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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삶은 갈망하는 것!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의 두 번째 글

뜰 안의 산벚나무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의 잎들이 먼저 누렇게 탈색이 되었다. 빨간 고추를 말리던 양광陽光은 눈부시지만 열기는 미지근하다. 계곡의 물들이 차가워지고 무서리 내리고 초본식물이 무릎을 꺾고 무너지면서 늦가을은 처연하다.
늦가을의 나는 봄비에 연두를 머금고 촉촉하던 버드나무를 보던 날의 나와 다르다.

늦가을의 나는 몇 날 며칠 하늘이 구멍난 듯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 여름의 눅눅함과 무더위 속에서 허덕이던 날의 나와 다르다. 늦가을의 쓸쓸함과 멜랑콜리에 감염된 내 피와 세포들은 더 이상 도도하지 않다. 내 피와 세포들은 “회색의 빛깔,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이라는 문장에 쉽게 감응한다. 늦가을을 살면서 늦가을을 모른 채 흘려보내는 것은 나무토막같이 멍청해 보인다. 나는 늦가을의 사람으로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게 늦가을에 안착한다. 영원이라는 잣대로 재면 하루는 찰나이고, 일생은 열린 문 앞을 지나가는 빠른 말과 같다. 늦가을 해 질 녘의 고즈넉한 시간을 서성거리며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한 사람, 나와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태어난 해는 겹치는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철학자같이 삶을 통찰한 그는 이런 핵심에 닿는다. “삶이라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사느라 낭비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도그마에 얽매이지 말라.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1)의 말이다. 그의 삶은 불우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생판 모르는 가정에 입양된 것도, 대학을 중퇴한 것도,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것도 평온한 삶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나 그가 만든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독창성이 돋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사려고 줄을 길게 섰다. 그것들은 놀라운 기능과 함께 심미적 욕망을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 돔과 뾰족탑,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가치에 견줄 만하다. 그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꿔놓았다. 그가 단순한 이익 창출이 아니라 근본적 상징을 추구하고, 자유로운 기술적 실험의 표본을 내놓는 사람이었기에 인류가 그의 이른 죽음을 상실로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이리라.

누군가 죽고 누군가 태어나는 일은 이 지구의 일상이다. 조락과 덧없는 것의 끝을 안고 지구 북반구의 늦가을은 전면적으로 깊어간다. 늦가을 맑은 날의 평온함으로 가장 쓸쓸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은 연민으로 젖어 고요하고, 맥박은 빠르지 않다. 삶은 갈망에서 타오르는 것이고, 우직한 도전에서 빛나는 도약을 하는 것! 갈망이 다하면 풀들은 시들고, 갈망이 다하면 숲 속의 가왕歌王으로 군림하던 매미나 능란한 사냥꾼인 늙은 사마귀도 죽어 풀밭에 나뒹군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라고 적었다. 나 역시 늦은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하고, 새벽 다섯 시에는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뉘우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늦가을이니까.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던 사람이라도 이런 늦가을의 하루는 자기에게 포상 휴가를 주어 생각이 없는 절지동물처럼 빈둥거려도 좋다. 늦가을의 바람이 느티나무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시, 살아야겠다! 간절하게 갈망할 것, 자유로울 것, 사람을 사랑하며 살 것! 이보다 더 나은 삶은 없다.

장석주 시인은 동갑내기인 스티브 잡스가 죽고 며칠 경미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터널을 지난 뒤엔 빛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듯 그는 생기를 곧 찾았다고 하네요. 생명이 조락하는 계절, 여러분은 조락하는 것에서 어떤 생각을 얻으시나요? 삶은 갈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얻으신다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