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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 전 정무수속이 만난 3인의 예술가 문화란 자기 일을 예술로 하는 것이다
법을 공부하던 대학생이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세상에 위대한 예술품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변호사가 되어 뉴욕에서 공부하면서는 음악 공연과 미술 전시를 발이 닳도록 다녔고, 오페라와 미술 관련한 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훗날 여성 최초로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이 된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술로 하면 그것이 곧 문화’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지난봄, 프랑스 생테티엔 디자인 비엔날레에서 한국 특별전이 열렸다. 1백여 점이 넘는 한국 디자이너의 작품을 둘러보는데, 오방색 조각보로 만든 의자가 한 가운데 대왕처럼 앉아 있었다. 이탈리아의 디자인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프루스트Proust 체어였다. 멘디니의 의자에 우리 전통 오방색의 패턴과 색채를 더하니 그 자체가 현대미술 작품이 되었고, 많은 프랑스인이 그 의자 주변에 모여 우리 전통의 미감을 현대적으로 흡수하는 광경이 흐뭇했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왜 프루스트 체어에 강금성 작가의 오방색 조각보를 적용했을까? 그러다 어느 날, 뉴스에서 블랙 슈트에 프루스트 체어와 비슷한 오방색 조각보로 포인트를 준 독특한 패션을 한 여인을 보았다. 조윤선 전 정무수석이었다.

프루스트 체어 뒤의 한국인
한국의 이 사람과 이탈리아의 저 사람이 연결되면서 우리 전통문화가 거장의 현대 작품으로 변화한 데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최근 서울의 DDP에서 멘디니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어 조윤선 전 정무수석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예감이 들어맞았다.

“강금성 작가의 조각보를 보고 너무 예뻐서 스카프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제가 여성가족부 장관일 때 멘디니 디자이너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얀 바지와 초록 재킷에 이 조각보를 하고 나갔죠. 조각보를 두른 제 모습을 보더니 흥미로워하셔서 강금성 작가와 의논해 한쪽은 캐시미어, 다른 쪽은 오방색 조각보로 만든 남성용 스카프를 만들어 선물했어요. 아주 좋아하셨고 나중에 ‘품격 있는 패션을 해야 할 자리마다 이 스카프를 하겠다(Whenever I have to look elegant, I wear it)’라고 쓴 카드까지 보내셨죠. 그 이후로 멘디니 디자이너와 즐거운 식사 친구가 되었고, 조각보로 프루스트 체어를 만드셨어요.”

