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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육심원 씨 여자를 그리는 행복, 행복을 그리는 여자
<행복> 2002년 10월호 표지 작가로 선정되었을 때만 해도 육심원 씨는 이제 막 대학원을 졸업하고 생애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 신인이었답니다. 그 후 여덟 번의 개인전을 비롯해 꾸준하게 활동하며 재능을 펼쳐온 그는 이제 다양한 아트 상품과 TV 광고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유명 작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새롭게 문을 연 복합 문화 공간 ‘빌라 육심원’에서 <행복>의 오랜 친구, 작가 육심원 씨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빌라 육심원’은 갤러리뿐 아니라 카페와 레스토랑도 전시 공간이 된다. 작품을 실사 프린트한 대형 패널로 장식한 레스토랑 육심원 키친. 작품을 프린트한 갓을 씌운 대형 조명등으로 장식한 카페. 쿠션과 같은 소품도 모두 육심원 브랜드 아트 상품으로 채워져 있다.

서울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고의 적설량을 기록했다는 새해 첫 월요일, 평소라면 밀려드는 사람과 자동차로 인해 번잡하기 이를 데 없을 시간이지만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가로수길. 도시의 다른 한쪽에서는 교통대란과 출근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지만, 그 거리는 초콜릿 케이크 위에 듬뿍 뿌려진 분설탕처럼 달콤한 낭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가 육심원 씨를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이름 하여 ‘빌라 육심원’. 5~6년 전부터 캘린더, 다이어리 등 그의 그림이 새겨진 문구와 아트 상품을 선보이기 시작하더니 은행 통장과 카드, 얼마 전부터는 홈쇼핑 TV 광고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이름을 내세운 복합 문화 공간이 문을 열었다.

<행복>이 발굴한 작가 육심원 지난 수년간 작가 육심원 씨의 성장을 바라보며 <행복>은 자못 뿌듯하고 그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2002년 대학원을 졸업하며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 육심원 씨의 될 성부름을 먼저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10월호 표지로 선정했으니 말이다. 승승장구하는 그를 바라보며 마치 내 일인 양 어깨가 으슥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침나절에 눈밭으로 변해버린 골목길에 종종걸음을 옮기며 도착한 ‘빌라 육심원’. 빨간 벽돌로 지은 4층짜리 건물은 창밖으로 층층이 빨간색 차양을 드리우며 평범한 듯 편안한 모습이다. 지하층은 갤러리, 1층은 아트 숍과 카페, 2・3층은 이탤리언 레스토랑, 4층은 작가의 아틀리에로 이루어진 건물. 카페와 레스토랑 벽에는 그의 작품을 프린트한 대형 패널이 걸려 있고, 조명등과 쿠션 같은 소품을 통해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방긋 미소 짓는 얼굴이 곳곳에서 낯선 객과 눈 맞춤을 한다. 당돌한 20대 아가씨 같기도 하고 말괄량이 소녀 같기도 한 그림 속 그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의외로 그 모습이 하나같이 수줍다. 동그란 볼에 발그레한 홍조를 띤 모습, 천생 여자의 얼굴이다. 그림 속 여인들처럼 눈을 맞추지는 못하지만, 수줍은 듯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육심원 씨. 자분자분 말을 건네는 그 모습 또한 천생 여자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차분한 차림새지만, 그 눈매나 미소는 영락없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빨강 머리 소녀, 말괄량이 노랑 머리 아가씨다.

지난해 12월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연 ‘빌라 육심원’은 육심원 씨의 작품을 테마로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지하 1층은 갤러리, 1층은 아트 숍과 카페, 2・3층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 위층인 4층은 작가의 아틀리에로 꾸며져 있다.

