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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같은 집에 사는 한옥 같은 여자, 패션 디자이너 김지해 만질 수 있는 내 꿈 옷
‘한국인 최초 오트 쿠튀르 입성’이란 타이틀로 더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김지해 씨. 그가 종로구 가회동의 5백 년도 더 된 한옥을 프랑스식 ‘메종’으로 고치고 그 안에 깃들었다. 오로지 손으로 옷을 짓는 그는 오로지 손으로 다듬어 지은 이 집처럼 ‘만질 수 있는 꿈’의 옷을 짓고 싶다. 곧 여름이 오고 이 집 배롱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배롱꽃 향기가 옷에 가득, 꽃 그림자도 옷에 가득할 것이다.


지해 오트쿠튀르의 대청마루는 통유리창으로 벽처럼 막혀 있는데, 민화를 전사 프린트해서 붙인 통유리창이 그림처럼 근사하다. 낮의 햇빛이나 밤의 인공 조명이 이 유리창에 비쳐들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만들어진다.

서울은 지쳐 보였다. 도시 전체가 구약의 ‘욥기서’에나 나옴직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른 것 같았다. 천지에 가장 중한 건 ‘성공’ ‘성공’ ‘성공’이라고 외치는 정치인들과, 세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숨 넘어가는 보통 사람들의 도시. 그 한복판, 종로구 가회동의 골목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흐름이 순한 골목길을 돌아들며 이런 풍경에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오해도, 오만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 생각할 즈음, ‘종로구 가회동 一의 一九二’라는 나무 명패가 눈에 박혔다. ‘Ji Haye Haute Couture(지해 오트쿠튀르)’라고 도안화된 간판이 도시 한옥의 대문 귀퉁이에 매달려 있었다. 드럼통에 뿌리 내린 연산홍 가지를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때, 김지해 씨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친척처럼 친숙한 얼굴, 무엇엔가 헌신한 자의 눈빛, 볼에 걸친 피로…. 그는 좀전까지 다음 쇼에 내놓을 웨딩드레스를 손보던 중이라며, 큰숨을 몰아 쉬었다.


(왼쪽) 은은히 스며드는 햇살을 맞으며 김지해 씨가 스케치 작업 중이다. 5백 년도 더 된 한옥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대청마루 또한 그때 손본 곳이다. 강원도 노인들이 일 년 동안 다듬은 목재를 이어, 옷을 거는 행어와 낮은 전시대를 만들었다. 가구는 김지해 씨가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것. 
(오른쪽) 흙 대신 데크를 깔고 나무 벤치를 만들었다. 그 마당 가운데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 씨가 “이 집 마당에 백일 동안 백일홍이 피면 지해 드레스만큼 아름다울 거야.”라고 말한 그 배롱나무다. 이 마당에선 가끔 파티도 열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김지해. ‘한국인 최초 오트쿠튀르 입성’이라는 수식이 관용어처럼 굳어진 디자이너다(‘고급 맞춤복’을 뜻하는 오트쿠튀르Haute Couture는 디자이너들이 구성한 의상조합으로, 세계적인 일류 디자이너들의 고급 주문 여성복을 뜻한다.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장인의 손맛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예술 작품’으로 불리며 디자이너 혹은 그 브랜드의 자존심이 된다. 기성복 컬렉션인 ‘프레타 포르테’와 대별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오트쿠튀르 디자이너를 ‘쿠튀리에’라고 부르는데, 현재 활약하는 쿠튀리에로는 디올, 샤넬, 발렌티노 등이 있다. 한 벌 가격이 최소 1억~2억 원인 오트쿠튀르의 고객은 전 세계를 통틀어 1천 명 남짓밖에 안 된다고 한다). 2001년 1월 오트쿠튀르의 초청 멤버가 된 후로 수차례 오트쿠튀르 쇼를 펼치면서 그는 양명의 터전 위에 섰다. 그를 두고 <르 피가로> 지는 “겐조와 파코 라반의 공백을 메울 디자이너”라고, 세계적인 패션 그룹 LVMH는 “차세대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라고 찬양시를 썼다. 견·모시·노방 소재에 ‘깨끼’ 같은 한국적 바느질법을 쓴 의상이 그의 주무기라고 매거진들은 입 모아 설명한다. 이 아담한 한옥은 ‘한국인 최초 쿠튀리에’ 김지해가 한국에 만든 첫 번째 ‘메종Maison(옷을 전시·판매하는 단순한 부티크 개념에서 벗어나 디자이너가 옷을 만드는 공간이자, 고객이 방문해 디자이너와 대화하는 디자이너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이다.


