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바라본 거실. 우븐 소파, 트위스트 TV장 등 부드러운 선의 미학이 느껴지는 가구와 햇살이 어우러져 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따뜻한 공간을 완성했다. 오른쪽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 벤치 포 투, 코르트 스툴, 체어스 온 더 월 등 스토리가 있는 가구를 짓는다.
식탁은 한정현 작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무는 곳. 평소 갖고 싶었던 비트라의 포텐스 벽등을 달았다.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비밀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수납장이 일체형으로 구성된 침대는 리첸에서 제작. 룸포 키즈의 핸드메이드 장난감으로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복도에서 바라본 다이닝 공간. 회색 주방 가구는 문짝만 리폼했다. 주방을 비롯해 붙박이장과 CD장, 거실 선반장 등 가구 제작은 디자이너스 리첸(리첸 압구정점, 02-3447-0453)이 맡았다.
요소 1 여백
그림처럼 공중 부양한 의자(사실 선반), 체어스 온 더 월chairs on the wall. 가구를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시작한 이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디자이너 한정현의 집에 들어서니 역시나 하얀 벽 위에 이 의자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디자인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경쾌하게 ‘제약’을 깨뜨리는 그이기에, 머무는 공간 역시 자유롭고 유연하리라는 기대는 당연했다. 하지만 이 자유와 유연의 비결이 ‘여백’이라는 점은 왠지 아이러니하다. 가구 디자이너의 집인데, 이토록 심플하고 간결할 수 있다니.
“무엇보다 집은 안락하고 실용적이어야 해요. 그리고 그 안락함은 해방감을 주는 공간이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집을 레노베이션하면서 주문한 것은 딱 하나, 여유가 느껴지는 탁 트인 공간이었어요. 여백이 많은 공간은 언뜻 보기엔 허전한 것 같지만 세부적인 부분, 마감재 등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면 그 어떤 공간보다 따뜻하고 꽉 찬 공간이 완성되니까요.”
체어스온더힐 쇼룸이 있는 가회동과 가깝고, 주변 부대시설을 이용하기 좋다는 장점으로 광화문의 주상 복합 아파트를 선택했다. 주상 복합이지만 높이가 12층으로 제한되었고 광화문 한복판이면서도 무척 조용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지만 같은 평수의 아파트보다 전용 면적이 좁고 내부 구조와 동선이 답답해 레노베이 션은 필수적이었다.
대궐같이 넓지 않은데도 여백이 많다는 것은 결국 효과적인 구조 변경으로 널찍한 캔버스를 만들고, 공간 구석구석을 잉여 없이 잘 활용했다는 뜻일 터. 디자인을 맡은 버텍스 Vertex의 김택수 소장은 우선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 한쪽을 가로막는 주방의 벽면을 과감히 털어냈다. 거실 벽을 안방 쪽으로 1m정도 밀어 넣은 뒤 안방 문을 거실 끝 쪽으로 옮기니 주방에서 거실까지 하나로 탁 트인 스튜디오형 공간이 완성. 거실 벽은 모두 미색으로 도장하고 바닥은 회색빛이 도는 광폭 마루재를 깔았다. 내추럴한 바닥의 촉 감을 한껏 즐기기 위해 거실 테이블도 생략했다는 한정현은 부엌 역시 넓고 심플하게 쓰고 싶어 벽면과 함께 아일랜드까지 철거한 뒤 널찍한 다용도 테이블을 배치했다.
“집에 가구나 소품을 적게 두면 공간의 유동성이 커져요.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소파 테이블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대부분 발 거치대가 되거나, 매거진 랙으로 활용할 뿐이죠. 청소할 때마다 들어내기 힘든 무거운 카펫, 툭하면 전선이 발에 걸리는 사이드 테이블과 화기 등 가구나 소품을 채우는 데 급급하지 말고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할지 먼저 생각하는게 중요해요.”
남편은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다섯 살 난 딸 서윤이는 가슬가슬한 거실에서 맨발로 뛰놀며 즐거워한다. 엄마는 거실과 부엌 사이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신다. 이 집의 저녁 풍경은 대체로 이러하다.
레드 컬러로 포인트를 준 선반장이 거실 공간에 조형미를 더한다. 소파 왼쪽의 디어 캐비닛Dear Cabinet은 약장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제품으로 독특한 비례와 구조가 특징이다.
1 빌트인 냉장고 옆에 마련한 글래스 랙.
2 돌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타일을 각기 다른 크기로 잘라 마감한 욕실.