언제나 젊고 발랄한 여자만 그리니 많은 사람이 육심원 씨를 독신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도 이제 결혼 4년 차에 이르는 주부란다. 2002년 당시 <행복>만큼이나 그의 첫 전시를 눈여겨본 이가 있으니 지금은 그의 남편이 된 갤러리 AM 대표 정경일 씨. 육심원 씨가 대중의 생활 속에 깊숙이 녹아든 작가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이가 바로 그다. 어느새 자리를 함께한 정경일 씨가 먼저 둘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나름 그림을 파는 재주가 있었어요. 대가의 작품, 이른바 돈 되는 작가들의 그림을 주로 다루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젊은 작가를 발굴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에 육심원 씨의 첫 전시를 보게 되었어요.” 그는 대학원 졸업전과 다름없는 전시로 신고식을 치른 어린 작가에게 다음 전시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기성 미술 시장에서 ‘팔리는 그림’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꿰뚫고 있었던 그는 육심원 씨에게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그림을 그려 오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뭐 이런 친구가 다 있나 했어요. 전시 열어주겠다고, 그림이 팔리는 작가로 키워주겠다고 그림을 그려보라는데, 순 만화 같은 것만 그려 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노력을 안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옆에 있던 육심원 씨는 지금도 억울한 듯 말을 덧붙인다. “남편이 나무라던 그 그림들은 저 나름 최선을 다해 요구하는 대로 그린 것들이었어요. 저도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함께 전시를 하기까지 2년이 걸렸는데, 인사동에 나가면 혹시라도 이 사람과 마주칠까 봐 길을 돌아갈 정도였다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며 전시 준비를 해나가던 어느 날, 정경일 씨는 육심원 씨의 그림을 바라보다 아차 싶은 생각이 들더란다. 이 그림은 만화 같은 점이 특징인데, 자신은 그저 그림을 팔겠다는 욕심에 젊은 작가의 개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그는 마음을 바꿔 육심원 씨에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라고 제안했다. “이미 육심원 씨의 그림을 팔겠다는 생각은 포기한 상태였어요. 그래, 기왕 함께 전시하기로 한 것, 신인 작가가 마음껏 자신의 창작 세계를 펼치게나 해보자 싶었지요.”

(왼쪽)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이 육심원 씨의 그림을 서양화로 오해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한지의 일종인 장지에 분채(분말을 물에 개서 쓰는 전통 물감)로 채색하는 전통 한국화 기법으로 이루어진다.
(오른쪽) 빌라 육심원 4층에 마련한 작가의 아틀리에.


갖고 싶은 그림, 가질 수 있는 그림 기존 미술 시장의 컬렉터들에게 그림 팔기를 포기하고 개최한 전시는 오히려 일반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 전시를 함께 하자는 다른 화랑들의 제안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앞으로 한 3년은 쉬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에 모든 제안을 거절했지요. 전시를 준비하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이 사람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호호.” “육심원 씨가 순진하고 순수했어요. 세상을 알고 영악했더라면 이렇게 의리를 지키며 함께할 수 없었겠지요.”라며 정경일 씨가 말을 잇는다.
아트 상품 하면 미술관 아트 숍에서 판매하는 해외 명화 제품이 고작이던 시절, 정경일 씨와 육심원 씨는 달력을 시작으로 아트 상품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도와 화랑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작품을 상품화하는 것에 대한 구상을 하곤 했죠. 육심원 작가의 전시를 하면서 마침내 그 가능성을 보았죠.” 언제나 금세 동이 나버리는 전시 도록을 보니 사람들이 육심원 씨의 그림을 ‘갖고 싶어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전시 때마다 만드는 도록을 달력 형식으로 대체하면서 아트 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도록은 결국은 금세 책꽂이에 꽂히지만 달력을 만들면 일 년 내내 곁에 두고 볼 수 있잖아요.” 정경일 씨가 처음 아트 상품 개발을 제안했을 때 반대했다는 육심원 씨도 도록을 달력으로 만든 것은 정말 맘에 들었다는 듯 이야기한다. 전시회를 위해 마련한 엽서와 달력 제작을 통해 확신을 얻은 정경일 씨는 직접 인쇄소와 제본소를 드나들며 다이어리를 개발했다. “2005년에 처음 다이어리를 만들어서 교보문고에 들고 갔어요. 일종의 행사를 통해 다이어리를 팔아보았죠. 첫날 매출이 50만 원이었는데 이를 보고 교보문고에서 입점하라고 하더군요.” 생각지도 않은 제안으로 얼떨결에 입점하려고 보니 재고도 충분해야 하고 제품도 다양해야겠기에 본격적으로 아트 상품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단다.

