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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5월 오색팔중동백이 가르쳐준 이야기 (양창순 박사)

양창순 박사의 첫 번째 글
봄에 피는 꽃은 대개 잎이 없다. 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꽃이 피었다가 진 다음에야 잎이 돋는다. 그리고 그런 봄꽃은 아무리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도 애잔함이 느껴지곤 한다. ‘어째서 그런 걸까?’ 하는 의문이 올봄에서야 들었다. 그리고 생각해낸 답은 ‘꽃과 이파리가 영원히 만나는 일 없이 홀로 피었다가 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꽃무리를 이루는 색채의 향연조차 절대 고독이 주는 내밀한 슬픔을 가려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고독은 결국 홀로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과도 닮았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애잔함이 느껴지는 것이리라.

잎과 꽃이 함께 피는 철쭉이나 사시사철 잎이 푸른 동백은 그런 느낌이 없다(물론 내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 화사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붉은 동백은 힘찬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 얼마 전에는 ‘오색팔중五色八重동백’이라는 희귀한 동백꽃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나무 한 그루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어나는데, 하나같이 꽃잎이 여덟 겹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과연 화면에서 보이는 동백나무는 색깔이 제각각인 꽃송이를 가득 매달고 있다. 붉은색, 하얀색, 분홍색도 보이고, 그 색깔들이 꽃잎 하나에 섞인 것도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상이 떠올랐다. 동백나무가 부모라면 각기 다른 색깔로 매달린 꽃송이는 자식과도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연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같은 나무에 각기 다른 색깔의 꽃이 피었기 때문인 듯 싶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부모라는 한 그루 나무에서 제각기 자신만의 색을 지닌 자식들이 태어난다. 그리고 부모가 아무런 편견 없이 그 고유한 색을 인정해줄 때 자식들의 미래는 좀 더 화사하고 풍성하게 피어나게 마련이다.

봄꽃이 절대 고독 속에서 제각기 홀로 피었다 지고 마는 것처럼 결국에는 혼자의 힘으로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길이 덜 외롭고 힘든 것은 곁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끝까지 이해하고 받아주는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외롭고 힘든 길을 묵묵히 걸어갈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코맥 매카시는 <로드>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사실을 표현했다. “옆에 아무도 없는 사람은 유령 같은 거라도 대충 만들어서 데리고 다니는 게 좋아. 거기 숨을 불어넣어 살려내서 사랑의 말로 다독이면서 끌고 다니도록 해.”

물론 그토록 간절한 존재인 가족이 때로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우리 인간이 지닌 숙명인지도 모른다. 가족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가족 안에서 사랑과 미움, 질투와 불안, 기쁨과 죄책감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주고받는다. 적어도 우리가 그 모든 감정을 최초로 경험하는 것은 가족 사이에서다. 특히 부모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부모가 아이들의 개성과 자아를 얼마만큼 존중해주고 이끌어주느냐에 따라 아이들은 장차 사회에 기여하는 반듯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우리가 알지 못하는 운명의 힘이 이끄는 인생의 여러 아이러니와 반전은 여기서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오색팔중동백’을 보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연상한 것 역시 오랫동안 그와 같은 부모 역할에 대해 생각해왔기 때문인 듯하다. 부모의 역할이란 누가 뭐래도 아이의 다양한 개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활짝 피어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자녀가 내리는 가장 옳은 선택은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란 요지의 말을 한 교육학자가 있다. 그 말은 아이가 저 스스로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그리고 그 빛이 아이 자신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임을 지켜봐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심할 정도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하는 부모가 더러 있다. 그들은 아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자신이 아이를 이끌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곤 한다. 그 결과 부모의 빛이 너무 강해지면 아이는 필연적으로 그늘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절하게 빛과 그림자가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부모 역할의 첫 번째 원칙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부모 역할이 모여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되어줄 때 비로소 자식은 당당하게 홀로 자신만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피고 지는 꽃 한 송이를 보고 이렇게 깊은 사유를 끄집어내다니, 더구나 그 안에서 가족이라는 관계를 읽어내다니요. 이 글을 읽고 나니 오색팔중동백이란 꽃이 사뭇 궁금해집니다. 양창순 박사는 정신과ㆍ신경과 전문의로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주역과 정신의학을 접목한 연구로 성균관대학원에서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았고요. 현재 양창순 신경정신과ㆍ대인관계클리닉 원장으로 있고, 연세대 정신과 외래 교수입니다. 각 기업체와 조직의 리더들에게 ‘마음 경영’이란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것이 왜 두려운가>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