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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첼리스트 양성원 씨 음악엔 매혹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삶엔 섬광 같은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베토벤의 음악, 아프게, 그립게, 아쉽게 하는 삶의 통증으로부터 우리를 어루만지는 바흐의 음악. 첼리스트 양성원 씨는 바흐의 넓음과 베토벤의 깊음을 사랑한다. 그 흔한 크로스오버 음반 하나 낸 적도, 대중의 상상을 향해 미친 듯이 확장된 적도 없이 바흐처럼, 베토벤처럼 평생토록 넓고 또 깊게 음악과 연애하고 싶어한다. 영혼을 쓰다듬고 역사를 초월하는 힘이 음악에 있음을 믿는 신실한 음악가의 이야기다.


‘아카라카’ 함성이 스며 있는 연세대 노천극장에 앉아 그가 첼로 현을 고르고 있다. 소요 속의 고요.

오래된 치즈 같은 푸르스름한 빛깔이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새 한 마리가 공기층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고, 갈 곳이 멀리, 마음 또한 멀리 있기에 슬프다고 생각하던 그때, 목멘 듯한 첼로 선율이 들려왔다. 나무즙처럼 고요하게 솟아나는 그 음악을 듣자니, 오늘은 이 세상, 참 좋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는 그렇게 저속으로 촬영된 사진처럼 다가왔다. 바흐 시대를 추억하게 하는 선율과 함께.

첼리스트 양성원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어봤다면 ‘고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입김이 유리창을 덮듯 조금씩 차오르는 고요. 첼로의 활과 네 줄의 거트 현絃(철선이 아닌 양의 창자를 건조시켜 만든 현)이 부딪치며 격정적으로 몸을 섞는 소리, 지판을 오르내리는 손가락과 그의 거친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긴, 그래서 더 고요하게 만드는 소리. ‘아카라카’ 함성이 갈라진 벽 사이로 스민 연세대 노천극장에 앉아 그는 바흐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첼리스트 양성원. 첼로의 거장 필립 뮬러와 야노스 슈타커를 사사한 솔리스트. 유태계와 비견될 만큼 탁월한 한국계 연주자를 발견하는 게 로켓 발사처럼 친숙한 일이 돼버렸지만, 그럼에도 그의 활약은 우리에게 구호물자 같은 선물이었다. <그라모폰Gramophone>(영국에서 발행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음악 평론 잡지)의 ‘에디터스 초이스’와 ‘크리틱스 초이스’로 선정되고, 파리 샬레 가보우나 뉴욕 카네기 홀 같은 유수의 공연장에서 국제적인 솔리스트로 우뚝 섰다는 기별이 그런 것들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연주 여행을 감당하며 연세대 음대 교수로서의 삶도 이뤄내고 있는, 두 아이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10년차의 가장. 자기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기에 저토록 마를 수 있는 건가, 싶도록 홀쭉한 남자. 그리고 물정에 통달한 척하지 않아 더 마음이 가는 1967년 양띠생…. 어쩌면 인생은 사는 것보다 설명하는 게 더 어렵다. 이 사람의 삶의 목록을 원고지 몇 장으로, 그 위에 끄적이는 프로필만으로 섭렵하는 건 무모한 짓이 아닐까.


(왼쪽) 방 두 곳을 항온 항습과 방음 시설이 갖춰진 연습방으로 만들었다. 이 연습방에서 그는 매일 아침 너덧 시간의 연습을 한다. 
(오른쪽) 외국 생활을 오래 한 탓에 한국적인 물건과 오래된 것에 대한 탐닉이 남다르다. 가구도 모두 아내의 친정어머니가 쓰던 것들인데 세월의 더께가 쌓여 더 고운 물건들이다.