국회의원, 여성가족부 장관, 최장기 정당 대변인,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을 역임한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프랑스에 출장 가서 플뢰르 문화부 장관에게 에르메스 스카프를 선물받았다. 고급 브랜드여서가 아니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프랑스 정치인은 공식 석상에서 부러 프랑스 브랜드의 패션과 소품을 드러내 전 세계에 그들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각인시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없는 게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저라도 ‘조각보 스카프를 외국 손님에게 선물하자’라고 마음먹었죠. 시진핑 주석은 부인인 펑리 위안 여사와 세트로 만들어드렸어요. 우리나라 조각보는 갖가지 색상 배합이 가능하고 여러 형태로 만들 수 있어요. 색색으로 화려하게, 은은한 단색 조합으로 만들 수도 있죠. 그러니 중요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분의 취향을 미리 파악한 후 강금성 작가와 조각보를 펼쳐놓고 둘이 앉아 이리저리 배합해봐요. 그 배열을 사진으로 찍어서 조각보를 만들죠. 아세안 정상회담에 온 영부인들에게 조각보 숄을 선물로 드렸더니 싱가포르 총리 부인은 다음 날 만찬에 그 숄을 두르고 오실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문화와 예술이 그 나라의 힘이다’라는 제 평소 생각을 더 확신하게 만들었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었고 대학에 입학한 딸을 둔 어머니이기도 한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드라마에서 “법에서 예술을 보더라”라는 대사를 듣고 감동받은 후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다. “그 표현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 자신의 일에서 ‘이 이상 해낼 수는 없다’라고 스스로 느낀다면 그 이상의 작품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그 의미를 깨달으니 소름이 돋더라고요. 제가 하는 일이 법률가든 정치가든 사람들이 저를 통해서 예술의 경지를 느낄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죠. 신기하게도 저와 다른 분야의 사람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짧게 대화해도 깊이 공감되고 서로 많이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안목과 노력이 만나 예술이 되다
특허 소송 분야에서 스타 변호사로 활동한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혁신적인 조직 운영으로 공무원 사회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장관에 연이어 뽑혔고, 최장기 대변인과 여성 최초의 정무수석을 하면서 우리나라 문화 예술 외교사절로 알려지지 않은 일을 해왔다. 이처럼 자신의 분야가 예술이 되도록 노력해온 그에게 현재 우리 문화계에서 예술적 감동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국내외 문화 공연과 전시를 빼놓지 않고 관람하는 문화 마니아답게 올해 기념적 전시로 큰 화제가 된 3인의 예술가, 진태옥 디자이너,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뮤지션 지드래곤을 꼽았다. 진태옥 디자이너는 올해 서울 컬렉션에서 50주년 기념 회고전을 열어 후배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영희 디자이너는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파리와 뉴욕에서 명성을 얻은 오트 쿠튀르 작품을 한데 모은 40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한국 대중문화계의 젊은 베테랑 그룹 빅뱅의 멤버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자신을 주제로 젊은 예술가들과 컬래버레이션한 독특한 미술 전시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와 경제력이 비슷한데 한층 충만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사는 나라의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오랫동안 관찰해보니 답은 문화와 예술의 향유였죠. 문화가 먹고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나라처럼 어린 시절부터 문화를 향유하는 연습을 하면 좋은 문화 수요자가 많아져 예술 시장이 힘을 얻고 성장하며 결국 그 나라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됩니다. 또 문화를 향유하는 개인은 자기 삶을 스스로 충만하게 사는 능력자로 변해요.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살기에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이죠.”

<행복>의 요청으로 세 명의 예술가를 만난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그들이 하는 작업에 대해 존경을 표하기 위해 각 예술가의 작품을 직접 입어보았다. 지드래곤을 만날 때는 평소 입어보지 못한 라이더 룩을 입고 패션 또한 젊은 베테랑의 감각과 자신감이 샘솟는 원천이라는 사실에 공감했다. 이처럼 문화는 직접 경험하고 향유하지 않으면 나의 행복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느끼고 수용하면 내 인생이 풍성해지고, 그런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문화 선진국’이라는 행복을 누린다. 세계인이 문화 선진국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예술을 잘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여서가 아니라, 이처럼 일상에서 예술을 즐겁게 경험하는 사람이 많아서일 것이다.

진태옥 패션 디자이너 
“안목과 노력의 입체적 생각이 예술을 완성하죠”

창작을 잘하는 사람을 예술가라 하고, 그 감각을 오랫동안 유지하며 일하는 사람을 장인이라 부른다. 얼마 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16 S/S 헤라 서울패션위크’에서는 우리나라 패션 분야의 장인인 진태옥 디자이너의 패션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앤솔로지ANTHOLOGY: Jinteok, Creation of 50 Years>가 열렸다. 자연과 일상에서 얻은 영감으로 50년간 창작한 작품 중 80여점을 전시해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온 패션의 역사를 알려주었다.

이번 컬렉션 피날레에서 선생님의 지난 50년이 담긴 영상을 상영하자 참석한 사람 모두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긴 세월이 어제 같습니다. 20년 전, 파리 컬렉션에 처음 참가했을 때 기자들이 제게 한 첫 질문이 “진태옥, 당신은 무엇인가?”였어요. 한국에서는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죠. ‘이 나라는 디자이너를 예술가로 대우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더욱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예술적 감성으로 재생산해야 세계에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요.

