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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택수 집은 삶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영화 <건축학개론> 이후 건축가는 낭만적 직업의 상징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름다운 집을 짓는 로맨티스트, 건축 기법은 물론 미술ㆍ음악ㆍ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해박하고 감성적 언어로 논리를 펼 줄 아는 그들은 공학과 예술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명민함을 갖췄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때는 시인이, 건축주를 설득할 때는 달변의 카운슬러가 되는 그들의 다양한 역할놀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하나의 연극 무대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스스로 배우이자 연출가가 되어 ‘건축’을 주제로 삶의 희극을 짓는 건축가 김택수의 무대.

고양시의 평범한 농가 주택을 고쳐서 사는 김택수 소장 가족. 집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외벽을 진한 회색으로 도장하고 정면에 탄화 오크목 파티션을 세워 모던하게 완성했다. 파티션을 여닫으며 바람길을 만들고 직사광선은 막아주는 쾌적한 보금자리다.
산 아래 타공판이 날아다닌다. 열다섯 개의 커다란 타공면이 서로 만나 기울어지고 틀어지고 휘어지면서 경쾌한 입면을 만들어낸다. 옆 건물의 파사드에는 갖가지 컬러풀한 파이프 기둥이 삐딱하게 서 있으며 그 사이사이 타공판이 휘휘 춤을 춘다. 타공판이라는 색종이와 파이프라는 수수깡이 만든 아이들 세상. 기존 건물의 입면을 감싸고 캐릭터를 부여하는 작업으로 짧은 시간과 저비용의 한계를 극복한 ‘인천영어마을’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건축가 김택수를 세상에 알린 첫 번째 무대다. 우선 약간은 생소한 이름, 김택수를 소개한다. 그는 호주 더글라스마슨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RMIT(왕립 멜버른 공과대학)에서 데커레이션과 실내 건축을, 미국 Sci-ARC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2002년 귀국해 자신의 영어 이름을 따 건축사 사무소 버텍스 디자인Ver-TEX Design을 개소한 그는 처음 4~5년간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작업했다. “모두 기피한다는 백화점 매장 디스플레이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죠. 신축보다는 주로 리모델링 작업을 하며 어떻게 하면 기존 건물에 새로운 콘셉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일이었는데, 지금껏 좀 ‘다른’ 작업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찢어진 청바지의 실오라기가 매장 밖으로 튀어나와 파사드가 된 프리미엄진 파라수코 매장, 거대한 스시 한 점과 젓가락이 천장 조명등으로 변해 회전 카운터를 살포시 감싸는 스시집 유끼노스시. 특별하지 않은 요소로 특별함을 만들 줄 아는 남자 ‘김택수’를 알아가는 과정이 벌써부터 흥미롭다.

1 다이닝룸에서 바라본 부엌과 거실. 주말에는 딸 태서와 함께 요리하는 일상이 즐겁다. 
2 존재 자체로 공간에 온기를 더하는 벽난로는 중고 나무 시장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것. 김택수 소장이 학창 시절 즐겨 듣던 LP와 함께 복고적 무드를 연출한다. 

1막 1장, 발견
북한산에서 뛰놀던 유년기를 보낸 김택수 소장은 사람보다 장소를 더 오래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아이로 자랐다.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사진을 부전공했으며, 무대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떠난 호주 유학. “무대가 익숙했기 때문일까요? 멜버른의 화려한 건축물을 볼 때마다 왠지 입체적인 연극 무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이 배우, 관객, 희곡 이외의 수많은 요소가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해 완성되는 종합 예술인 것처럼 건축 역시 건축주와 건축가, 다양한 재료가 빚어내는 종합 예술이잖아요.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이 떠올랐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던 우리 가족의 드라마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죠. 제 작업의 엉뚱함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공간을 연극 무대로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에서 비롯한 거예요.”

2005년 인천영어마을. 학원 사업을 하는 건축주는 자신이 손수 지은 건물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컸단다. 김택수 소장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고, 또 경제적으로 레노베이션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다. 그러자 문득 어릴 때 산등성에서 날리며 가지고 놀던 종이비행기가 떠올랐다. 한장의 종이로 여러 가지 새로운 모양을 창조하는 종이접기 과정은 창의력은 물론 색채와 공간 구성의 이해를 돕고 동심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아닌가. 그리고 종이는 비스듬한 타공판이 되어 공간을 가로지른다. 두 겹의 타공 철판 스크린은 기존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반사시키고 기존 건물과 섞여 다이내믹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잘 알지도 못하는 건축가가 어디서 툭 튀어나와 단 3개월 만에 전혀 새로운 건물을 만든 거예요.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려면 무조건 과정이 쉬워야 해요. 어려운 의미를 부여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마감재를 치장하면 결코 쉬운 작업이 될 수 없지요.” 어린이가 머무는 공간이기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대입하고, 쓱쓱 그려 뚝딱 감쌌을 뿐인데 아트가 되다니, ‘쉬운 게 가장 높은 경지’라는 사실을 아는지!

