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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을 찾아서] 한옥 짓은 13인의 장인들
여기 13명의 장인이 있다. 나무가 기둥이 되기까지 해와 바람을 맞으며 지내온 수십 년 세월처럼, 한옥에 그리고 전통 건축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행복>에서는 지난 2007년 12월호 독자엽서를 통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과연 독자들은 얼마나 한옥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꼭 알고 싶은 정보는 무엇인지. 설문에 응답한 <행복> 독자 573명 중 무려 78%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옥에 살고 싶어 했고 다양한 궁금증을 전해왔다. 경복궁에서부터 남양주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교육관, 경주 한옥 호텔 라궁 등을 거쳐 전남 장성과 충남 부여, 다시 서울의 북촌에 이르는 긴 동선을 그리며 한옥 짓는 이들을 만났다.

대목 최기영·신응수 씨와 소목 설석철 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인이다. 두 대목은 궁궐이나 사찰 같은 문화재 보수·복원과 큰 규모의 한옥 건축을 겸하며 전통 건축의 계보를 잇고 있다. 설석철 옹은 한옥을 채우는 가구를 전통 기법 그대로 계승해 만들고 있다. 대목 최웅희·박석규·김길성·조전환·송혜종·정영수·홍덕길·문석환 씨는 북촌뿐 아니라 전국을 오가며 전통 한옥을 지금 시대에 맞춰 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서성환 화문장은 손 많이 가는 꽃담을, 박천동 창호장은 한옥에 설치될 창과 문을, 노행용 가구장은 한옥에 들어갈 살림살이를 만드는 장인이다. 다시 태어나도 목수가 되겠다고 말하는 그들의 인생과 연륜을 나무와 흙과 종이에 묻고 혼을 담아 지은 집이 바로 한옥인 게다. 그들과의 동행 취재가 마치 어깨너머로나마 한옥 한 채를 지은 듯 하다면 과장일까. 과연 누가, 어떻게, 우리의 드림 하우스, 한옥을 짓고 있을까.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교육관 공사 현장. 그곳의 배흘림기둥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기운이 느껴지는 최기영 씨를 만났다.

“혼을 불어 넣어 천 년 가는 집을 짓는다” 대목 최기영(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한옥의 뭣을 알고 싶은가?” 다짜고짜 경계의 눈빛으로 묻는 최기영 씨에게서 장인다운 고집과 까탈이 엿보였다. 한옥의 미덕을 묻자, “기자 양반, 잘 적어. 한옥은 세계 최고의 집이야. 풍수지리에 맞게 들어앉은 집의 형세는 봄의 보슬비, 여름 장마, 가을 태풍,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줘, 지붕의 각도, 마루와 기둥의 높이, 창과 문의 폭, 모든 게 사람에게 편하도록 과학적?철학적으로 계산된 것이야, 끓여 마셔도 유익한 송진이 함유된 소나무, ‘생명의 흙’이라 불리는 황토로 지으니 거기에 사는 사람이 건강한 게 당연하지.” 마치 민요처럼 가락을 타고 술술 풀려 나오는 그의 이야기가 청산유수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한옥은 잘 짓고 잘 살면 1천 년을 간다고. 고려 말기의 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이 1천3백 년이나 된 것이 그 증거다.

그처럼 훌륭한 한옥을 제대로 책임 있게 지어내는 것은 대목의 소임. 대목은 집터에 맞게, 기후와 문화에 맞게 집을 해석하고 지을 줄 알아야 한다. 엄청난 태풍의 중국, 습한 기후와 지진의 일본, 산이 많고 좁은 한국이 각기 다른 집을 탄생시켰듯이. 때로는 대목의 재량을 넘어, 시대가 집을 결정하기도 한다. 1백 년 이전의 한옥이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데 반해 일제강점기의 한옥이 제멋대로 왜곡되고 부실하게 지어진 것처럼. 현대적 설비가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한 지금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훌륭한 한옥을 만들 수 있는 시대라 본다. 그 같은 믿음으로 그는 질 좋은 목재를 찾아 캐나다에 막 다녀온 길이었다. 경계를 풀고 긴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멋들어지게 써서 선물로 주었다. 한옥에 대해 잘못 쓰면 잡지 회사를 통째로 동해에 갖다 넣겠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고 말이다.

최기영 씨는 현재 부여의 백제재현단지, 남양주의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교육관, 경주의 월정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이자 동국대학교 초빙 교수로, 얼마 전에는 한 증권회사의 TV 광고에 등장해 “이음새 하나가 천 년을 결정하는겨”라는 소신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경북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태조 왕건 사당· 이화학당 등의 보수, 오대산 상원사 신축 등을 지휘한 바 있다.


경복궁 복원 현장에서 신응수 씨를 만났다. 그는 일을 하면서 좋은 추녀 재목을 찾았을 때처럼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없다고 했다. 지금 그는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광화문 복원에 사용될 나무들을 치목(마름질)하느라 분주하다. 17년째, 이곳 경복궁을 집 삼아 살고 있다고 한다. 신응수 씨가 입은 오렌지색 니트와 아이보리 니트 집업 점퍼는 모두 란스미어 제품.