50년 동안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가 많이 발전하고 알려졌다고 느끼시나요?
올해 한불 수교 1백30주년으로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코리아 나우>전에 저도 참가했습니다. 제가 한불 수교 1백 주년에 가서 쇼를 했을 때 전시장에 모기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어요.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때였으니 프랑스인이 한국 문화에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전시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에펠탑에서 태극기를 상징하는 레이저 쇼가 벌어지고, 파리의 유명한 멀티매장인 라꼴렉뜨에서 낯익은 한국 음악이 들리며, 전시장에도 얼마나 사람이 많이 오던지 이런 게 국력이구나 싶어서 가슴이 울컥했어요.

최근 한류가 유명해졌는데 전문가들이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그 속에 녹여내지 않으면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재능이 있거나 운이 좋으면 ‘반짝’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지속하려면 부단한 노력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특히 패션 디자이너는 옷만 가지고 씨름해서는 안 됩니다. 종합 예술이니 음악, 그림, 조각까지 다 알아야지요. 요즘 우리나라에 문화 행사가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전 행복해요. 그런 경험 덕분에 입체적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그 입체가 결국 형태가 되고 구조가 되고 거기에 예술적 감성도 집어넣으면 되지요. 우리 젊은이들이 그런 입체적 발상을 하길 바랍니다. 먼저 한 사람의 소양과 수준을 다 흡수해서 그 영양분 위에 꽃을 피워야 오래가고 세계에 나가서도 각광받을 수 있습니다.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DDP 이간수문장에서 열렸던 진태옥 디자이너의 전시. 이때 출간한 사진집에는 보그의 에디터이자 패션 평론가인 수지 멘키스가 서문을 썼다. 
저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고, 달력으로 명화 감상을 했어요. 중학교 때는 집에 있던 인상파 전집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 10선, 싫어하는 그림 10선을 분류하면서 놀았지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뉴욕에서 근무할 때는 미술관과 오페라 극장을 수도 없이 다녔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하신 말씀처럼 오페라 소재와 그림이 같고 서양 문화라는 게 음악, 미술, 건축이 다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죠. 그 경험과 입체적 사고가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럴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저는 안목에 노력을 더해야 예술가가 된다고 믿어요. 노력이란 게 공부하는 거예요. 아무리 천재라도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마지막까지 책임감을 다해야 해요. 계주를 할 때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듯 예술가는 다음 세대를 위해 마지막까지 바통을 잘 넘기는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지금 계주를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존경하는 마음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예술가는 굉장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전과 후의 예술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안목과 함께 책임이 중요해요. 그것을 다음 세대에 남겨주려는 의무감이 예술은 물론, 역사와 정치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의무감 때문에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좋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예술가든 정치가든 역량이 일반 수준 이상인 사람은 반드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우리 사회가 행복이 가득한 집이 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평소 우리 역사와 인생은 마치 빌딩을 올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골조를 올리는 사람, 장식과 마무리를 하는 사람 등 각각의 역할이 다른데, 순수 과학과 순수 예술을 하는 천재는 골조를 쌓는 사람 같아요. 그들이 골조를 쌓아 인간이 외연을 얼마나 더 넓힐 수 있는지 알려주면, 우리는 그것으로 집을 만들고 꾸미면서 점점 더 높고 성대한 세상을 사는 것이죠.
과찬입니다. 물론 저도 좌절한 적도 있었어요. 파리에서 금융 위기 때문에 돌아올 당시에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울었습니다. 개인 인간사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예전에 금요일에 요지 야마모토가 부도가 나서 파리가 발칵 뒤집혔는데, 다음 월요일 아침에 일본 정부가 인수한다고 밝혔습니다. 더 멋진 건물로 옮겨 갤러리처럼 운영했지요. 이처럼 우리나라에도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세계적 패션 브랜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날이 와서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가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저는 아직도 그 중심에 있고 싶습니다.