베토벤의 격정처럼
“일곱 살에 첼로를 시작했지만 난 음악가가 될 거다,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아버지(서울대 음대 교수와 프랑스 말메종 국립음악원 교수를 지낸 바이올리니스트 양해엽 씨)가 당신 연주회는 물론이고 다른 이의 연주회에도 우리 4남매를 잘 데리고 다니셨죠. 연주가 끝난 뒤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치면서 기립박수를 칠 때면 난 혼자 앉아 ‘왜 좋지?’라고 생각했어요. 깜빡 졸다 깨어나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괴로워하던 꼬맹이였죠. 야노스 슈타커의 연주회 때 그 꼬맹이에게 기적이 일어났는데, ‘나도 저런 소리를 내야지’라는 마음이 생긴 것이죠. 십 몇 년 후 바로 그 야노스 슈타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기억은 우리 집이 창덕궁 담에 맞붙어 있어서, 창덕궁 숲에서 구슬 따먹기, 제기차기, 축구까지 하며 놀다 집에 돌아가면 궁하고 맞닿은 베란다에서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습하던 풍경…. 우리 형은 13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파리고등음악원에 입학할 정도로 바이올린을 잘 했고(그의 형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 씨다. ‘그의 자전거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는 카피의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던). 음악을 잘 할 수 있는 백그라운드이긴 하죠? 하하. 이젠 첼로를 알게 된 걸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대학원 졸업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서 뉴욕에서 방황할 때도 첼로는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너무 힘들어서 첼로를 방 안에 콱 처박아 둘 때도 있었지만, 하루도 못 가 다시 꺼내 연습하곤 했습니다.” ‘습니다’ 체의 말투가 주는 정중한 부드러움에 물에 풀린 티슈처럼 마음이 풀린다.

“매일 아침 여덟 시 반부터 너덧 시간씩, 이 연습방(살고 있는 아파트의 방 두 곳을 항온 항습과 방음 시설이 갖춰진 연습방으로 만들었다)에서 연습해요. 음악은 메워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항상 바뀝니다. 연습할 때마다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지요. 운지(손으로 코드를 잡는 것)나 보윙(활 쓰는 법)도 달라집니다. 일부러 바꾸는 것도 아닌데 찾는 과정에서 새것이 보입니다. 그렇게 껍질을 벗다 보면, 때론 지구가 천천히 돌아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하루가 아쉽게 흘러가요.” 하긴, 일요일 오후 자전거를 타듯 음악을 할 순 없을 것이다. 루빈스타인도 말하기를 90세까지 연습해도 끝이 없다고 했다. 모든 걸 던져야 실마리를 조금 내보이는 음악의 이기적인 힘 때문일까.


(왼쪽) 역시 어머니가 쓰던 물건인 중국 병풍. 앞뒤로 입체적인 부조 형태의 장식이 붙어 있다.
(오른쪽) 한국적인 것에 대한 애착은 이 자개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양 앤틱풍의 가구와 한국적인 모드의 다정한 조화.

연주자 양성원의 세상은 시간 속에 갇힌 삶 같다. 그는 버릇처럼 10년 후를 계획한다. 20년 전 처음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며 난해한 구조에 애를 먹고 나서, 매년 독주곡이든 실내악곡이든 교향곡이든 베토벤을 연주하기로 마음먹었고 해를 거르지 않고 작품을 섭렵했다. 그 20년 후, ‘첼로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 음반(EMI 발매)을 세상에 내보냈다. 음반을 발표하자마자 4시간 동안(베토벤의 영적인 세계가 담긴 후기 소나타 두 곡을 위해선 연주자도 관객도 음악을 준비하고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중간에 한 시간의 휴식시간을 두었다) 전곡을 내달리는 음악회도 치러냈다. 얼마 전부터 한강 둔치에서 하루 5㎞씩 뛰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10개년 계획’의 하나다. 이 거리에 익숙해지면 1㎞씩 늘리고 또 늘려 10년 안에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싶단다. “장기적인 계획을 짜놓는 게 살아가는 원동력 같아요. 음악을 공부하는 건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을 때가 많아요. 역사를 훑다 보면 ‘내일’이 내일일 수도, 10년 뒤일 수도 있잖아요. 음악, 곧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시간을 보는 눈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왼쪽) 양성원 씨가 사랑하는 오래된 스피커, 어머니가 물려주신 갓 함, 화가 신수희 씨의 회화.
(오른쪽) 오래된 뒤주 위에는 터키 블루 스톤으로 장식된 촛대를 올려놓았다.