“한옥은 수만 개 조각품이 이룬 한 채” 대목 신응수(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지난 11월 말, 지름 94cm, 높이 20m, 수령 150년 된 소나무가 신응수 씨의 지도 아래 몇 가지 의식 뒤 베어졌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져 치목 과정을 거친 뒤 경복궁 광화문 복원 시 기둥으로 사용될 가장 굵은 나무였다. 신응수 씨는 이렇듯 적게는 25년, 길게는 300년 정도의 수령을 지닌 나무를 재료로 삼는다. 그가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문화재 복원. 그러면서 때때로 한옥을 짓기도 한다. 그가 짓는 한옥들은 북촌의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며, 철저히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용인 호암장. 고 이병철 회장의 별장으로 호암미술관 옆 230여 평 대지에 들어선, 정원이 아름다운 전통 한옥이다. 어려서 목수 일을 시작할 때는 3년 가까이 밥만 먹고 돌아서면 밤낮 없이 대패질을 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일을 배웠다고. 그는 1975년 수원성 장안문을 복원하면서 도편수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해 뜰 무렵부터 해가 져서 먹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목 일을 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전통 건축에만 몰두해온 것이다. “한옥은 시간으로 짓습니다. 하나하나가 조각이고 그것이 수천, 수만 개 모여 하나의 집을 완성하죠.” 목수란 결국 나무를 다루는 사람. 그래서 좋은 나무에 욕심을 갖지 않는 이가 없다. “처마 선이 잘 나왔을 때처럼 기쁠 때가 없어요. 인위적으로 만든 형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긴 나무를 찾은 뒤 추녀 재목으로 삼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기술이 발달해 서까래까지 기계로 깎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손이 최고지요.” 그와 함께 세월을 보내온 국산 목재들이 얼마 전 뉴욕으로 실려 갔다. 108평 규모의 대지에 한국 전통 건축을 선보이기 위해. 대목 신응수 씨는 이제 한국의 목수들을 이끌고 세계의 중심에서 한국 전통 건축의 사절단 역할까지 하고 있다.

신응수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 1991년부터 지금까지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흐르는 한국 대목장의 계보를 이어가며 전통 건축 문화재 복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1989년 신축한 청와대 대통령 관저와 1979년 지어진 서울 한국의 집 외에 고 이병철 회장의 자택이었던 이태원 승지원도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나무, 흙, 돌, 종이로 지은 숨 쉬는 집이다”
대목 최웅희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현장을 지키는 최웅희 씨. 그러나 그는 청년 목수 열 명이 안 부러운 베테랑이다. 나무의 질감과 속성을 체득해야 하고, 집의 구조와 공간의 쓰임을 깨달아야 하는 대목은 힘보다는 노련함, 지혜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왜 안 어렵겠어요? 처음 10년쯤 배운 다음에나 조금 자신감이 생겼죠. 지금도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먹으로 형태를 그릴 때는 신경이 곤두서는데요.” 한평생 동안 목수로 살아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한옥만큼은 옛날 방식을 살려 만드는 것이 제격이라고 믿는다. 첨단 시스템과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화려한 아파트가 사방에 깔렸지만, 흙과 나무, 돌과 종이로 만든 한옥이 훨씬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집이라고 생각한다. “한옥은 숨을 쉬는 집이에요. 한옥의 재료인 나무, 종이, 흙 때문이지요. 이들은 표면의 미세한 공기 구멍으로 호흡하면서 유해한 물질을 흡수하고 전자파도 차단해줄 뿐만 아니라 습도까지 조절하죠. 때문에 꽉 막힌 아파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집이에요.” 이처럼 한옥 예찬을 늘어놓는 그도 한옥에 살고 있지는 못하다. 도시보다 시골에 한옥을 짓고 싶은데, 서울이 삶의 터전인 까닭에 아직은 꿈으로 남아 있다. 둥글고 무딘 마디가 잡히고 까맣게 때가 낀 장인의 손을 보니, 좀 더 도시에 머물며 그 믿음직한 손으로 많은 한옥을 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웅희 씨는 열대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수 일을 시작했고 1967년 상경하여 지금까지 한옥 짓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울 우이동의 보광사, 서오릉의 정자, 파주 하동 정씨 사당 등을 완성했고, 북촌 일대의 한옥을 여럿 작업했다.

북촌 한옥 공사가 한창인 현장에서 최웅희 씨를 만났다. 대패와 톱, 목수에게 이처럼 중요한 연장이 얼마나 많겠는가. 반평생을 일해도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연장이고 아무리 좋은 기계도 이들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사람 손이 하는데 다른 게 맛이지” 대목 박석규
단 한 채도 같을 수 없다. 이것이 박석규 씨가 꼽는 한옥의 최고 매력이다. 사람의 손으로 빚은 집. 그는 최근 건축가 황두진 씨가 설계한 한옥을 지으며 그의 수 십 년 목수 인생에서 첫 시도를 해보았다고 한다. 바로 시스템 창호를 사용한 한옥 짓기. “요즘 한옥들은 시설적인 면에서는 아파트랑 별반 다르지 않아요.” 도면과 건축가 없이 척척 집을 짓던 시절과 비교하면 살기에는 많이 좋아졌지만 법적 규제가 강화되어 짓기에는 더 까다로워 진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 도중 박석규 씨는 습관처럼 직각자를 들고 있다. 대목에게 직각자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했다. “바로 이 안에 바닥이 있고 기둥이 있고 지붕이 있어요.” 그는 작업 도중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간격을 찾으라”는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그야말로 목수의 본능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아름다움이 차곡차곡 쌓이고 끼워 맞춰져 온전한 한옥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공사 진행 중에는 사실 작업 반장이나 마찬가지죠. 여기서 현장 진행도 하면서 소목들이 와서 창호 만들고 하나씩 구색 맞추는 동안 나는 대문도 짜다 달고 하죠.” 언젠가는 자신도 한적한 동네에다 한옥 한 채 짓고 살고 싶다는 그는 거친 손과 나무를 느끼고 다루는 섬세한 감각으로 4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복잡하고 좁은 서울에서 벗어나 넓은 공간에 여유 있게 한옥을 짓고 싶어요. 요즘 사람들이 한옥을 찾는 것이 참 좋다가도 이렇게 좁고 복잡한 서울 안에다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네요.”