뮤지션 지드래곤
“내가 좋되, 남도 공감하는 게 예술이죠”

지난여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는 뮤지션 지드래곤이 국내외 작가와 컬래버레이션한 전시로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및 건축 작품 2백여 점이 선보였다. 지드래곤이 이 전시와 함께한 취지는 ‘나로 인해 미술관을 처음 찾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아졌으면 좋겠다’였다. 공공 미술관이 대중 예술가와 협업하니 예상대로 관람객이 많았다. 정동길을 걸어 녹음이 우거진 정원을 지나 시립미술관에 처음 온 젊은 관객이 ‘앞으로 미술관에 자주와야지’라고 생각했다면 이것이 곧 예술의 힘이고 기회가 아닐까.

대중음악 분야에서 일한 지 벌써 20년 정도 되었지요?
여섯 살부터 했으니까 20년 넘게 한 셈이에요. 2002년 연습생일 당시 열서너 살이던 제게 양현석 대표는 매일 외국 음악을 듣고 그 멜로디에 어울리는 가사를 두 곡씩 쓰게 하셨죠. 그렇게 매일 오랫동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 것이 생겼고, 저희가 데뷔할 쯤엔 저희 스스로 곡을 쓰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지드래곤의 음악은 듣는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저는 곡을 만들 때 스토리텔링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에요. 대중문화는 보고 듣는 사람이 쉽게 공감해야 좋은 창작물이니까요. 제가 원하는 걸 한 건 솔로 앨범을 냈을 때부터였어요. 실험적 노래가 많았고, 비주류 노래도 했는데 많은 분이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겠구나’ 하면서 제 생각과 안목을 믿었죠. 음악뿐 아니라 빅뱅의 음악을 선보이는 시각적 부분에서도요.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하니 우리가 행복했고, 그걸 대중이 좋아하니 더 행복해졌어요.

직언을 하면 충신의 목을 베는 중국 은나라 왕에게 3년간 산해진미를 직접 요리해주면서 신뢰를 쌓은 뒤 직언을 했다는 신하의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대변인으로 일할 때 이 이야기를 읽고 ‘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이 잘 듣게 하려면 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싶은 상태로 만들어주어야 하는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음악과 영화 등 예술도 대중과 이런 방식으로 소통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누가 그렇게 가르쳐줄 수 없으니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아요. 우선 자기가 잘하는 게 뭔지 잘 알아야 하고, 자신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한 우물을 파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0년 공들인 탑은 무너지는 데도 10년이 걸린다”는 말을 항상 생각해왔어요. 오래 한 것은 쉽게 안 무너진다고 확신합니다.

음악 외에도 패션이 화제인데 이런 감각은 어떻게 길렀나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제 옷을 만들어주셨어요. 파는 옷을 사 와서 리폼을 한다든가 무언가를 더 달아서 모양을 바꿔주셨죠. 그래서 자연스레 ‘아, 옷은 남과 다르게 입어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교복은 멋을 내기 싫었어요. 저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는데 교복은 교복대로 입는 게 가장 멋스러워요. 그런 게 친구들과 달랐죠. 제 친구들은 교복을 다 줄여 입었는데 그럴 때 저는 교복을 가장 교복답게 입었어요.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형성해나갔어요.”

6월 9일부터 8월 2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렸던 전시. 사진의 작품은 권오상 작가가 떠도는 사진 조각으로 완성한 ‘무제의 G-Dragon, 이름이 비워진 자리’.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가들과 협업하며 미술 영역까지 활동을 넓혔는데, 왜 미술에도 관심이 많은가요?
음악을 할 때 새로운 테마나 콘셉트를 항상 생각해야 해요. 물을 보면 물로 뭘 풀이할 수 있을까 하면서 상상하는 걸 좋아하죠. 솔로 앨범 때부터 뮤직비디오, 무대연출과 배치 등 하나하나 디자인 면에서 신경을 쓰다 보니 처음엔 가구 그다음엔 미술 쪽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음악과 미술까지 전방위적 아티스트로 활동하려면 평소에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미술 작품이 좋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크리스티 같은 여러 옥션 사이트를 둘러봐요. 사고 싶은 작품이 어떻게 거래됐는지, 시세가 어떤지 살펴보면 그걸로도 예술 공부가 되죠. 패션 쪽에도 관심이 많으니까 전 세계 곳곳의 패션 관련 화제도 살펴보고요.