바흐의 고요처럼
짜고 짜서 더 이상 한 방울도 짜낼 게 없는 것처럼 모든 걸 음악에 쏟아내는 삶인 줄 알았는데, 또 그만큼의 안식도 있다. 하긴 음악이 매일 그렇게 덮어누르기만 한다면 얼마나 버겁고 지겨운 인생일까. “난 먹는 것에 취미가 많아요. 대학교 다닐 때 주려서 그런가? 하하. 대학원 때 외식할 돈은 없고, 또 요리하면서 마음의 여유도 좀 갖고 싶고 해서 일주일에 세 번씩 친한 친구들과 요리를 했어요. 2학기가 시작된 8월 마지막 주부터 11월 중순까지 하루도 똑 같은 메뉴를 먹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재미나게 요리해서 먹었어요. 요리는 생각의 틀을 깨게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칼로 써는 건 모두 기계에 맡겨요. 연주자의 무기인 손을 베거나 다치면 큰일이니까.” 그는 ‘취재’라는 명목으로 들이닥친 객을 위해 샬롯 소스를 얹은 새우 구이, 봉골레 소스를 진하게 졸여낸 이탈리아 북부식 파스타를 바람의 속도로 요리했다. 예술가의 대접이라면 염분 없는 국물도 맛나는 법인데, 이렇게 근사한 식사를 앞에 두니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여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르고뉴 와인을 한 잔 곁들이면! 술배가 작은 내가 ‘원샷’ 안 해도 되니까,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는 시간을 내주는 술이어서 와인이 좋아요. 특히 맛이 상쾌하고 끝이 탁 올라가는 느낌의 부르고뉴 와인. 파리에서 뮤직 페스티벌이 열릴 때 부르고뉴 지방을 지나가게 되면 와인 좀 사두었다가 몇 년 후에 친한 친구들과 나눠 마시는데, 그게 참 좋아요.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건지, 와인 마시는 자리를 위해 준비한 몇 년의 시간, 그리고 친구들이 내게 내준 두세 시간을 좋아하는 건지 혼동될 때도 있죠.” 그러고 보면 음악가 가운데는 미식가가 많다. 관객의 환호 말고도 위안은 필요하니까.


1 그가 준비한 요리는 샬롯 소스를 얹은 새우 구이, 봉골레 소스를 진하게 졸여낸 이탈리아 북부식 파스타.
2 숱하게 들르는 외국 손님들을 위해 그의 아내가 만들어내는 근사한 테이블 세팅. 한국적인 무드의 모시 테이블 클로스와 서양 식기를 조화시킨다.
3 그가 치열한 삶 사이에 찍는 쉼표는 바로 요리다. 아빠가 만들어주는 특제 파스타는 주말 오후 아이들의 환호성을 자아낸다.