3 천장의 구조를 털어내 생긴 박공 지붕 아래 마련한 다락방. 태서가 좋아하는 민트 컬러 백페인트 글라스를 벽에 설치하고 창가에 빨간 의자를 두니 경쾌한 컬러 포인트가 된다.
4 거실에서 주방을 바라본 모습. 메자닌 형태의 오픈 구조라 집 안 어디에 있든 가족은 서로 소통할 수 있다.
5 매트리스만 두고 가구를 최소화해 간결하게 꾸민 침실. 천장을 털어내 생긴 박공 구조와 작은 창의 흔적이 공간에 재미를 더한다.

1막 2장, 도약
“한국에 와서 놀란 게 병원 전문, 오피스 전문, 주거 전문, 레스토랑 전문 등 각 분야별로 전문 디자이너가 있다는 점이었어요. 해보지 않았기에 더 재미있는 디자인이 나올 수도 있는데, 기회 자체가 생기지 않더라고요.”

경험이 없기에 경험할 수 없는 ‘웃픈’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경험’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여기저기서 버텍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먼저 ‘벽은 고정되어 있다’는 편견에 도전했다. 꺾인 벽, 둥근 벽, 계단 천장 등 평면 구조를 3D 입체로 만드는 센세이션한 디자인은 저비용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어 와인 바, 의류 매장, 레스토랑, 요가 스튜디오 등 다양한 상공간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간 공간 마감재로 인정받지 못한 아크릴, 폴리카보네이트, 부식 스테인리스, 콜게이트메탈(골함석), 밤라이트 등을 적용한 것 역시 강점 요소였다. “미국 건축사무소 미셸 사에 Michele Saee에서 일할 때 파리 개선문 앞 퍼블리시스 드러그 스토어 설계에 참여했어요. 왕립 아파트 건물을 유지하면서 현대적 쓰임을 복원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아크릴과 타공판으로 디자인한 파티션을 건물 외벽 전체에 감쌌는데, 명
실공히 파리의 명물이 되었죠.” 유리를 잡는 구조체도 디자인 요소가 될 수 있고, 아크릴 같은 값싼 소재로도 충분히 세계 최고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으니 이런 각본 없는 드라마가 또 있을까?

1 다락방에서 다이닝룸을 내려다본 모습. 집 내부는 자작나무 합판으로 마감했다. 일정한 크기로 재단해 아예 공장에서 코팅까지 해 와 내부 도장 공정을 생략하는 방법으로, 비용과 공사 기간을 줄이고 도장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 
2 철심을 그대로 노출한 계단은 사실 다락방을 받치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 
3 종이비행기를 모티프로 타공판으로 입면을 감싸 리모델링한 인천영어마을. 최근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재생’키워드의 작업으로 발표 당시 화제를 모았다. 

1막 3장, 환기
사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나오는 건축가 설정은 허구에 가깝다. 휴일에 야구 시합을 하기는커녕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며, 자신이 디자인한 건축물 준공식에 참석해 드럼을 치는 일보다 현장에 가서 잔디를 깔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테니. 그 역시 최근 몇 년간은 홈페이지에 포트폴리오도 올리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설계팀 식구가 스무 명 가까이로 늘어났어요. 야근이나 밤샘 작업이 많은 터라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죠. 집처럼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을 찾다 가회동 주택과 인연이 됐죠. 지은 지 30년쯤 되는 이층집을 개조해 사무실로 쓰고 있어요.”

현관문을 열면 바로 앞에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있고, 2층의 널찍한 테라스가 연식을 짐작케 하는 오래된 주택. 1층 직원 사무실은 자작나무 패널로 마감해 실용성을 강조했고, 2층 김택수 소장의 사무실과 회의실은 박공 구조를 살린 뒤 화이트로 도장해 편안한 개방감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전면 창을 크게 내어 가회동 풍광을 파노라마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 일정에 쫓길 때도 가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소중하단다. 최근 몇 년간 이곳 역시 숨 가쁜 변화를 맞고 있지만 그래도 한적한 주택가라는 점이 위로가 된다.

“세로 나무 패널을 붙인 계단실은 하얗게 도장하니 자연스러운 스트라이프 패턴처럼 보이죠. 겹겹의 기와지붕이 바라보이는 창은 마치 그림 액자 같아요. 새 집을 설계하는 것도 좋지만, 이처럼 남이 설계한 집의 구조를 살리면서 새로운 무엇을 더했을 때 의외로 재밌는 결과물이 나오면 희열이 커요. 그래서 작년에는 경기도 삼송리에 농가를 샀어요. 개조해서 살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1 30년 된 이층집을 레노베이션한 가회동 버텍스디자인 사무실. 구조 보강을 위해 철제 빔을 설치한 트러스 구조가 그대로 디자인 요소가 되어 공간에 역동적인 느낌을 불어넣는다. 
2 북촌의 기와지붕이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이 마치 작품 사진처럼 아름답다. 