박석규 씨는 가회동의 쌍희재와 취죽당을 비롯해 여러 채의 한옥을 지었다. 처음 목수 일을 시작할 때는 창호 짜는 소목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북촌 일대에서 생활 한옥의 달인이 되었다. 요즘 그는 대형 한옥, 공공 공간으로서의 한옥을 짓는 꿈을 꾼다. 북촌의 엄격한 규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심도 있다.

박석규 대목의 가회동 공사 현장엔 웃음소리와 나무 부딪치는 소리, 톱질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툇마루에 사용하기 위해 잘라놓은 부재와 그가 직접 손으로 짠 공구 상자가 놓여 있다.

“몸에 좋은 것만 고르고 살펴 짓는다”
대목 김길성

좋은 건 몸이 먼저 아는 법. 한옥도 그렇다. 채광과 통풍을 고려해 터와 방향을 잡고 나무와 돌, 흙으로 집을 지으니 몸에 해로울 게 전혀 없다. 40여 년을 한옥 건축에만 매진해온 이답게 김길성 씨의 한옥 예찬은 그칠 줄을 모른다. “우리 몸에 좋은 걸로만 고르고 살펴 지은 집이 한옥이에요. 집을 지을 때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정말 대단하다는 걸 몸소 체험한다니까요. 게다가 네모반듯한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와는 달리 한옥은 나지막한 처마와 추녀 선 그리고 기와가 멋들어진 운치를 전하니 얼마나 근사해요?” 과묵한 천성조차 한옥에 대한 애정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그간 지었던 한옥 중 대표작 몇 개만 꼽아보라는 말엔 “일평생 한옥만 했는데, 대표작이랄 게 따로 있나?”하고 눙치더니만 한옥의 장점이 뭐냐는 질문에는 끝도 없이 대답이 늘어지는 걸 보면. “사람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잖아요. 한옥은 흙 냄새 맡아가며 흙 기운을 마냥 느낄 수 있는 집이니 몸에 이로울 수밖에요.” 너나 할 것 없이 힘들던 시절, 먹고사는 방편으로 선택한 목수 일이 햇수로 40년이다. 도면이 있을 리 없었다. ‘한 칸에 몇 척’, 이런 식으로 계산해 머릿속에 그린 집을 척척 현실화해냈다. “노하우는 별 거 없어요. 정해진 한도 내에서 제일 좋은 수종을 선택하는 거죠. 우리 육송도 수준이 천차만별이거든요. 그중에서도 우리 옛날 한옥에서 뜯어낸 고재古材가 제일 좋아요. 좋은 고재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달음에 달려가 놓치기 아까운 놈은 미리 사서 저장해두는 거죠.” 한마디로 좋은 것을 보고 고를 줄 아는 눈, 이것이 김길성 씨의 40년 목수 인생을 가능케 한 원동력인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옥은 변함이 없어요. 자연에서 온 그대로 지으니 아토피 같은 게 생길 리 없지요. 최근 한옥이 살기 좋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 아닐까요?”

김길성 씨는 40여 년 경력의 목수다. 그 스스로 가회동에 살며 가회동 일대 한옥을 재건축하는 데 앞장서왔고 무무헌과 같이 보기에도 좋고 살기에도 편리한 한옥들을 두루 지었다. 현재 조선조한옥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김길성 씨는 대목이기보단 연구소장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지금은 겨울이라 그림이 될 만한 현장이 없다며 최근 완성한 북촌의 한 한옥으로 안내했다. 하늘색 스웨터는 빨 질레리, 조끼는 존 스메들리, 팬츠는 갤럭시 제품.


“최고의 연장은 노트북이다” 대목 조전환
조전환 씨의 관심사는 한옥의 현대화다. 이전 경복궁 복원 작업에 참여하면서 ‘유령’이 된 왕의 집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의 집을 만들고 싶어 한옥 살림집을 짓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현대인들이 한옥을 누리기를 꿈꾸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건축 방식을 연구 중이다. 특히 작년에 모습을 드러낸 경주의 한옥 호텔 ‘라궁’은 그의 실험적인 방식이 빛을 발한 프로젝트. “라궁은 모듈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방식으로 완성한 최초의 한옥일 겁니다. 나무를 짜 맞추어 만드는 한옥은 보통 각 부분의 목재를 그때그때 대목이 다듬어 완성하게 되지요. 그러나 라궁은 목재를 표준화하여 기계 작업으로 먼저 준비했고, 이를 한 번에 조립, 시공할 수 있었어요. 이는 건축 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물론 공사 비용을 줄일 수 있어 한옥의 대중화에 도움이 됩니다.”

라궁에 이어 요즘은 골프장 내 한옥 클럽하우스를 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그가 매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는 제1의 연장은 망치도, 대패도 아닌 노트북. 밤마다 노트북과 씨름 중이라는데, 그 안에는 한옥 각 부분의 목재를 샘플화한 그만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 이는 미래의 대목이 한층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줄 것이다.