20년을 한길을 걸어왔는데도 아이돌과 아티스트 중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지요?
아이돌로 데뷔했으니 불리는 수식어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제 음악을 들었을 때 저에 대한 수식어가 필요 없을 만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겠죠. 저는 뮤지션이라는 자부심이 큽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예술 장르는 음악이에요. 꼭 예술 분야가 아니라도 자기 직업에서 예술혼을 가지고 일하면 그 사람이 아티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법률가에 대한 동경을 가졌어요. 드라마 속에서 에세이 쓰기 경합으로 로스쿨 편집장을 뽑는데 선배 편집장이 주인공을 선택하면서 “친구의 글도 아주 뛰어나다. 그런데 너는 법에서 예술을 보는 사람이다”라고 한 말이 제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예술을 보는 게 또 다른 경지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런데 지드래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니까 반갑네요. 이런 점이 지드래곤이 20대에 아티스트로 성공한 원인인 것 같습니다.
아티스트라는 사람은 다 그럴 거예요. 자기 고집, 자기 기준이 제일 높고 남이 뭐라고 해도 자기 세계를 표현하는 작업을 하죠. 그래서 새로운 걸 준비할 때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저는 앨범을 낼 때 그다음 앨범을 생각해요. 다음 앨범은 이번 앨범보다 무조건 좋게 만들겠다고 마음먹으면 다음 앨범엔 제가 더 성장해 있습니다.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전통을 알아야 세계의 호감을 얻을 수 있어요”


수년 전 파리에서 모델이 저고리 없이 색색의 치마로 된 한복 드레스를 입고 캣워크에 나선 날. 한국 언론은 전통과 다르다고 비난했고, 유럽 언론은 한국에서 가장 모던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바람의 옷’이 왔다고 격찬했다. 이 바람의 옷은 파리를 거쳐 뉴욕으로 갔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국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올가을 DDP에서 열린 <이영희전 - 바람, 바램>은 40년간 파격과 도전을 이어온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의 회고전. 겹겹의 천으로 둘러 마치 치마 속으로 들어온 듯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전시장에 극찬받은 그의 한복 작품 1백20여 점을 전시했는데, 요즘 한복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이 찾아왔다.

예전에는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었는데, 한복을 파격적으로 변형할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한복 만드는 것을 10년쯤 하는 동안 염색하고 수놓고 그 시대에 프린트까지 했으니 나중에 해보고 싶은 게 없었어요. 우리나라 전통 복식 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석주선 박사를 존경해서 10년 넘게 일요일 저녁마다 함께 식사를 했는데, 어느 날 “선생님, 고름을 떼고 치마도 짧게 해보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응, 해봐. 사람도 변하는데 옷도 변해야지”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 한마디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1984년에 국내 최초로 개량 한복을 디자인했어요.

선생님의 한복은 당시 유행하던 한복과 어떻게 달랐나요?
당시의 한복은 빨간 치마에 목단꽃을 수놓는 등 색이 강한 천으로 만들었는데, 저는 은은한 색으로 한복을 만들었어요. 대학원 가서 배운 프린트를 붓으로 직접 했고 하얀 치마에 금사나 은사로 수놓는 식이었으니 한눈에도 달라보였습니다. 천의 두께도 달랐습니다. 모두 두꺼운 천으로 한복을 만들 때 저는 얇은 노방으로 만들었지요. 저는 지금도 노방에 열 필이나 스무 필씩 제가 원하는 색을 따로 염색해서 사용합니다. 무늬와 색도 제가 다 짜지요.