1 곧 열릴 웨딩드레스 쇼를 준비하고 있는 디자이너 김지해 씨.
2 청기와의 선을 담고, ‘쪽빛’이라는 한국 고유의 색·구김이 더 멋스러운 모시 소재·장인의 매듭을 이용해 만든 지해 쿠튀르의 드레스. 이처럼 그의 오트쿠튀르 의상은 손의 수고로 만들어지는 옷이다. 바로 한복처럼.
3 단청 기둥과 민무늬의 목재 기둥을 포개어 용의 몸짓을 만들어내려고 한 실내. 의상은 올해 1월에 열린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드레스들이다. 지해 쿠튀르 02-3675-7030

한옥 같은 옷, 한복 같은 집
마당에 들어서자 평상 같은 나뭇바닥이 깔려 있고, 지붕 위로 조각 하늘이 나 있고, 그 ㅁ자 처마 선이 액자가 되어 하늘 풍경이 담긴다. 돌고래처럼 바다에 반쯤 몸이 잠겨 있는 기분으로 거닐게 되는 묘한 마당이다. 효율성과 속도를 숭배하는 신세계 시민인 우리에게 이 집은 어딘지 낯설다. 도회적 의미로 미끈하지 못하면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패션 월드의 사람들에게 이 한옥은 더 생경하다. “이 집 같은 옷을 짓고 싶었어요. 왠지 어수룩한데 만지고 싶어지는 그런 집, 알아봐 달라고 먼저 말 건 적은 없지만 슬몃슬몃 눈이 가는 그런 집, 그런 옷. 한옥 같은 옷, 한복 같은 집. 3년이나 걸려 이 집을 발견했는데, 5백 년도 더 된 한옥이래요. 왕이 죽으면 버선발로 뛰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관료의 집이었다고도 하고, 3대 전엔 장관집이었다고도 하고. 처마끝 보면 검소한 양반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 오래된 작은 한옥을 프랑스식 메종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 집을 디자인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 씨는 “이 집 마당에 백 일 동안 백일홍(배롱나무 꽃)이 피면 지해 드레스만큼 아름다울 거야”라고 화답했고, 쿠튀리에 김지해의 아름다운 메종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간직해 온 몇 백 살짜리 단청 기둥을 내놓으며 “이게 김지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강원도에서 한옥 목재만 다듬는 노인들이 일 년간 만든 나무 기둥, 고려 청자 빛깔을 내고 보일러 열선을 따라 산수화처럼 얼룩이 생기게 한 시멘트 바닥, 민화를 전사 프린트해 붙인 통유리창, ㄱ자로 꺾인 실내를 따라 흐르다 가봉실에서 끝나는 ‘용’ 행어(용의 몸뚱이가 실내를 따라 움틀거리다 가봉실에서 불을 뿜는 모습을 단청 기둥으로 된 행어로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알아봐 달라고 말 걸지 않지만 슬몃슬몃 눈이 가는’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스며들었다. “모두 사람 손으로 다듬은 집이에요. 오트쿠튀르도 바로 ‘손의 수고, 손의 사고’로 만들어내는 옷이죠.”


1 곧 시작될 웨딩드레스 쇼를 위해 모델과 피팅 작업 중인 디자이너 김지해 씨, 그의 파트너 펠릭스 씨.
김지해 씨는 펠릭스 씨를 두고 “일에 있어서 내 반쪽”이라고 말한다. 왼쪽 마네킹이 입은 드레스는 올해 초 열린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에서 ‘유미 카츠라 by 지해’의 이름으로 선보인 드레스. 일본의 유명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인 유미 카츠라가 자신의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아 달라고 의뢰해 시작된 일이다. ‘유미 카츠라 by 지해’의 웨딩드레스는 서울의 지해 쿠튀르 메종에서도 만날 수 있다.
2 ㄷ자 한옥을 고쳐 오트쿠튀리에의 아틀리에 겸 쇼룸으로 만들었다. 천장 라인을 타고 흐르는 나무 기둥들은 용의 몸뚱이를 형상화한 것으로 실내를 따라 흐르다 가봉실에서 불을 뿜는 형상으로 표현돼 있다.
3 대청마루로 오르는 뜰 한쪽에는 프렌치 스타일 대형 거울과 빨간 소품이 놓여 있다. 
4 메종 안에는 프랑스식 미니 카페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파리의 티 하우스 ‘마리아주’에서 조제해준 차를 맛볼 수 있다. 
5 장식 오브제로 놓아둔 등배자(여름에 옷이 땀으로 젖는 것을 막기 위해 걸치는 등나무로 만든 배자). 이번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에서 의상 액세서리처럼 쓰기도 했다.