조전환 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옥 짓는 일을 익혔다. 경복궁 복원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고, 경주에 있는 한옥 호텔 ‘라궁’에 이어, 골프장 내 한옥 클럽하우스를 짓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처마는 높게, 마당은 깊게” 대목 송해종
“한옥은 흙과 돌, 나무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에요.” 정감 넘치는 사투리 억양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한옥의 미학을 논하는 송해종 씨. 좁다란 가회동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는 그는 30년 목수 생활을 이곳 북촌에서 이어온 천생의 ‘한옥장이’다. 사는 곳이 북촌이다 보니 자연스레 ‘전통 한옥 전문 목수’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그는 한옥 짓기가 일인 동시에 즐거움이라고 설파한다. “한옥의 매력은 다소곳한 물매에 있어요. 우리 한옥은 지붕의 선이 단아하고 멋스럽잖아요. 여기에 마당은 낮고 깊게, 처마는 높고 웅장하게 해주는 거죠. 마당을 낮추고 처마를 높이면 그만큼 공간이 많이 확보되니까요. 시대 변화에 맞게 한옥도 바뀌어야죠. 옛것만 고수하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말은 이리 해도 그는 누구보다 전통에 충실하다. 나무와 흙, 돌 이외의 재료는 쳐다보지도 않고 나무도 허여멀건 요즘 나무보다 빛깔이 묵직하고 깊은 고재古材를 선호한다. 결국 그의 말은, 한옥의 정신은 그대로 잇되 실용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뜻인 셈이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들고 남에 있어요.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한옥의 선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한번 보세요.” 덧붙여 한옥은 탄탄하고 내실 있는 집이라 했다. 백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그렇기 때문에 현대적인 실용성과의 접목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송해종 씨는 한옥 건축만 30년째다.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을 비롯, 100평에 달하는 화성 송산의 홍씨 문중 종택, 고양의 유명 맛집 ‘양수면옥’의 누각과 육각정 등 숱한 한옥을 지었다.

최근에 완성한 공간으로 특히 이 집의 마루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송해종 씨.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빨간 브이넥 니트는 라코스테, 갈색 코르덴 팬츠는 빈폴 골프 제품

“한옥은 인연으로 완성된다” 대목 정영수
보기 좋은 육송이 얼기설기 얽혀 지붕을 이룬다. 대들보를 세우고 지붕을 얹었으니 곧 기와가 얹혀질 터. 성북동에서 한옥 상량上樑에 여념이 없는 정영수 대목은 한파에도 아랑곳 없이 현장을 지킨다. “한때는 가구를 만들었었죠. 가구 작업(소목)이 외로운 작업이라면 대목은 여럿이 탁 트인 공간에서 일할 수 있어 좋아요.” 문화재 대목장 기능 보유자인 그는 문화재 복원에도 조예가 깊다. 하지만 최근에는 문화재나 사찰 복원보다 개인 집을 신축, 보수하는 일이 더 많다. 한옥으로 살림집을 옮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변화다. “놀지 않고 일하니 좋죠”라는 무심한 한마디로 최근의 변화에 대한 감회를 토로하는 정영수 씨. 그는 스물둘의 나이로 목수에 입문, 27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일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나무도, 집도 인연이 되어야 만날 수 있어요. 억지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 좋은 나무로 좋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지은 집은 좋은 집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는 처가가 있는 해남 땅끝마을에 내려가 한옥 짓고 살고 싶어요.” 바다와 맞닿은 땅끝마을에 들어설 단아한 한옥. 완벽주의자 정영수 씨의 수십 년 노하우로 지어질 그 집이 궁금해진다.

정영수 씨는 대목 신응수 씨에게 대목 일을 배워 문화재와 사찰, 쟁쟁한 한옥들을 두루 섭렵했다. 완공 당시 가회동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건축가 조주립 씨의 집을 비롯,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북촌 은덕문화원 등을 지었는데, 나무의 결과 선이 제대로 살아 있는 한옥을 짓기로 유명하다.

아직 지붕을 얹지 않은 이곳은 성북동 현장. 정영수 씨는 치목한 나무들을 하나씩 세워 집을 만든다. 아직 지붕이 없는지라 파란 천막만 덮여 있다. 오렌지색 집업 스웨터와 스웨이드 점퍼, 코르덴 팬츠는 모두 갤럭시 제품.

“살면 살수록 참 맛을 알게 된다” 대목 홍덕길
지금도 배우는 자세로 한옥 짓기에 임한다는 홍덕길 씨는 목수 일을 한 지 어느덧 40년째다. 매번 한옥을 지을 때마다 자신의 손길로 만들어낸 지붕이며 들보가 어느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된다는 생각에 늘 신중하게 된다. “설계 도면이 있어도 짓고 없어도 짓는 것이 한옥이죠. 옛날과 다르게 요즘은 설계 도면이 있어야 건축 허가가 나지만요. 도면도 잘 봐야 하고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그저 열심히 만든다며 투박하게 대답하는 그이지만, 기둥이며 들보 사이 이음매를 매만지는 손놀림과 눈매가 누구보다도 예리하다. 특히 기둥과 문틀은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 기둥이 반듯하게 수직을 이루어야 집이 제대로 들어서고, 문틀 각도가 정확하게 맞아야 나중에 문짝과 부드럽게 들어맞는다. 이 문틀 작업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나무 창호는 알루미늄 창호와 달리 습도에 따라 팽창?축소하기에 조금만 실수해도, 계절 따라 사방에서 문이 닫히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옥에서는 무엇보다 나무가 좋아야 한다. 그가 최고의 나무로 치는 것은 ‘소나무의 제왕’이라 불리는 춘양목. 천천히 자라 나이테가 조밀하고 송진을 많이 함유해 무르면서도 질기다. 이제는 귀해진 춘양목 대신 국산 육송을 쓰고 기둥, 들보처럼 굵은 부분은 외국 홍송을 쓴다. 새로 짓지 않고 보수하는 경우, 고재古材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충분히 건조된 고재는 수축과 갈라짐이 적다. “하지만 손상이 생겨도 괜찮아요. 보수하며 살면 되는 것이 한옥이거든요. 차곡차곡 쌓은 기와도, 짜 맞춰 완성한 기둥도, 마루도, 얼마든지 보수 할 수 있어 집이 오래가죠.”