한국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셨지요.
파리 컬렉션에 나가고 싶어 파리에서 컬렉션 담당자를 수소문해 겨우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옷으로는 안 된다는 핀잔을 들었지요. 눈물을 흘리며 서울로 돌아와버렸습니다. 의논할 사람이 없어 끙끙대는데 그 담당자에게 우선 우리나라를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이얼을 돌리며 국제전화를 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도쿄에 가는 길에 한국에 잠깐 들러주었고 도자기 가게, 그 옛날 지금보다 훨씬 고풍스러웠던 인사동 거리, 국립중앙박물관을 보여줄 수 있었어요. 그 모든 것을 본 뒤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전에 파리에서는 그들이 우리 문화를 몰랐기 때문에 같은 옷으로도 점수가 깎인 것이죠. 나라가 힘이 있고 문화적 배경이 있어야 작품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9월 23일부터 10월 9일까지 DDP에서 열린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의 40주년 기념전은 건축, 디자인, 사진 등 현대 예술가와 협업해 40년 한복 미학의 새로운 미래를 그렸다.
오랫동안 대변인으로 일하면서 대중과 소통할 때 언론이 가장 훌륭한 컨설턴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을 가졌으니까요. 선생님은 그 옛날에 한국 문화를 기자들에게 스스로 알리면서 선생님의 작품이 세상과 소통할 길을 직접 찾으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나를 이해시키려면 내가 속한 문화를 먼저 보여줘야 한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파리에서 쇼를 하기 전 기자들을 제 자비로 한국에 초대했습니다. 더 좋은 쇼를 하기 위해 제 옷장에 있는 옷을 보여주고 의견을 들었고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도 보여주었지요. 한번은 파리에서 제 컬렉션이 끝난 후 어느 신문에 ‘기모노 코레’라는 타이틀로 제 저고리 사진이 나왔어요. 그 정도로 우리 문화를 모르는 게 속상해서 고민하다 오랑제리 미술관 정원을 빌려 한국 문화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파리에 작은 부티크도 냈지요. 길을 지나는 사람마다 한복을 쳐다보느라 쇼윈도에 늘 사람이 서 있었어요. 일부러 이 길로 돌아서 출근한다는 파리의 공무원도 있었지요.

변호사로 특허 소송을 준비할 때 법을 잘 모르는 공학자와 만나 이야기하는데도 이야기가 잘 통해서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다른 영역을 쉽게 넘나들 수 있다는 걸 알았지요. 선생님은 전통을 공부해 그것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고 대중과 소통하는 노력도 많이 하셨기에 이런 성공을 이루신 것 같습니다.
전통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모던한 한복을 디자인할 수 없어요. 우리 전통문화에는 예쁜 게 아주 많습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오트 쿠튀르 작업을 하고싶어요. 우리 전통에 정말 많은 아이디어가 있으니까요. 장롱도 너무 예쁘고 항아리도 아름답고 전통 문양도 멋있습니다. 전통적 라이프스타일의 모든 요소에서 현대적 디자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술가와 한복 디자이너 중 어떤 칭호를 좋아하시나요?
어느 신문 기자가 묻길래 둘 다 좋지만 한복 디자이너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답했습니다. 제 40주년 기념 전시에는 외국 기자들을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프랑스와 뉴욕에서 축하 메시지가 와서 감동했습니다. 이렇듯 외국에서는 우리 옷을 좋아해요. 자기한테 잘 맞는 옷을 입고 그 깊이를 알면 한복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화인지 깨달을 수 있어요. 그러려면 어린아이부터 한복을 입히고 부모가 가정에서 그런 문화를 보여주어야 하지요. 김구 선생님은 전통을 알수록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행복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 요소를 잘 간직할 때에야 세계인이 우리에게 호감을 느끼니까요. 이것이 문화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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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민정 기자 | 사진 김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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