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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이 정도 자랑거리 (이영혜 발행인)

“두 살은 똥오줌 가리는 것이 자랑, 세 살은 이가 나는 것이 자랑, 열 살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 스무 살은 섹스를 해봤다는 것이 자랑, 서른 살 넘어 쉰이 될 때까지는 돈 많은 것이 자랑, 예순 살은 아직도 섹스하는 것이 자랑, 일흔 살은 아직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 여든 살은 아직도 자기 이가 남아 있다는 것이 자랑, 아흔 살은 똥오줌을 가리는 것이 자랑.” 오늘 아침, 친구가 어느 작가의 글이라며 문자메시지로 보내준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막 웃었는데, 두어 번을 다시 읽어보니 서글퍼졌습니다. 태어나면서 성장했다는 징후들을 결국 죽기 전에 그대로 퇴행하는 인생사를 짧고도 확실하게 정리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을 돌아간다’고 하고 이미 살아 있을 적에 그 과정을 되밟는가 봅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나이에 따라 ‘이 정도 자랑거리’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인생 목표가 별 것 아니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지 않느냐고 작가는 묻고 있답니다. 사실 나이 들면서 이 정도의 자랑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몸에 좋다는 건강식도 챙기고 무엇보다 마음도 평안하게 만드는 등 스스로를 관리, 운영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든 그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퇴행을 얼마나 늦추느냐일 뿐, 더 이상 성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밖은 잔뜩 눈이 오려나 싶은 날씨, 저도 모르게 한동안 손가락을 책상에 튕기고 있었습니다. ‘자, 어떻게 하나….’ 무언가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입니다. ‘나이 들어도 퇴행하지 않는 것으로, 남과 다르게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 걸까. 그게 뭐지?’ 인생이 이리도 간단하게 돌아가는 길인 줄 아니 허무한 마음이 드는 것인가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때문인지 줄이 하나인 일현금이 생각났습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일곱 줄의 칠현금을 생산하고 오래전의 것을 복원하기도 하고 연주도 훌륭히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보관하고 있던 일현금을 연주해 보였는데, 그 한 줄로도 얼마나 다양하고 깊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지, 여러 가닥을 가진 악기만큼 화려하지는 않으나 그 이상을 표현할 만큼 심오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줄뿐이라는 것 때문에 더 집중해서 들어서일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멀리 다녀온 듯한 연주였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외줄 인생이라고 해야 하는지요. 한 가지를 가지고 아주 멀리 끝까지 가본 사람이 지닌 아름다움 말입니다. 남과 다른 자랑거리를 하나 더 지니기 위한 방법을 가진 사람인 것이지요. 또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자식이나 주변을 성장시키는 데 헌신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혈연, 지연, 학연을 멀리 떠나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함까지 느껴지나 봅니다. <울지 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처럼 말입니다. 이런 길은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시간 없이 결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남다른 성공은 남다른 고독의 시간을 담보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허무한 마음이 든 것의 실체가 너무 세상을 곁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듭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외줄을 만들 만한 주제와 시간을 갖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지금 시작해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작고 간단한 일 하나는 가져봐야겠다고 마음먹어 봅니다. 이제 또 한 해를 맞으며 손가락을 여러 번 튕겨보면서 고민해볼 참입니다. ‘그게 뭐지?’

<행복이가득한집> 독자와의 만남 지난 25주년 창간 기념호인 9월호의 독자 응모에 대한 시상을 일곱 분과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으로 대신했습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그 가운데 우리를 매우 기쁘게 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전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임영란 선생님이셨어요. <행복>에 본인 글이 실린 것을 발견하고는 매우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대요. 그리고 몇 사람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행복을 20년 넘게 구독하는 동안 이렇게 내 글이 활자화가 되었다”고 자랑을 하는데, 대뜸 “집 한번 가봐야겠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나요. 자랑에 맞춰 기대한 찬사 대신 “20여 년 <행복>을 정기 구독해왔다면 틀림없이 집을 잘 꾸며놓았을 것 같다”고 했다네요. 이 엉뚱한 소리를 우리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에는 따라 하고 싶어도 너무 비싼 물건만 소개하더라는 불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비싼 물건에는 남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재료이든, 디자인이든, 남다른 공이 들어 있든 간에 말입니다. 이런 것을 꼭 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변에 나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 들으면 좋은 것을 배우는 시간, 더 좋은 공간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서 우리는 성장합니다. 귀, 혀, 눈이 모든 감각은 소리 없이 성장하고 유전자 없이 유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퇴행을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비싼 것을 꼭 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꾸 보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나도 모르게 활용할 감각의 데이터베이스를 쌓아두는 일이 될 겁니다. 이런 선물을 매달 드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기에, 그 즐거웠던 많은 대화 중 이 부분을 다시 들려드립니다. 지금도 독자분들의 원고가 계속 오고 있습니다. 다음 달쯤 또 몇 편을 엮어서 칼럼을 만들겠습니다. 누가 압니까? 이러다가 정말 출중한 필력을 지닌 분을 발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도 누군가의 <행복이가득한집> 발행인 외길 만들기의 주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