홍덕길 씨는 나무 만지고 집 짓는 일이 좋아 목수가 되었다. 서울 우이동 보광사를 비롯한 다수의 사찰과 고건축, 살림집 한옥을 두루두루 작업했다. 요즘에는 삼청동의 살림집 한옥 개?보수 작업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한옥 지으며 생긴 톱밥만 모아도 대궐 한 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홍덕길 씨의 분주한 공사 현장, 그곳에는 다른 대목들의 현장이 그렇듯 비슷한 형태의 나무 재단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시골에서는 톱밥 모아다가 비료로도 쓰고 화장실에도 쓰고 여기저기 활용하겠는데 서울에서는 불 지피는 데 외엔 크게 사용할 곳이 없다.


사진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미장이 김득혁 씨, 북촌HRC의 황명주 씨, 대목 홍인조 씨와 문석환 씨, 북촌 HRC 김장권 대표, 대목 이유만 씨가 계동 공사현장에 모였다. 김득혁 씨가 입은 갈색 체크 집업 점퍼는 갤럭시, 검정 머플러는 코데즈컴바인. 황명주 씨가 입은 블루 체크 프린트 니트는 갤럭시. 홍인조 씨가 입은 빨간 니트는 갤럭시, 아가일 패턴의 브이넥 카디건은 막스앤스펜서. 이유만 씨가 입은 퍼 트리밍된 블루 니트 집업 카디건은 갤럭시 제품.

대목부터 미장이까지, 북촌 한옥을 짓는 사람들
종로구 계동에 자리한 미완의 공간에 북촌 HRC의 김장권 대표와 문석환 대목을 중심으로 한 한옥 장인팀이 모였다. 문석환 씨와 그의 제자 홍인조, 이유만 씨가 기둥을 세우고, 마룻대와 서까래를 놓아 지붕의 구조를 짜놓았으며 그 위에 와공이 기와를 얹어 지붕을 완성했다. 이제는 미장을 할 차례다. 대목들이 기둥과 기둥 사이를 메워 수장을 들여놓으면 미장이가 와서 흙을 바른다. 미장을 맡은 김득혁 씨는 꼼꼼하게 그려진 도면에 따라 기왓장을 이용해 담에 물고기 문양도 넣는 등 좁은 마당이지만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미장이 끝난 뒤에는 창호장이 만들어 온 창과 문을 달아 집을 완성할 것이다.

