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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고독을 권함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의 세 번째 글
한 선사禪師가 바위에 벽돌을 열심히 간다. 하도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물으니,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벽돌을 가는 이는 회양懷讓(677~744)이고, 그 까닭을 물은 이는 마조馬祖(709~788)다. 6대 조사로 꼽는 혜능慧能(638~714)이 “네 문하에서 젊은 말 한 마리가 나와 온 세상을 누빌 것이다”라고 한 이가 바로 마조다. 회양은 그 마조의 스승이고, 혜능은 그 회양의 스승이다. 방에 들어앉아 경전만을 파는 마조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회양은 몸소 어리석음을 실행한 것이다. 당연히 마조의 물음이 따른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회양이 답을 머금은 물음을 던진다. “소달구지를 생각하라. 소달구지가 멈추면 너는 달구지를 때리느냐, 소를 때리느냐?”

어느덧 한 해의 끝이다. 밥 먹는 자리, 술 마시는 자리들이 잦아지면서 나를 찾고 부르는 사람도 많아진다. 반갑지만 모두 사양한다. 세상의 소란과 흥청망청 속에 자신을 떠다미는 게 달구지에 채찍질을 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잎이 다 진 나무들이 울연히 서 있는 숲 속을 거닐며 한나절을 보내는 게 낫다. 낙엽 위에 있는 고라니의 배설물이나 뱀의 허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입으로 먹고 먹은 것을 소화해내는 일의 거룩함과 오고 가는 생명의 신비를 더듬어보는 것이야말로 가다가 멈춘 소의 잔등에 채찍질해서 다시 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무들이 고요의 직립이라는 실감에 이른다. 고요가 된 나무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고요를 일깨우며 안과 밖의 고요가 더불어 깊어진다. 나무와 나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고 고요의 연대 속에서, 깊이 감응함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밖이 소란함은 안이 소란한 것이요, 밖이 고요함은 안이 고요한 것이다.”(에크하르트 톨레) 나무들이 직립해 있는 숲 속이 고요하니, 내 안도 고요하다.

혼자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창의성의 발현과 개인 자아의 발달은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혼자 있는 능력 속에서 길러진다. 고요는 혼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고요 속에서 사람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될 일들과 차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의 분별이 나타난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그런 분별이 있는 사람들이 줄어든 탓이다. 활달한 소통은 인생의 성공으로, 고립은 그 반대로 비치기 쉽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세상에 잘 적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심리적 불완전함의 결과이고, 반면에 자발적 고립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심리적 평형 속에서 안정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의 태도다.

혼자 있어 보라. 혼자 있으면서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일에 부지런해라. 고독을 권하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의 심연에 이를 수 있는 까닭이다. 고독에 처하지 않는다면 고요도 있을 수 없다. 부지런함이란 무엇인가? “갠 날에 할 일을 미적거리다가 비를 만나게 하지 않는다. 비 오는 날에 할 일을 꾸물대다가 날이 개게 하지 않는다.”(정약용) 부지런하되 항심恒心을 유지하라. 새벽이 오면 새벽에 마음을 두고, 저녁이 되면 저녁에 마음을 두라. 이 모든 일이 마음이 고독 속에 있을 때 가능하다. 새벽 숲 속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새소리들, 고적한 실내에서 저 혼자 타는 촛불, 저물녘 만조에 이른 바다의 장엄함…. 이런 것들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인생에서 봄과 아침은 지나가버렸음을 알아야 한다. 봄과 아침을 헛되이 흘려보냈다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곧 기적임을 알 수가 없다.

혼자 있어 보셨습니까? 수런거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게다가 흥청망청 더 요란한 12월에 잠시 혼자 지내보셨습니까? 새벽이 오면 온전히 새벽에, 저녁이 되면 온전히 저녁에 마음을 두게 되고, 봄과 아침이 오는 것에 가슴 뛰는 삶. 장석주 시인이 권하는 그런 삶을 우리도 바랍니다. 그러하니 이 겨울, 잠시라도 고독해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