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한산도 앞바다가 펼쳐지는 ‘휴석재’. 몸이 아팠던 집주인 이상희 씨가 10년간 휴가 받아 손수 지은 집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기계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생로병사 生老病死’다. 생로병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문명의 발달은 생로병사에다 포장지만 바꾼 것이다. 생生은 나도 모르게 어머니 배속에서 나왔지만 그다음에 기다리는 코스인 노병사 老病死는 그저 두려울 뿐이다. 저 고개를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걱정이 생긴다. 특히 병 病이 그렇다. 지극한 고통이다. 저녁에 이부자리 펴놓고 자다가 아침 오기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리는 청복 淸福은 없는가! 살다가 큰 병인 암 癌이 오면 그다음에 어떤 행보를 보여야 한단 말인가?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부엉이 바위 밑에 있는 휴석재 石齋 는 암 선고를 받은 40대 중반의 남자가 지은 집이다. 휴 는 부엉이 ‘휴’ 자이다. 그야말로 죽기 전에 한 번 짓고 싶었던 집, 살고 싶었던 집을 지어볼 생각이었다.
집주인인 이상희 씨는 64년 용띠이다. “어쩌다가 암에 걸렸는가” “사업이 복잡해지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 43세에 위암 선고를 받았다. 집사람이 당신 살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라고 10년 휴가를 주었다. 자신이 생계를 책임질 테니까 10년 휴가를 떠나보아라, 이렇게 해서 바닷가에 터를 잡고 5년째 조그만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집사람 잘 만나서 아직 죽지 않고 5년째 살고 있다. 여기 오지 않고 사업 문제와 돈 문제로 골몰하였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처와 딸 둘은 통영 시내에서 산다.”
1 집 뒤쪽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있다. 집주인 이상희 씨는 이곳 동산에서 자신이 먹을 채소를 자급자족한다. 야생화를 가꾸고 젓갈을 담그며 존재의 가치를 찾았다.
2 창문 너머 바로 바다가 보인다. 거실 차탁 앞에 앉았을 때 정면으로 바라보면 산의 능선이 보이도록 창문 높이를 조절했다.
3,4 옆 펜션으로 잠시 입양 보낸 ‘사랑이’. 목줄을 풀어놓으면 어느새 휴석재 앞마당까지 달려와 친구와 뛰어논다.
육지가 끝나는 곳, 바다가 시작된다
산양읍 신전리는 조그만 어촌이다. 가구 수도 20가구 미만이다. 휴석재 마당에서는 바다가 곧바로 보인다. 이 바다는 한산도 앞바다이다. 태풍 불 때 빼고는 풍랑이 없을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바다이다. 호수 같은 바다라고나 할까. 고깃배가 다니고 흰 바다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염기가 있는데도 호수의 정서를 지닌 바다가 한산 앞바다이다. 장점만 모여 있고 단점은 빠진 바다임이 분명하다. 이런 지점에 이상희 씨는 혼자서 집을 지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푸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비범한 장소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산과 바다가 그곳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바다 옆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머리가 복잡하고 열이 올라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은 산보다 바다가 낫지 않나 싶다. 물론 체질과 취향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바다를 먼저 보면 열이 식는다. 눈으로는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소금기 머금은 해풍에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 좋다. 섬에 간다는 것은 고립된 지역으로 가는 셈이다. 배를 타고 물을 건너다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의 일정 부분은 털어내게 된다. 바닷물로 둘러싸인 섬에 오면 고립감을 느끼는데, 이 고립감이 생각을 끊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처음 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자연을 닮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살지 못해서 병이 들었다는 반성을 뼈저리게 하였다. 집도 자연을 닮고 나도 자연을 닮은 남자가 되고 싶었다. 집에 있는 음식 담는 그릇도 내가 직접 만든다. 손으로 흙을 빚어 아는 분의 가마에 가지고 가서 굽는다. 