이 집을 설계한 김장권 씨는 한옥을 보수·개축하며 한옥 짓는 방법을 배운 뒤 지난 1998년부터 북촌에만 100채 이상의 생활 한옥을 지었다. 그는 스스로를 대중적인 생활 한옥을 짓는 사람이라 말한다. 작품이기보다는 생활에 유용한 살림집을 만드는 것이다. 그때마다 문석환 씨는 김장권 씨와 참 많이 대립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방식대로 짓고 싶은 대목의 욕심과 요즘 사람들의 생활에 맞게 변화를 주고 싶은 건축가의 욕심이 상충했기 때문이다. 이 둘이 함께 일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문석환 씨는 열다섯 나이에 목수 일을 시작했고 1952~53년 즈음에는 요즘 말하는 땅 장수들이 북촌 일대의 땅을 대거 사들여 마구잡이로 집을 지어 판매하던 시절에 북촌 한옥을 지었다.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북촌에서 한옥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작업하기 까다로운 환경이 되었다.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집주인을 만나고 설계하는 역할은 이제 건축가의 몫이 되었고, 대목은 그 이후의 단계부터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건축가의 도면에 대목의 연필 끝에서 나온 그림이 더해져 현장은 일사불란하게 돌아간다. 사내들끼리 하는 일이어서 거칠지만 재미있고 현장감도 넘쳐나는 그곳은 말 그대로 공사장이지만 양식 건축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이나 철을 갈아내는 날카로운 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둔탁하지만 정겨운 나무 망치 소리, 강약이 있는 톱질 소리에 사람 소리가 뒤섞여 활기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옥 짓는 장인의 분류
대목장:
중요무형문화재의 한 종목. 대목 기능을 보유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대목은 재목을 이용해 집 짓는 일에서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어 집의 큰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때로는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목수이기도 하다. 궁궐, 사찰, 군영 시설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도편수: 집을 지을 때 책임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 주로 궁궐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표현으로 서까래편수, 단청편수, 석편수 등 각 분야의 편수(우두머리)들을 총지휘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소목장: 중요무형문화재의 한 종목. 소목 기능을 보유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 건물의 문과 창을 만드는 창호장과 장롱, 궤, 경대, 책상, 문갑 등 목가구 제작 기술을 가진 목수를 말하는 가구장이 있으며, 건축을 주로 하는 대목과 대칭되는 말이다.
미장이: 건축 공사에서 벽이나 천장, 바닥 따위에 흙이나 회, 시멘트 따위를 바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와공: 기와를 굽는 사람.
제와장: 중요무형문화재의 한 종목으로 기와를 전문으로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었으나 콘크리트, 슬라브 집이 생기면서 차츰 수요가 줄어 현재는 경상남도 울산과 전라남도 장흥 지방에서만 제작되고 있다.
화문장: 원래는 여러 가지 색채로 글자나 무늬를 넣고 쌓는 담인 화초담과 같은 의미이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화문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묵은 나무와 동백기름이면 됐지”
가구장 설석철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 
“얼마 전에는 아이에게 아토피가 있다며 집에 있는 가구를 전통 가구로 바꾸겠다고 찾아왔어요. 요즘 가구들이 보기에는 겁나게 좋은데 몸에는 별로 안 좋은가 봅디다.” 설석철 옹이 까다롭게 고른 20~40년 된 나무를 해와 바람에 몇 년씩 건조시킨 뒤 손으로 깎고 끼워 맞춰 동백기름 발라서 완성한 가구만 하겠는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사람 손으로 하는 것만 못해서 초벌 작업 정도만 기계로 하고 나머지는 일일이 손으로 작업한다는 설석철 옹의 작업실은 1970년부터 그곳에서 사용해온 도구들이 차곡차곡 쌓여 기묘한 보물창고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젊어서 나무 조각 파편에 눈을 다쳐 지금은 한쪽 눈이 안 보이고 몸도 불편하여, 광주대 가구디자인학과에 출강하고 있는 막내를 포함해 세 아들(4형제 중 첫째는 서울에서 건축 설계사로 활동하고 있다)이 손과 눈이 되어 함께 가구를 만든다. 그래도 그의 열정과 손끝의 감각은 아직 살아 있다. 젊은 시절엔 몸이 약해 농사도 못 짓고, 산속에서 자랐기에 아버지를 따라 ‘목수 일이나’ 배운 것이 그의 나이 열 일곱. 그로부터 예순 해가 지난 2001년에는 국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 55호 소목장 보유자로 이정받았다. 그렇게 연장 궤짝 하나 들고 시작된 기나긴 여정이 이제는 그의 아들 대로 넘어가고 있다.

동은 설석철 옹은 여든 세살이 되던 2007년에 우리나라 국새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해 국새 의장용 함을 제작하기도 했다. 장과 농, 상을 비롯해 함, 궤 등을 장식을 줄여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최대한 살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관이나 잠원동 동은 소목공방(02-535-4537)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설석철 옹의 작업실. 1970년부터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가구에 들어갈 장석(장식)을 만드는 작업대 위로는 장석 만들 때 쓰는 다양한 도구들이 놓여 있다. 청계천에서 좋은 철물 사다가 여기서 깎고 다듬고 조각한다.

“이치대로 살과 살을 끼워 맞춘다” 창호장 박천동
40여 년 동안 한옥에 들어갈 창호를 만들어온 박천동 씨는 “내가 가진 손과 재주로 떳떳하게 일하고, 하나 남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이라는 이유로 목수 일이 좋다고 말한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는 장난감이며 가구를 다 만들어주고, 그렇게 채우고 맞추며 사는 것이 인생 아니겠냐고 말하는 그. “창호가 딱 그래요. 욕심 부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이치理致대로 하나씩 맞춰나가야 하죠. 이건 사찰에 쓰일 꽃살이에요. 꽃 따로 잎 따로 만들어 붙이지 않고, 꽃과 횡으로 놓인 잎을 한 살에 조각하고, 종으로 놓인 잎만 다시 또 한 살에 조각해 둘을 수직으로 끼워 맞추는 것이죠. 한옥은 평생을 가는 건축물이잖아요. 그런데 좀 더 편하고 쉽게 하자고 다 따로 만들어서 붙이면 쩍쩍 갈라지고 떨어지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많아지죠.” 그는 최대한 옛날 것을 계승하고자 하지만 요즘에는 도시 한옥이 증가하면서 나무에 유리도 끼우는 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간이 날 때면 틈틈이 가구를 만들어 보기도 하는데. 전통 가구 만들기는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창호도 그랬지만 가구도 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 요즘 그가 작업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바로 조급함이다. “한옥이란 것은 시간을 갖고 지어야 하는데, 자꾸 빨리 해달라고 조르는 거죠. 아무리 급해도 손이 들어갈 만큼은 다 들어가야 하는데, 하다 말 수는 없잖아요.” 서울에서 가구를 만들다 내려온 제자와 아들, 이 셋이 밤낮 없이 만들어도 원하는 날짜를 맞추기 힘들 때가 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한쪽에서는 쉼 없이 전기 톱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불발기창이다. 외국인들도 감탄하는 들어열개문과 짝을 이루는 그것.