욕실에서 바라본 침실. 천장과 TV 쪽 포인트 월은 일본에서 공수한 친환경 벽지로 마감했다. 창문쪽 베란다를 확장한 뒤 날개벽에 책장을 짜 넣고 원형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책 읽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요소 2 와인과 음악와인과 음악을 좋아하고 디자인을 사랑하는, 다르면서도 참 많이 닮은 부부. 거실과 다이닝, 부엌의 경계를 없앤 이유 역시 부부의 이러한 취향을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식탁이에요. 서재가 따로 없으니 식탁에서 주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가회동 쇼룸이나 학교에 나가지 않을 때는 이 식탁에서 서윤이와 책도 읽고 그림 공부도 하지요. 와인을 좋아해 식사 시간도 긴 편인데, 거실과 다이닝이 이렇게 하나로 트여 있으니 집을, 공간을 200% 이상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식탁에 매치한 코르크 앤 코르크 벤치(코르크 마개를 사각 틈에 끼워 넣을 수 있는 디자인으로, 디자이너와 사용자가 함께 디자인을 완성한다는 새로운 장르를 연 작품), 빌트인 냉장고 옆 와인 랙, 식탁과 소파 사이 책장에 꽂힌 와인 관련 책은 와인을 즐기는 부부의 취향을 오롯이 드러내는 요소. 또한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으로 꼽히는 거실 아트월은 남편의 오디오 시스템을 위해 탄생한 공간이다. 조형적 트위스트 테이블 위의 오디오, 스피커에 맞춰 움푹 들어간 벽 안쪽에 외장재인 시멘트 블록을 쌓은 뒤 박선기 작가의 숯 설치 작품을 배치한 아트월은 완성한 것임에도 마치 미완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디자인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주거 공간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는 점이에요. 일반적이라면 부엌과 거실을 분리하고, 서재도 하나쯤 구성했겠지만 이 집은 서재 대신 아이 방이 두 개, 현관문을 열면 주방과 거실이 하나로 펼쳐지죠. 또 보통이라면 단순히 소파를 두거나 전면 책장을 짜 넣었을 벽에 ㄱ자형 선반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장과 소파를 두니 오히려 하나의 아트월처럼 연출되었고요.”
건축가답게 시원시원한 선을 살리면서 한정현의 가구도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공간을 완성한 김택수 소장. ‘디자인의 시작은 디자이너지만 완성은 사용자의 몫’이라는 집주인과 그의 디자인 철학이 통했기에 교과서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이처럼 개성 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리라.
1 거실 날개벽에 시공한 CD 장. 레일을 깔아 이중으로 수납할 수 있다.
2 테이블은 상판 두께가 점점 두꺼워졌다 다시 좁아지는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3 네모반듯하지 않고 사선으로 꺾이는 벽이 있어 더 재미있는 공간이 완성된 아이 방.
4 아이 방 베란다는 피겨를 넣을 수 있는 조명등과 좌식 체어로 꾸몄다.
거실 아트월은 벽을 침실 쪽으로 1m 정도 밀어 넣고 시멘트 블록으로 마감했다. 트위스트 테이블, 박선기 작가의 숯 설치 작품을 매치했다.
요소 3 동심
작품 활동을 하며 개인전과 그룹전을 꾸준히 기획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로 임용되는 등 줄기차게 달려온 커리어의 여정 속에서도 그는 다섯 살 난 똘이(태명)를 위해 키즈 가구를 디자인하고, 브랜드와 협업해 양산하는 등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알파 맘이다. “다섯 살 난 똘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 발달이라고 생각해요. 무한한 상상과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마음껏 어지르며 놀 수 있는 공간을 선 물해주고 싶었어요. 또 똘이만의 비밀 공간도 만들어주고 싶었고요. 피겨를 넣은 조명등과 좌식 의자로 꾸민 작은 발코니, 봄이 되면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겠죠?”
아래층은 침대, 위층은 놀이 공간, 수납장이 일체형으로 구성된 아이 방 침대는 그가 디자인하고 리첸에서 제작한 것. 욕실의 욕조를 없애면 아이가 물놀이하기 좋다는 김택수 소장의 조언에 따라 거실 욕실은 욕조를 없애고 미끄러짐 방지 타일을 시공했다. ㄷ자형 주방은 아일랜드 조리대를 없애 폭이 꽤 넓은 편인데, 그가 부엌일을 할 때도 졸졸 쫓아다니는 아이가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놀아도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아 좋다. 바닥에 둔 이동열 작가의 작품과 그 옆 자그마한 스툴 그리고 그 위에 낮게 단 시계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위해, 아이 눈높이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이전 집은 곳곳에 CD며 아이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어요. 이번에 디자인을 하면서 살림살이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수납장의 규모와 짜 넣을 공간을 정했지요. 남편 책은 침실 창가 쪽에 책장을 짜 넣고 수납한 뒤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책 읽는 공간으로 꾸미고, CD는 거실 창가 쪽 날개벽에 이중 레일 장을 짜 넣고 수납했더니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바로바로 정리할 수 있어 좋아요. 적재적소의 수납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지요.”
물건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것, 여백이 충분한 집에 산다는 것은 결국 삶의 주도권을 사람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책 몇 권, 푹신한 소파 하나로도 안락함이 완성된다. 또한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모든 게 작품이 되고 매 순간이 소중하다. 창가로 쏟아지는 빛, 벽에 걸린 선반 하나도 존재감이 있는 이 집이 여유로우면서도 따뜻한 비결, 바로 ‘여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