1막 4장, 소생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건축가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사가 자기 병 못 고치듯, 사실 건축가야말로 자신이 설계한 집에서 사는 일은 손에 꼽는다. “저 역시 편의상 아파트와 빌라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문득 아이가 아직 어린 지금이야말로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적기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저 어릴 때처럼 들로 산으로 마음껏 뛰어놀라고 아예 시골로 갔지요. 초등학교도 공부 많이 안 시키는 곳으로 보내려고요.”

뉴타운 개발로 대형 아파트 단지와 농지가 공존하는 경기도 고양시의 한적한 마을. 우연히 지나가면서 땅이나 알아보자고 들른 이 마을에서 고라니와 눈이 마주친 후 운명을 감지한 그는 아내를 설득해 이주를 결정했다. 2백70평의 넓은 땅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서른 평 남짓한 단층 주택. 새로 지을까도 고민했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기존 집을 잘 이해하다 보면 사실 더 재밌는 디자인이 나오는 법. 물컵 두는 자리까지 하나하나 의도해 설계한 집이야말로 의외성이 없어 쉽게 질린다는 것이다. 우선 빨간 외벽은 짙은 회색으로 도장했다. 마당 잔디와 나무가 푸르면, 굳이 또 다른 색이 필요하겠나 싶어서였다. 집 내부는 자작나무 합판으로 마감하고 방과 거실, 부엌 모두 옛날 집 구조 그대로를 살렸다. 추가한 건 집 밖으로 확장한 온실 형태의 다이닝룸과 다락방뿐. 거실과 현관 사이에 가벽을 하나 세우니 한쪽은 신발장으로, 한쪽은 TV 수납 벽으로 활용하고, 가벽 위로 다락방 구조를 올렸다. 오래된 집을 레노베이션하면서 구조 보강 용도로 설치한 에이치빔 역시 그대로 노출해 장식 요소로 활용했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파사드처럼 연출한 나무 파티션. 야외 덱으로 연결되는 통창에 커튼을 다는 대신 빛과 프라이버시를 조절하는 건축 요소로 파티션을 활용한 것이다. 여름의 강한 빛과 겨울의 사나운 바람까지 컨트롤하는 파티션은 슬라이딩 도어처럼 열리고 닫히는 디자인으로 여는 정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연출한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뀔 것을 염려하는 대신 오히려 그 변화를 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을 즐기는 김택수 소장. 건축가들은 얼마나 근사하게 해놓고 살까? 얼마나 멋지게 살까? 그의 집을 다녀오니 이런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된 듯하다. 우선 건축가의 집은 스토리가 많다. 사는 이야기가 풍부하고 새로운 시도와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특별한 것 없이 특별하기에 더 멋진 것이다.

3 버텍스디자인 식구들. 가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2층 테라스에 모여 담소를 즐긴다. 
4 주방 옆에 있는 방은 외벽을 털어내 공간을 밖으로 확장한 후 커다란 테이블을 두어 다이닝룸으로 꾸몄다. 해가 지면 노란 불빛이 퍼져 마치 하나의 조명 박스처럼 너른 마당에 따스한 기운을 전한다. 

그리고 2막
“태서는 다락방이 완전 자기 아지트예요. 발레를 전공한 아내는 덱에서 스트레칭할 때가 가장 좋다고 하고요. 제가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 부엌이에요. 요리 담당이죠.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워 요리를 하고, 사람들을 부르죠.” 사실 음식과 건축은 비슷한 면이 많다. 누가 먹느냐에 따라 메뉴는 물론 재료 선택과 양념의 배합이 달라지듯, 건축 역시 취향과 예산에 따라 설계가 달라지니.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두르며 “레시피대로 가는 건 재미없어요”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마치 다 자란 어른이 집짓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신난 표정이다.

 “이 집을 지었을 무렵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때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듬어보면서 집에 녹아든 시간의 기억과 기억을 연결하는 재미가 크다”며 자신이 경험해온 삶의 궤적을 공간에서 실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건축가 김택수. 건축가 조성룡은 “각자의 인생에서 기억하는 조그만 파편을 언제라도 다시 부를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게 건축가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택수 소장은 꽤나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건축가다. 기자 또한 그의 집에서 어떤 날의 기억을 보았고, 따뜻한 시선을 느꼈으니.

“오래된 집은 이전에 그곳에서 살다 간 삶을 간직하고 있어요. 일상의 드라마와 환희를 목격했고, 변덕스러운 인테리어의 유행을 감내했으며,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을 테고요. 이러한 집은 우리 태서에게도 훗날 잊기 힘든 온갖 기억 과 성장의 순간을 보존하는 공간으로 존재하겠죠.”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의 집, 현재 사는 집, 그리고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 이 작은 농가 주택을 무대로 펼쳐질 세 가족의 드라마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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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