박천동 씨는 옥산목공소를 운영하며 한옥의 창호를 만들고 있다.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 수리 기능자로 인정받아 아름지기 함양한옥, 신라호텔 폐백실, 임페리어 팰리스 호텔 한식 뷔페, 부암동 한옥 등의 창호를 제작했다. 현재 진행 중인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경주 갑사에 짓고 있는 박물관의 창호 제작이 있다.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옥산목공소가 박천동 씨의 일터다. 대목들이 주로 현장에서 일한다면, 창호장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창과 문을 완성해 현장으로 보낸다. 높은 천장의 그의 작업실 한쪽엔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용인 희원의 꽃담. 화사한 색감에 정교한 디테일로 아름다운 볼거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바로 서성환 화담장 같은 이가 아닐까. 그에겐 따로 전시장이 필요 없을 듯하다.

“담 위에 꽃도 피우고 십장생도 살게 하지요” 화문장 서성환
가옥의 둘레를 따라 이어지는 전통 담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 제작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땅의 기초를 다진 후 장대석과 사구석을 쌓고, 정교하게 계산해 문양을 쌓고, 강회다짐으로 속을 채우고, 기와를 올리고…. 가장 손이 많이 간다는 꽃담은 10m 정도를 완성하는 데 꼬박 세 달이 걸린다. 전통 담은 땅의 모양새에 따라서도 달라졌고, 지역, 재료, 신분에 따라서도 제각기 달라졌는데 그 안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 있었다. “궁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꽃담은 직각과 직선으로 이어졌어요. 이는 왕가의 권위를 살리면서도 담의 문양이 잘 표현되도록 한 것이죠. 민가에서 쌓던 막돌담은 집 둘레를 휘둘러가며 쌓은 것인데, 막돌담은 그처럼 곡선으로 쌓아야 담이 넘어가지 않고 힘의 균형을 잘 유지합니다.”

열여덟 살부터 평생 전통 담을 만들어온 서성환 화문장은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만든 담에 만족했다”고 한다. ‘마흔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에게는 담이 곧 자신의 얼굴이었던 셈이다. 젊은 시절에는 재래식으로 손수 만들다가 요즘에는 편리한 기계가 많이 나와서 일이 한결 빠르고 수월해졌다. 그럼에도 배우려는 사람들이 오래 견디지 못해 안타깝다고.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담장 위에도 꽃을 피우려면 힘이 드는데 말이지요.” 일하면서 들이마신 먼지 때문인지 목이 쉽게 잠긴다는 그는, 경복궁과 운현궁, 청와대부터 재일교포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는 오사카 꽃 박람회 한국관, 프랑스 파리의 서울공원 담까지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전통 담장을 통해 소박하고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알리고 있다.

서성환 씨는 나이 열여덟 때부터 궁궐 화문장이었던 한 씨 노인에게서 일을 배웠다. 청와대 본관과 살림집, 경복궁, 운현궁,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 아름지기 함양한옥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소와, 일본 오사카 꽃박람회 한국관, 파리의 서울공원 등 세계 곳곳에서 소박하고, 때로는 화려한 전통 담을 선보이고 있다.

“한옥은 결국 큰 가구입니다” 가구장 노행용
투박한 손은 목수의 이력서나 매한가지다. 나이테마냥 늘어선 굳은살 하나하나에 인생이 박히고 연륜이 박힌 탓이다. 솜씨 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행용 소목이지만, 그런 연륜이 없었다면 ‘아름지기 함양한옥’의 복원 전 과정을 감독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다. 소싯적 한옥 수리하는 곳을 들며 나며 눈으로 익혀둔 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 본업이 가구장인 그에게 어쨌든 한옥 공사는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촌이다 보니 제대로 된 일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특히 목욕채에 억새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해본 사람이 있어야죠. 이렇게 궁리하고 저렇게 연구하면서 어렵사리 완성한 터라 볼 때마다 흐뭇해요.” 황토 돌벽에 억새 지붕을 얹은 함양한옥의 목욕채는 ‘한옥도 이렇게 편리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절로 나오게 하는 곳이다. “한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업그레이드했다고 해야 할까요? 함양한옥은 그 완벽한 샘플이자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업에 참여했으니 보람이 클 수밖에요. 게다가 머무는 분마다 이런 한옥도 있네요 칭찬해주시니 목수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지요.” 첫 작품을 이토록 훌륭하게 완성한 이도 흔치 않을 법한데, 정작 노행용 소목은 별로 한 일이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 그에게 한옥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물으니 “안 중요한 게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한옥 짓는 덴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가 없어요.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해줘야 다음 단계로 수월하게 넘어갈 수가 있지요. 흙 한 줌을 올려도 정성스럽게 해야 해요.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할 수가 없죠.” 역시나 제대로 된 한옥은 제대로 된 목수의 손에서 지어지는 법인가 보다.

노행용 씨는 전통 한옥 문화 체험관인 ‘아름지기 함양한옥’의 복원 공사를 진두 지휘했다. 현장 공사 감독으로 상량에서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함께했다. 열예닐곱 살 무렵 목수 일에 입문, 45년여 동안 가구를 만들고 있다.

원래는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한옥 짓는 일도 해보았다는 노행용 가구장. 그의 작업실은 구석구석 숨겨놓은 비법이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스트라이프 패턴의 폴로 티는 발리, 아가일 패턴의 스웨터는 프레드 페리 제품.