화분에 있는 꽃도 야생화가 많다. ‘야생분경’도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시간만 나면 집 뒤의 산에 올라가서 나무와 꽃과 약초와 야생화를 관찰한다. 이 집도 지은 지 5년 됐다. 하지만 다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천천히 짓고 있는 중이다. 천천히 짓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서이다. 물론 나 혼자 짓고 있다. 시간 날 때마다 굴뚝 벽돌도 한 장씩 쌓아 올리고, 아궁이의 흙도 바르고, 실내 인테리어도 하나씩 가다듬는다. 집 안의 목제 가구, 기둥, 서까래, 여러 장식품도 모두 직접 만든 것이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생활용품은 내 손으로 직접 하나씩 작업하고 있다. 직접 만든다는 것이 엄청난 생활의 충실감을 주기 때문이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존재의 쾌감이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요즘 흔한 우울증은 인간이 손을 쓰지 않아 서 생기는 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쓰면 생각이 손으로 간다. 손으로 간다는 것은 근심 걱정을 머리에서 손으로 잠시 이동시키는 작용을 한다. 잠시라도 근심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도 어디인가! 손이 주는 공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손으로 하는 것 중에는 요리가 있다. 휴석재 주인 이상희 씨는 요리에 조예가 깊다. 한번은 바다에서 채취한 파래로 만든 ‘파래전’을 먹어보았는데,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독특한 풍미였다. 바로 집 앞의 바다에서 채취한 파래였다. 그 맛을 보고 만파식미 萬波息味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삼국유사>에 보면 만파식적 萬波息笛이라는 피리가 나온다. 이 피리를 불면 바다의 파도가 잠잠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음식 맛을 보면 만 가지 파도가 잠잠해질 것 같다. 그래서 ‘만파식미’이다.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 바다의 용왕도 흡족한 생각이 들어서 파도를 잠재워줄 것 아닌가.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조용해진다. 일단 까다로운 상대는 미식 美食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만약 미식을 먹고 나서도 여전히 까다로운 사람이라면 상대할 필요가 없다. 천출 賤出이 분명하다. 천출은 구제 불능이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요리에서도 그는 ‘자연’을 강조한다. 병이 들어본 사람의 철학인 것이다.
살아 있는 바다에서 주식동원 住食同源
“어떤 음식에 관심이 많은가?” “예를 들면 젓갈류이다. 젓갈은 3년 묵은 소금으로 담가 야만 제맛이 난다. 그 3년 동안 간수가 빠지는 것이다. 간수가 빠지지 않은 소금을 쓰면 제맛이 안 난다. 간수가 빠진다는 것은 독성이 빠진다는 말이다. 인간도 이처럼 세월의 발효가 있어야만 독성이 빠진다. 멸치젓, 갈치젓, 호래기젓갈을 담근다. 해풍이 어느정도 있어야만 맛이 든다. 그리고 공기도 좋아야 한다. 매연이 많으면 맛이 떨어진다. 휴석재 뒤에는 산이 있다. 숲에서 좋은 에너지가 나온다. 이런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음식과 젓갈에 맛이 들어간다.”
“멸치젓은 어떻게 담그는가?” “멸치젓도 봄에 담그는 봄 젓이 있다. 이것을 ‘봄멸’이라고 부른다. 그다음에는 가을 젓을 담근다. 통영산 멸치를 사용한다. 이 멸치도 재료가 중요하다. 먼 바다에서 그물로 잡은 멸치는 맛이 떨어진다. 스트레스를 받은 멸치라는 말이다. 통영 앞바다에서 미리 그물을 쳐놓고 있다가 걸린 멸치로 젓을 담가야 맛이 좋다. 쳐놓은 그물에 들어와 잡힌 멸치는 스트레스를 덜 받기 마련이다. 정치망으로 잡은 멸치가 바로 이것이다.”
“젓갈은 냉장고가 나오기 전에는 부자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여름에 상하지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만석꾼 집의 여름 밥상에는 젓갈이 10가지 이상 나왔다고 한다. 여름 입맛 돋우는 데는 젓갈이 최고였던 것이다. 다른 음식은 여름에 상한다. 서남해안을 따라서 여러 가지 젓갈이 있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갈치젓은 어떤가?” “갈치는 살젓이 좋다. 3년 묵힌 소금을 넣고 대형 항아리에다 담근다. 대형 항아리는 발효가 잘된다는 특징이 있다. 갈치는 역시 통영 갈치가 맛있다. 갈치를 다 듬을 때 입과 꼬리는 떼어낸다. 그다음에는 몸통과 내장을 통째로 항아리에 넣는다. 그리고 15일 정도 숙성을 시킨다. 15일쯤에 일부는 꺼내서 먹을 수 있다. 살을 떼어서 먹고 나머지 부위는 3개월 정도 더 삭힌다. 갈치젓을 담글 때 비결 중의 하나가 제피(젠피)를 넣는 것이다. 비린내와 독성을 잡아준다.”
