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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너는 모른다 나 역시도 (양창순 박사)

양창순 박사의 네 번째 글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가 정이현 작가의 <너는 모른다>라는 책 제목에 눈길이 갔다. 그 제목을 보는 순간 “그래, 너는 모른다. 나 역시도 그렇지만…”이란 독백이 절로 나왔다. 아마도 요즘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 때문이었던 듯하다. 누구도 결코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스스로도 모른 채 저지르는 잘못은 어디까지 허용하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새삼 머릿속을 어지럽힌 것이다.

임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의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비상식적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나는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상대방을 만날 때 가장 난감하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대개는 그 터무니없음에 웃고 말지만, 때로는 어디까지 참아주어야 하는가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삼 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꼭 터무니없고 비상식적인 경우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도 이런 사례는 자주 생긴다. 예를 들어, 자기는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큰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의 정당성을 굳게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이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가 무너지지만, 정작 상대방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결국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결혼 10년 차인 커플이 있었다. 그쯤이면 대개 결혼 생활이 심드렁하게 마련이다. 특히 남편 입장에서는 직장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힘에 겨웠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꼼짝없는 ‘샌드위치 신세’였다. 부하 직원 단속하고 상사 눈치 보느라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마저 이따금 그를 ‘돌게 만들었다’.

이번에 그의 ‘꼭지’를 돌게 만든 건 큰 사건도 아니었다. 그의 생일이어서 아내와 외식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호텔 뷔페에 가고 싶어 했다. 그는 원래 뷔페식 식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지금까지는 아내의 바람대로 군말 없이 가주곤 했다. 하지만 그날만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래서 “오늘은 내 생일이니 내가 식당을 고르겠다”고 선언했다. 아내는 놀라는 눈치였으나 뭐 그러지, 하고 따라나섰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식당까지 가는 동안 아내는 딸아이에게 전화해 “엄만 정말 뷔페에 가고 싶지만 아빠 생일이니 꾹 참고 다른 데로 가고 있는데, 아마 엄마처럼 아빠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잠자코 차를 돌려 집으로 왔다. 꼭지가 돌긴 했지만 더 이상 화도 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좌절감이 너무 컸다.

반면 아내는 친구며 친정 식구에게까지 전화를 해댔다. 그러면서 자기가 남편 생일이어서 그처럼 희생을 했건만 오히려 남편 때문에 저녁을 망치다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남자랑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법석을 피웠다.

“아내는 아직 철이 없는 편입니다. 지금도 아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때는 꼭 이벤트 비슷한 거라도 해야 하죠. 무슨 일이든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참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자기는 내조를 굉장히 잘하는 아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아내와 커플 상담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의 설득으로 병원에 오긴 했지만, 자기는 모든 걸 남편한테 맞추며 잘해오고 있으므로 새삼 상담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 남편만 가끔 더 이상 좌절감을 견디기 힘들 때면 혼자 상담을 받으러 오곤 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자면 이 이야기에서 그의 아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아내 역시 당연히 남편에 대해 할 말이 있을 테고 또 거기엔 나름의 정당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린 누구도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가끔씩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해서 ‘나는 잘하고 있다’는 편견 아닌 편견에 사로잡혀 누군가에게(그것도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인간은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다. 어떻게 나라고 예외이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나 역시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가끔씩은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해보는 수밖에.

베스트셀러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의 작가이자 저명한 신경정신과 박사인 양창순 씨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군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그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니, 잠시 위안이 되는 건 왜일까요?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수많은 오해와 좌절과 갈등이 일어나는 인생이겠지요. 양창순 박사는 정신과ㆍ신경과 전문의로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주역과 정신의학을 접목한 논문으로 성균관대학원에서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양창순 신경정신과, 대인관계클리닉 원장으로 있고, 연세대 정신과 외래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