쿠튀리에 김지해의 옷은 처마나 지붕에서 비롯된 한복의 곡선, 마·모시·비단 같은 한국 전통 소재의 질감, ‘보라, 옥빛, 꼭두선이’처럼 화려하면서도 다소곳한 컬러로 요약된다. 금박과 은박 기법, 색동을 수트에 활용하는가 하면 전통 매듭을 드레스에 조화시키고 깨끼 바느질 기법(투명한 옷감으로 옷을 만들 때 올이 풀리지 않게 하면서 선이 살게 하는 바느질법)을 재킷과 바지, 칵테일 드레스에 풀어낸다. 디테일에 한국적인 실루엣을 쓰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은 아주 서구적이다. “내 드레스의 모티프는 늘 우리 벽화에서 찾아요. 하늘에서 피리 불고 내려오는 무희의 선, 기와의 여유 있는 선, 여인의 치마폭 속 같은 한국의 산이 내 옷에 담기죠. 구겨지는 단점이 있긴 해도 모시의 구김을 통해 드러나는 실루엣은 한국인인 나만이 표현할 수 있어요. 모시의 짜여진 마디마디를 보면 그걸 짠 이가 행복했는지, 속상했는지 다 알 수 있어요. 한국 모시의 폭이 왜 어깨 너비인 줄 아세요? 인간의 마음을 담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폭이기 때문이죠.” 한옥을 닮은 그의 옷에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부인 티퍼 고어 같은 유명인사가 몰두하면서 그는 환희의 면류관을 쓰게 됐다.

1 정독도서관 근처에 자리한 또다른 아틀리에. 프랑스에서 가져온 장식 소품으로 공간을 연출했다.
2 이 아틀리에엔 펠릭스 씨가 그린 회화 작품이 놓여 있다. 그는 컨템포러리 아트 디렉터로 활동한 경험도 있다.
3 가회동 지해쿠튀르 메종의 미니 카페.

옷과 열애하는 여자
그렇게 성층권에 올라서기까지 그가 보낸 고초의 시간은 길었다. 일본으로 문학 유학을 떠났던 그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치마 입은 남자’는 김지해 씨의 세상길을 바꿨다. 두꺼운 치마에, 옷핀이 수천 개 꽂힌 윗도리에(잉글랜드 전통 의상 같은) 가죽 장화를 신은 그 남자는 김지해 씨에게 ‘저것도 옷이구나, 나도 내 삶의 틀을 저렇게 깨뜨릴 수 있는 옷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벼락 같은 깨달음과 충동을 안겨줬다. 그 후로 요지 야마모토도 다녔다는 문화복장학원 학생이 됐고, 2년 만의 ‘조기 졸업’ 후 일본 의류회사의 프랑스 지사 직원으로, 일 없는 프리랜서로, 콤 데 가르송과 일하는 프리랜서로 청춘을 보냈다. 그 청춘의 칸에는 동양인 무명 디자이너라는 올무가 따라붙었다. 이름을 내건 컬렉션에 대한 갈망과 좌절로 괴로워하던 그는 히말라야로 떠났다. 하루에 300m씩 3개월 동안 에베레스트 6300m 고지를 올랐다. “중간쯤 올랐을 땐데, 티베트 할아버지가 소나무 아래서 햇빛을 받으며 옷을 깁고 있었어요. 가슴에 둥하고 북소리가 울리데. ‘저렇게 평온한 맘으로 옷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보여주기 위한 옷, 날 찾아오라고 애걸하는 옷만 만들었구나. 나도 산처럼 아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찾는 옷을 만들어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줬죠.” 그는 바로 한국에 돌아와 6개월 동안 수많은 한국의 장인을 만났다. 평생 한복에 금박만 찍는 장인, 스님이 입는 가사만 만드는 장인, 깨끼의 달인, 모시 짜는 아낙네…. 파리로 돌아가 그 체험을 옷에 담아낸 그는 1997년 ‘지해’란 브랜드로 첫 컬렉션을 열었고, 세 번째 컬렉션 이후에 오트쿠튀르에 입성했다.