(왼쪽) 향토 음식 연구가인 그는 얼마 전 산지에서 구한 생멸치로 멸치젓을 담갔다.
산초와 비슷한 제피는 독특한 향을 풍기는 향신료이다. 구충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고대의 대가야 문화권에서는 음식에 제피를 넣어 먹는 습관이 있다. 대가야 문화권이라고 하면 김해에서부터 통영, 진주, 산청 그리고 남원, 구례, 순천 까지를 포함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김치를 담글 때나 아니면 추어탕을 끓일 때 제피를 넣는다. 그러면 비린내가 사라지면서 독특한 향이 입맛을 돋운다. 전남 순천 쪽은 ‘젠피’라고 발음하고 통영 쪽은 ‘제피’라고 발음한다. 고려시대에 수도였던 개성 사람들은 산초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산초의 맛을 알았던 것이다. 개성은 예성강을 통하여 중국과 교역이 많았던 물류 도시였다. 이국의 취향이 바로 산초였던 것이다. 남부 지역에는 산초 대신 제피였다.
휴석재 주인은 장아찌도 잘 만든다. 산에서 채취한 제피잎과 가시 오가피잎, 그리고 은개두릅으로 장아찌를 만든다. 들에서 채취한 깻잎, 고추, 가지로도 만든다. 바다에서 채취한 톳, 파래, 모자반 등을 이용하여 역시 장아찌를 만든다. 바다에서는 직접 해초를 채 취하고, 땅에는 채소를 심고, 산밭에서는 약초를 채취한다. 이걸 모두 음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손재주가 좋아서 못하는 게 없다. 손재주 없는 나는 병이 들어 버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음식도 못하고 손재주도 없으니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집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집과 음식이 같은 쳇바퀴로 돌아가는 탓이다. 식 食과 주 住는 동원 同源이다. 좋은 집에 음식이 없으면 궁합이 안 맞는다. 더군다나 삶의 의욕은 먹고 싶은 식욕에서 나온다. 살기 싫어질수록 입맛을 돋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자꾸 먹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혀의 장점은 이데올로기 논쟁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맛은 누구나 똑같이 공통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휴석재에서 하룻밤을 잤더니 창밖의 한산바다 풍경이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태고 시절의 그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 내가 들어와 있다. 바닷속에 내가 떠 있다니! 집주인은 아침 일출이 올 때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 태양을 겨냥해서 찍는다. 바다 위의 일출은 언제나 삶의 의욕을 준다. 일출을 찍을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밤에 달이 뜨는 시점에는 술을 마신다. 인근의 선배가 석곡 石蘭의 꽃을 따서 담근 난주 蘭酒를 한 모금만 마신다. 석란과 오미자, 그리고 솔잎과 매실을 넣어서 우린 난주는 가히 신선의 향취를 지니고 있다. 석란은 통영, 고성, 거제, 남해 일대의 바닷가 바위 절벽에서 자생하는 난이므로 다른 지역에서는 서식하지 않는다. 이 석란으로 만든 술을 먹어야만 휴석재의 밤 바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이국의 향취가 풍기는 신선의 술로, 신선 같은 풍경을 보아야 이 세상 살고 간 것 아니겠는가!
가장 압권은 한산바다에 해무가 가득 차 있을 때이다. 오직 안개 뿐이다. 바다인지 육지인지, 천상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때는 존재를 잊어버려야 한다. 그야말로 몽유해원도 夢遊海園圖가 연출된다. 이 풍경을 보고 사는데 어찌 병이 낫지 않겠는가. 10년 휴가를 받은 중년 남자의 로망이 서린 집이 바로 부엉이 바위 밑의 ‘휴석재’이다.
(오른쪽) ‘바다로 가는 길’이라는 글귀와 바다가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인다. 휴석재, 바다로 가는 길 등 모든 현판은 직접 깎아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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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행복>에 연재되었던 백가기행 칼럼을 엮어 출간한 <조용헌의 백가기행 白家紀行>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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