노트 커버에, 은행 통장에, TV 광고 속에 수도 없이 복제되는 작품을 보는 작가의 기분은 어떨까?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너무 남용되고 있다는 회의가 들지는 않는지 묻고 싶었다. 이를 눈치를 챈 것일까?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건만 그가 먼저 이야기를 건넨다. “솔직히…, 대학 시절부터 제 그림에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친구들이랑 그림이 너무 다른 거예요. 다른 친구들의 그림은 전형적인 동양화, 순수 회화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 반해 내 그림은 삽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스로 생각해도 내 그림으로는 편지지를 만들면 딱 좋은데… 뭐 이런 생각을 하곤 했으니, 제 그림으로 만든 노트가 팔리고 거리에서 아가씨들이 제 그림이 프린트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좋기도 하고 여전히 신기하기도 해요.” 미술계에서 큰 상을 받거나 평론가의 주목을 받은 적도 없다.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예고에 갔고 미대에 갔지만 대학원을 다닐 때도 내가 과연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용기와 명분을 세워준 것은 갤러리도 평론가도 아닌 일반 대중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

(오른쪽) 2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육심원 브랜드 핸드백

해외에서 팔리는 한국의 아트 상품 “홈쇼핑 TV 광고는 너무 상업적인 것 같아 처음엔 거절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광고를 담당한 회사의 국장님께서 직접 인사동 갤러리를 찾아오셨어요. 저희는 거절할 요량으로 높은 계약금을 요구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시더군요.” TV 광고에 작품이 등장하기까지 이들은 수없이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비교적 높은 계약금을 고수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선례를 남기고 싶었어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창작자에 대한 예우나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해요. ‘작품을 광고에 사용하면 당신이 더 유명해질 것이니 당신이 더 이득이다. 그러니 대가 없이 작품을 쓰겠다’는 이상한 논리죠.” 이 이상한 논리에 넘어가 정당한 보상 없이 작가의 작품을 사용하게 하는 풍토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정경일 씨는 말한다. 똑 부러지는 비즈니스맨 모습이 가히 작가 육심원 씨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낸 주인공답다. “해외에서도 ‘육심원’ 하면 알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 대중작가로 만들어내고 싶어요. 해외 옥션에서 어느 화백의 작품이 얼마에 팔렸다, 요즘 뉴욕 미술 시장에서 누가 잘나간다더라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것은 미술 애호가만을 위한 시장이잖아요. 외국에서도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한국 작가, 한국의 아트 상품 브랜드가 되도록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육심원의 아트 상품을 좋아하는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을 온다면 한 번쯤 빌라 육심원에도 들르겠죠.” 사진 찍는 것만은 극구 사양하면서도 작가 육심원 씨를 둘러싼 계획과 포부를 밝히는 데는 거침없는 모습이다.

(왼쪽) <행복> 2002년 10월호. 당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그는 <행복>의 표지 작가로 선정되는 행운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여자를 그리는 행복한 여자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인물화를 그린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왜 여자만 그리냐고 묻는데, 그건 제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여자가 좋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꽃과 같은 자연이나 사물에서도 감정을 느낀다지만, 저는 사람이 아닌 대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힘들어요. 젊은 여자를 그리는 것은 제가 주변에서 가장 쉽고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일 거예요.” 이제 나이가 지긋한 여자도 그려보고 싶지만 그 섬세한 감정 표현이 아직 쉽지 않다. 이번 개관전에서도 나이 든 여자 모습을 하나쯤 선보이고 싶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고. 경험해보지 못한 정서를 표현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다며 육심원 씨가 말한다.
작가의 작업실이라면 번잡함을 멀리하고 고요함을 친구 삼은 곳에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카페와 레스토랑을 이웃하는 그의 아틀리에가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람을 그리는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듯싶다. “며칠 전에 카페를 찾은 백발의 손님을 보면서 멋지다는 생각을 했어요. 친구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오셨는데 볕 좋은 창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이 참 좋더라고요.” 이렇듯 자신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모습들을 하나둘 접하다 보면 언젠가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자도, 멋지게 나이 든 할머니도 화폭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창밖 가로등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카페와 레스토랑도 조명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거리를 오가는 발길이 드문 만큼 빌라 육심원의 하루도 참으로 고요했다.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그림과 눈 맞추기도, 누군가와 마주 앉아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좋았던 시간. 2010년 새해의 첫 월요일, 작가 육심원 씨와 함께한 하루였다.

(오른쪽) 벽돌벽에 뾰족 지붕, 다락방의 정서를 담고 있는 아틀리에는 높은 천장고와 넓은 통창 덕에 채광이 좋고 시원스러운 맛이 있다.


빌라 육심원 지하 1층에는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다. 현재는 개관전인 육심원 씨의 여덟 번째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육심원 씨의 작품을 테마로 하는 공간인 만큼 한동안은 그의 전시가 지속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발표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