마당에서 중문을 바라봤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 씨가 간직했던 목각 현판을 붙인 중문은 뜻밖에도 자동문이다.

그 후로 그는 혼곤한 연애 대신, 함께 솥단지를 걸고 함께 날마다 벌거벗고 자는 결혼을 택하는 대신, 일과 혈투 같은 열애를 택했다. 하루 20시간 일하며, 새 옷을 지을 땐 산모 입덧하듯 하고, 단추 하나 잡고 3백 장의 파지를 내면서. 이 옷이 어떤 방법으로 몸과 교통할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남들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불면에 강한 거. 그리고 외롭다고 잘 안 느끼는 거. 난 옷을 만들 때 최고의 오르가슴을 느껴요. 남자도 이런 희열은 못 줄걸. 하지만 인간 김지해는 인간적이지 않아요. 인간 김지해에게 시간을 못 쓰니까. 보통 사람이 하는 걸 안 하고, 못 하고 사니까. 암 걸린 엄마를 자주 보러 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일만 하고 있어요. 엄마 못 보는 슬픔, 엄마의 아픔도 내 옷에 다 드러날까?” 엄마 이야기에서 그는 허물어지는 표정을 지었고, 달걀 속껍질처럼 엷은 막의 외로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일상 밴다이어그램의 나머지 파이들을 줄이며 사느라 ‘그 여자 독하다’란 평판과, 한국 디자이너 사단의 텃세가 그를 뒤따라 다니고 있다. 그리고, ‘일에 있어선 반쪽과도 같은 사람’ 펠릭스 부브코자가 그의 곁에 남았다. 20여 년 전 ‘지해’의 옷을 처음 보고 반해 그의 지지자가 된 펠릭스 씨는 홍보·요리·작업실 청소·컬렉션 준비·의상 판매·매니저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연인 사이로 오해하는 이도 많지만 연인 관계였다면 이렇게 오래 함께 일하지 못했을 거란다).

(왼쪽) 지해 쿠튀르의 컬렉션 사진들과 그 의상을 입은 유명인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 입구.
(오른쪽) 마당에는 프렌치 스타일로 세팅된 테이블이 놓여 있다.

옷을 만드는 일이 재물로만 살아가는 자들의 뻐김을 위해서라면 한 근에 천 원 하는 속옷 더미들과 무엇이 다른가. “오트쿠튀르는 입을 수 없는 옷이 절대 아니에요. 만질 수 있는 꿈이죠. 우리 엄마가 한여름에 외출하려면 열흘은 족히 준비했어요. 빨아서 풀 매기고, 다듬이질하고, 다리고, 구겨질까봐 못에 걸어놨다가 외출하기 직전에 손으로 한 번 툭툭 털어 입고. 외출 준비를 파티에 가기 위한 즐거운 의식처럼 치르던 우리 엄마는 오트쿠튀리에 정신을 심어준 첫 스승이죠. 엄마의 외출 준비처럼, 이 집처럼 ‘만질 수 있는 꿈’을 김지해의 옷에서 보여주고 싶어요.”
지쳐가는 도시 서울의 한 귀퉁이로 돌아와, 가회동에 둥지를 튼 쿠튀리에 김지해(일 년을 삼등분해 서울, 파리, 일본을 오가며 살고 있다). 그의 ‘메종’이 한가히 태고의 마음으로 앉아 있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해도 그는 멈추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여전히 하루 20시간을 일할 것이다. 취미, 일상, 기호 따위의 사적인 라이프와 사적인 스타일은 쿠튀리에 김지해에겐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에게는 패션Fashion이 패션Passion이 되고, 패션Passion이 라이프스타일이 될 뿐이다. 마당의 배롱나무 옆에 서서 방심한 채 활짝 웃는 그를 떠나오면서 어줍잖게 조르고 싶어졌다. ‘수고했다고, 이젠 아무 걱정 말고 잠시 쉬라’고.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