열한 살 때 온 가족이 파리로 떠나 너무 어릴 때부터 다른 나라에서, 다른 주소에서 살기 시작한 뒤로, 그는 줄곧 떠나 있었다. “올해만 해도 2월엔 아프리카, 3월엔 일본, 5월엔 필리핀, 6월엔 프랑스… 이렇게 공연으로 분주한 음악가의 삶은 어떤 면에선 집시 같은 라이프라고 생각돼요.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집시 같은. 하지만 나는 그런 점에서 행복하죠. 집이 있으니까. 가족이 제게 가까이 있으니까. 언제나 그 힘을 느껴요. 그래서 난 ‘행복’은 곧 ‘집’이라고 생각해.” 십계명에 철저하리라 다짐하는 것 같은 그의 삶에 가장 큰 위로는 10년차 동지인 아내. 그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의 서문에 ‘매번 실험 세션 동안 항상 경청해주었던 아내에게 특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라고 썼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 김은식 씨는 첼리스트 남편 양성원 씨의 음악에 대한 가장 정확한 조언자이자 엄정한 비판자다. 그리고 또다른 위안은 두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 몰입해 찍는 사진…. “2월에 아프리카로 연주 여행 갈 때 가족이 함께 갔는데 그때 찍은 파도잖아요. 이 풍경 찍는 데 두 시간 걸렸어요. 참, 이 사진 어때요? 언젠가 여름날 아침 햇살 아래 첼로를 두고(원래 악기는 햇빛 밑에 두지 않는데 그날 햇살이 너무 어여뻐서) F홀을 찍었어요. ‘지오반니 그란치노’라는 메이커가 그 안으로 들여다 보이는데 내겐 좀 다른 울림이더라고요. 내 여행의 동반자가 바로 이 첼로죠. 1697년에 만든 악기가 아직도 내 손에서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 첼로를 만든 나무는 그보다 2, 3백 년 전 나무일 것이니 5, 6백 년 전의 시간이 내 품에 안겨 있다는 것. 멋진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 악기를 소유하는 건지, 이 악기의 한 세대를 거쳐 가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악기가 내게 주는 위로는 돈으로 셈할 수 없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협연해야 할 땐 세컨드 악기를 챙겨 가기도 해요.”

무엇보다 큰 위로는 바로 바흐의 음악.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완주해 음반도 냈다. “내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때부터 어려운 일을 접하거나, 내 연주에 실망해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면 바흐 모음곡을 연주했어요. 훨씬 느린 템포로 곡을 연주하며 청력을 집중하죠.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면, 몸과 마음이 깨끗이 닦인 것 같아지면서 음악은 나에게 삶이 엮어놓은 모든 일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법을 선사합니다. 내게 이 경험은 청각이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기도 같은 종교의식이나 다름없지요. 쓰러진 나를 일으키고 다시 세상 밖으로 보내니까요. 한 사람 안에 어떻게 저렇게 넓은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넓혀갈수록 더욱 더 넓어지는 세상이 바로 바흐죠.” 그는 3년 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음반에 담았다.


1 그의 또다른 위안은 바로 사진이다. 몰입하는 그 시간이 즐거워 찍기 시작한 사진은 이제 준 프로급이 되었다. 2월에 아프리카로 간 연주 여행에서 찍어온 것들.
2 연습방, 학교, 해외 공연장 등에서 그와 함께하는 녹음기.
3 1697년에 만들어진 그의 악기 ‘지오반니 그란치노’. 당당한 헤드 부분이 참 마음에 들어 역시 사진으로 담아봤다.
4 어느 여름날 아침 햇살 아래 F홀을 두고 찍은 사진. 그에게 큰 울림을 준다고 한다.

음악가들은 50, 60세가 절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80세가 되어서야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지만, 불운하게도 그땐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병일 수도 있으니. 시간의 존재를 느낀 채 미래, 10년 뒤의 미래를 측량해 두고 있는 그, 첼리스트 양성원 씨의 50대는 어떠할까. “10년 뒤의 내 꿈이요? 지금은 그냥 내가 첼로 소리를 내고 있지만, 언젠가 내 몸에서 소리가 절로 우러나오길 꿈꿉니다. 좋은 소리는 그렇게 악기와 연주자가 정을 통하고 혼을 나눠야 나오는 것이지요. 자기의 혼을 바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의 혼이 흔들리기를 바랄까요.” 10년 뒤를 말하는 그는 막 고해를 마친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과연 음악엔 매혹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그가 음악을 통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그걸 이해하려면 그의 음악 앞에 고요히 귀 기울여야겠지. 그를 만나고 온 날 밤, 그가 연주한 바흐를 다시 들었다. 누군가의 등에 기댔던 순간의 그리운 냄새가 훅 끼쳐 오는 것 같았다.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인 그가 연세대 윤주용홀에서 학생들과 레슨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훌륭한 연주자가 좋은 스승이라는 신념으로 좋은 연주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