터  고르기부터 지붕 얹기까지, 한옥 짓는 순서
1. 기초 다지기:
터를 고른 뒤 주추가 놓일 자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따로 기초를 다진다.
2. 기단과 계단 쌓기: 처마 밑을 따라 기와, 강회를 섞은 삼화토를 써서 마당보다 높게 쌓는다.
3. 주춧돌 놓기: 기초를 다진 자리에 주초를 놓는다.
4. 기둥 세우기: 주춧돌 위에 나무로 기둥을 세운다.
5. 수장: 기둥과 기둥 사이를 꾸미는 나무나 그러한 작업을 수장이라 하고, 여기에 쓰이는 각재로 된 재목들을 수장재라 일컫는다. 도시 한옥들에서는 수장재를 놓는 대신 합판 같은 것으로 마감하여 경제성을 도모하기도 한다. 수장을 할 때는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에 머름대를 놓아 방풍 역할을 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유도할 수 있게 한다. 한옥의 구조 중에서 가장 발달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 바로 이 머름대인데, 그 높이는 사람이 앉았을 때 가슴께까지 오는 것이 적당하다.
6. 담 쌓기: 재료에 따라 돌벽, 귀틀, 토벽 등이 있다.
7. 도리와 공포 구성
8. 가구 세우기: 기둥을 세우는 일은 들보를 얹어 지붕을 구성하는, 즉 집을 얽어나가는 첫 단계 작업이다. 기둥이 벽체를 이루게 하는 골격이라면 들보는 지붕을 형성하는 골격이다. 지붕을 받게 하기 위해 들보와 여러 가지 부재들로 만드는 복잡한 조합을 통틀어 가구架構라 한다.
9. 천장 마감
10. 처마 만들기
11. 지붕 만들기:
서까래와 도리가 한 몸이 되도록 접착하는 일까지 대목이 끝내면 기와 장인들의 지붕 만들기가 시작된다.

<행복> 독자 5백73명에게 물었습니다
한옥을 짓는다면 건축 예산을 얼마로 예상하십니까?(대지 30평형 기준, 대지 구입비 불포함)

① 2억 원(25%) ② 3억 원(33%) ③ 4억 원(12%) ④ 5억 원(22%) ⑤ 5억 원 이상(8%)
- 북촌 HRC 김장권 대표는 일반적으로 북촌에 지어지는 한옥의 평당 공사비가 1천~1천 5백만 원이라고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1천 만원 이하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땅을 매입하는 비용을 제외한 것으로 건축가마다 차이가 나지만 어림잡아 이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합니다. 대지 매입 비용을 제외한 건축비 예산을 3억 원가량으로 예상하고 있다면 북촌 일대에 30평형 정도의 한옥을 한 채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어림잡음입니다.

한옥 거주 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냉·난방(41%) ② 동선의 비효율성(10%) ③ 주차(10%) ④ 수납(3.5%)
⑤ 건축비 또는 주택 유지비(25%) ⑥ 신축이나 개?보수에 관련한 법규(3.5%) ⑦ 기타(7%)

- 한옥이 춥다는 것은 이제 옛말입니다. 예전에는 갑창(방한을 위해 안쪽을 이중으로 만든 창)을 만들어 이중, 삼중으로 문을 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면, 요즘에는 창에 유리를 끼워 넣는다거나 시스템 창호를 사용하는 등 현대적인 방식과의 결합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산자(가는 나뭇가지를 엮은 것)를 이용해 사이에 스티로폼을 넣은 뒤 앞뒤로 진흙을 발라 벽을 만들기도 하는 등 전통적인 방식을 응용한 개량화 작업과 현대적인 방식과의 접목을 통해 방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 수납 문제도 많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좁은 한옥일지라도 옷을 수납하기 위한 벽장을 따로 만들고, 지하 공간과 다락을 내어 공간 활용도를 최대한 높이는 등 한 치도 버려지는 공간이 없도록 합니다. 그래서 실제 집의 평수보다 열 평은 더 넓고, 활용도도 뛰어나게 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박석규 대목이 <행복> 독자에게 전합니다
천 년을 가는 한옥을 지을 때 꼭 알아야 할 네 가지
1. 한옥 건축의 최적기는 10월에서 4월 사이 산림청에서는 소나무를 벌목하여 다른 수종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매년 합니다. 보통 10~1월에 벌목하여 제재소로 보내진 소나무는 따뜻한 봄볕과 봄비 속에서 단련이 됩니다. 그러면 3~4월에 목수들이 치목한 뒤산에서 새로 내려온 소나무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의 나무가 가장 깨끗하고 예쁩니다. 소나무 본래의 뽀얀 속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2. 지붕에 신경 쓰자 한옥은 목조건물입니다. 지붕에 물이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나무가 썩기 쉽지요. 따라서 지붕을 꼼꼼히 체크해야 합니다. 서까래 위에 송판을 덮거나 한지, 대나무, 참나무 같은 것을 엮어 흙도 바르고 꾹꾹 다진 뒤 기와를 얹으면 지붕이 완성되는데, 여기서 흙을 충분히 다지지 않거나 기와의 배열에 문제가 있어 비가 새면 서까래부터 대들보를 거쳐 기둥까지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게 됩니다. 특히 한옥의 핵심 부재인 추녀가 상하게 되면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여름 장마철엔 기둥을 주시하자 생활 한옥은 처마가 길지 않으므로 비가 들이쳐 기둥이 상할 확률이 높습니다. 집을 지탱해주는 기둥,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밑뿌리 쪽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썩을 수 있으니 꾸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4. 병충해를 방지하자 기둥 밑처럼 병충해를 입기 쉬운 부분에는 약품 처리를 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뿌려 방부·방충 효과를 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워낙 좋은 약품이 많이 나와 약품 처리만 주기적으로 해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손은 많이 가지만 그것이 또 한옥 사는 맛이지 않겠습니까?

김명연,손영선,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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