 사람 모두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자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란다. 요리는 그 나라의 문화라고 했다. 한국과 영국의 문화가 하나가 되는 재미있는 공간이다. 
4 전통적인 벽난로처럼 보이지만 갈탄이나 나무를 때면 라디에이터가 따뜻해지는 현대식 보일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나중에 새로 집을 짓게 되면 바닥은 한국의 보일러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5 베이지색 통로엔 스타카토 같은 흑백 그림으로 악센트를 주었다.

외로울 틈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사이먼이 부인을 생각하며 배려한 시간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동양적 분위기의 공간을 만든 것은 국제결혼을 통해 생길 수 있는 이질감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는 사이먼의 생각이었다.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밀고 당김 없는 편안한 공간, 집에 대한 그의 특별한 철학이다. 사실 이들이 사는 집은 1691년에 지은 전형적인 농가 주택이었다. 하지만 허름했던 공간을 8년 동안 개조하고 꾸미면서 집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생겼다고 한다.

“애니메이터라는 직업은 불규칙한 생활이 단점입니다. 일이 있을 때는 컴퓨터 앞에서 며칠 동안 밤을 새워야 하죠. 바쁠 때면 며칠 동안 가족들 얼굴을 보지도 못해요. 그럴 때마다 일하면서도 마음이 많이 불편하죠. 그래서 항상 가족을 외롭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일과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던 게 바로 이곳입니다.”
그는 분명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릇된 과욕이 아니라 가족에게 충실하려는 한 가장의 바람직한 욕심처럼 보인다.


6 음악을 좋아하는 사이먼을 닮았는지 장난감 기타를 좋아하는 애너벨. 사이먼은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 기타 연주를 하면서 생기를 되찾는다.

사이먼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예술가 지망생이었지만, 졸업 후 15년째 독립 애니메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BBC와 ITV, CHANNEL4 등 주로 영국 TV 프로그램의 타이틀과 브리지 영상, 홍보물 등을 제작한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자동차 관련 TV 프로그램 <탑 기어Top Gear>의 타이틀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미 촬영했거나 제작한 과거의 이미지들을 모아 새로운 현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 지나간 시간 속에 파편처럼 풀어 헤쳐진 이미지들을 모아 하나의 조합된 영상을 만들고, 또 이를 통해 현재의 시간을 창조해 내는 일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시간과 영상의 탐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수백 년 된 과거의 집을 새로운 현재의 공간으로 만들어낸 그의 집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 집을 고치는 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그런데 지겹다는 생각보단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피오나도 저도 퇴근하자마자 붓을 집어 들고 새벽까지 페인트칠을 했어요. 오랜 세월 속에서 수많은 추억을 간직해온 공간을 모던하게 만들어내는 작업이 좋았거든요.”


1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함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이먼과 류정숙 씨는 따로 또 같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2, 4, 6 사이먼은 한국을 그리워하는 부인을 위해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소품들을 마련했다. 안타깝게도 전통적인 한국 소품을 구하기가 힘들어 리즈 시내에 있는 동양 소품 매장에서 가장 한국적으로 느껴지는 소품들을 선별해 왔다고.

한 프레임마다 담겨 있는 시간의 숨결을 이어가며 한 편의 아름다운 영상을 창조해내는 일은 매력적인 작업이다. 문득 집 안에 있다는 그의 작업실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사이먼은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 허락할 수밖에 없단다. 최근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곳곳에 기밀문서가 많은 까닭에 보안은 필수라고 한다. 마치 영화사 사무실을 보는 것 같은 편집 장비와 책상마다 쌓여 있는 책과 영상 테이프, 서류. 1인 다역을 해내고 있는 그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곳이다. 혼자서 일을 한다는 건 장거리 마라톤과 같지 않을까? 속도와 호흡을 스스로 조절하면서 장시간을 뛰는 일은 흔히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들 한다. 함께하는 동료가 있거나 호흡을 조절해주는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15년 동안 지속해온 그의 의지력이 부럽기만 하다.
“당연히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럴 땐 언제나 주방으로 오죠. 여기 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와인을 마시면서 피오나와 함께 얘기도 하고, 직접 요리도 해요.” “남편은 요리를 잘 해요. 한국 요리도 잘 먹고요.”


3 게스트 룸인 이곳엔 갖가지 동양적인 소품들이 놓여 있어서 영국인 손님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는 곳이다. 게스트 룸이라는 소개에 애너벨은 ‘아무도 여기서 잔 적이 없다’고 ‘진실’을 폭로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류정숙 씨가 한국을 그리워하는 아련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 요리 얘기가 나오니 수다가 길어진다. 한국에서 먹어봤던 음식 얘기까지 하면서, 서로 과거의 추억을 더듬느라 옆에 지켜선 사람은 뒷전이다. 급기야 듣는 이의 침샘마저 자극시킨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이먼과 류정숙 씨가 따로 또 같이 주방을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서로의 음식 문화가 어우러지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국제결혼한 여자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김치 냄새를 싫어한다는 외국인 남편들 얘길 듣게 된다. 서로의 문화를 100%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그들이 결코 배우자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후각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런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한국 음식도 만들어보지만, 결국 제가 만들면 퓨전 음식이 돼버려요. 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정통 음식보다 그런 음식을 만들면 더 재밌어요. 피오나도 제 요리를 좋아하고요. 그래서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서 제가 직접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도맡아 한답니다. 피오나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죠. 이번 주는 수요일인가?”
부러움 반, 질투심 반, 묘한 기분이 고개를 든다. 부부로 산다는 건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서로의 생김새나 언어,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지만 이들도 분명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 10년을 보낸 결혼 생활에도 서로 연인처럼 속삭이듯 얘기하는 사이먼과 피오나. 자연스럽게 서로를 닮아가며 평온한 일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오늘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5 화장대에 놓여 있는 액세서리 걸이 하나에서도 안주인의 센스가 엿보인다. 집 안 곳곳의 인테리어는 모두 류정숙 씨의 감각이다. 결코 화려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으면서 세련미가 돋보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