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04월 죽음, 그 쓸쓸함에 대하여 (박영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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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은 늘 예감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닥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결국 오롯이 내 것이 되었다. 죽음은 죽은 자와 무관하다. 그것은 오로지 산 자의 몫이다. 나는 죽는 날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인정이 많고 다감한 면이 있으셨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술주정과 폭력, 급한 성격, 어머니와의 끝없는 불화가 나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가정에서 30여 년을 버텼다. 그것은 다소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일찍 퇴사한 후 오랫동안 실업자로 지낸 아버지 때문에 경제적 궁핍도 겪었다. 무지하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악착스럽게 생활하신 어머니 때문에 가정은 겨우 유지되었다. 함경도 원산이 고향인 아버지는 실향민으로서 상실감과 고독, 그리움을 평생 안고 계셨고 그 무게로 자멸한 분이다. 명절이면 늘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동생 생각에 마음 아파 하셨고 그런 날은 항상 대취하셨다. 그러니 내게 명절날은 다른 날보다 못한 날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원산에서 보낸 유년 시절,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얘기, 금강산으로 간 수학여행, 홀로 월남하셔서 겪은 고생담, 일본에서 공부하고 오신 작은할아버지가 유명한 극작가인데 좌파라 월북했다는 말씀, 그리고 한국전쟁기에 숨어서 지켜본 인천상륙작전 등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즐겨 들었다. 나는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아버지의 이북 말투가 맛이 있었다. 일상에서도 아버지는 늘 이북 말투로 말씀하셨다. 나를 부를 때도 ‘간나 새끼’‘에미나이’ 등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이북 말투를 들을 수 없다. 그 음성이 그리운 것이다. 저녁이면 아버지는 일본의 <문예춘추>를 즐겨 읽으셨고 일본어 문고판도 자주 보셨다. 당시 나는 독해할 수 없는 그 이국 문자들에 매료되었다. 나름 문학청년이던 아버지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월남해 갖은 고생을 겪고 첫 결혼에 실패하는 등 나름 파란만장한 생을 어렵게 사셨다. 그러니 술만이 위안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나는 아버지의 이북 사투리와 술주정과 버럭 하는 성격을 더는 접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그토록 싫어서 아버지를 두려워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두려움이 이제는 은은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내 안에 죽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스멀거리면서 죽지 않고 살아나고 있다. 부재와 망실 그리고 추억과 회한 등이 착잡하게 엉킨 이상한 감정과 그리움과 애증을 안고 나는 평생 살아갈 것이다.
나 또한 죽음을 준비하면서 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간직할 이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새삼 생각해본다. 죽음이란 생물의 생명이 소실되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없던 내가 다시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나는 사실 부재였다. 완전한 무無였다.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회귀하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만큼 엄정한 진실은 없다. 생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조건 속에서 펼쳐진다.
한순간을 산다는 것이 생명체의 조건이다. 누구도 그 조건을 위반하거나 거스를 수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인 것이다. 언젠가는 끝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삶의 아이러니이고 매력이다. 이 순간을 산다는 의식,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심정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을 질투했다고 한다. 영원히 사는 신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인간이 지녔기 때문이다. 소멸과 애도, 상실과 슬픔이란 감정 그리고 모든 것이 종내 사라진다는 허무감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다.
상실의 고통은 힘겨운 일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 또한 우리의 과제겠지요. 두려움이 그리움이 될 때 죽음이 더 이상 아픈 기억이 아니라고, 그것이 인간다움이라고 말하는 박영택 교수는 경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미술 평론을 합니다. <미술 전시장 가는 길>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 등 미술 관련한 책과 <수집미학> <하루> 같은 편안한 에세이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