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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어떤 뒷모습

얼마 전 몇 가지 사연이 겹쳐 한동안 나 혼자 아기를 돌보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이 아기는 20개월을 좀 넘긴 나이로 키는 대략 내 무릎 높이 정도였는데, 관찰해본 결과 특별히 소리를 지르며 난폭하게 군다거나 울부짖으며 드러눕거나 하는 일은 잦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사소한 일에도 진심으로 즐겁게 웃었으며, 가끔 신기한 것을 보았을 때는 얼굴에 격렬한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작은 일마다 진심으로 감탄하며 기뻐하는 것에는 다소간 감동적인 점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아기를 혼자 돌보는 것이 충분히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다. 또래보다 약간 늦된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엄마” “아빠” “아니” 정도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니”라는 말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부정하기 위한 뜻을 전하기보다는 남들이 뭔가를 제안했을 때 그것을 자신이 거절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면서 즐기는 용도로 사용하는 단어였다.

“자고 싶어?” “아니” “놀고 싶어?” “아니” “뭐 먹고 싶어?” “아니”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아니” 그저 뭔가를 제안하면 자신이 말 한마디로 되돌려 보낼 수 있고 그러면 상대가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제안을 고민하는 그 모습에 기뻐하는 것이다.이러다 보니, 나는 잡다하게 이런저런 장난감을 갖고 놀아주려고 했지만, 아이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아기가 직접 TV 리모컨을 들고 와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고 있는 내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눌러댔다. 마침내 TV가 켜졌고 TV에서는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더 아기의 우는 소리에 맞춰 리모컨을 놀려야 했고, IPTV의 VOD를 이용해서 아기가 좋아하는 내용을 골라주었다. 그에 따라 아기는 말하는 펭귄이 춤추는 이야기나 로봇을 조종하는 소시지 따위가 나오는 이야기를 매우 기뻐하며 쳐다보았다. 

아기는 즐거운 내용이 나오면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하고 놀라운 내용이 나오면 달려와서 내 등 뒤로 숨기도 하였다. 나는 그러는 동안 자유와 여유를 찾게 되었다. TV에서는 가끔 광고를 보여주면서 애니메이션을 연속으로 보여주었다. 아기는 그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동안 휴대폰에서 인터넷 사이트 이곳저곳을 오가며 웃긴 헛소리나 놀라운 헛소리나 분통 터지는 헛소리 등등을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었다. 다소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TV에서 계속 흘러 나오던 시끌벅적한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나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TV를 보았다.

화면을 보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IPTV 회사의 무료 VOD 프로그램이 자동 재생되던 것이 다 끝나서, 이제 그다음 프로그램을 계속 보려면 결제를 하든지 말든지 하라는 안내문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화면에는 돈을 얼마 내야 하는지 숫자가 씌어 있었고,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말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가만히 참을성 있게 앉아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기가 포인트 적립이나 할인 혜택에 대해 이해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중간중간 지나간 광고 영상이나 다른 프로그램 예고 영상처럼 그 결제 화면도 조금 기다리면 지나갈 것이라고 아기는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미 제법 기다린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로 가득 찬 저 생기 없는 화면은 곧 사라지고 다시 재미있는 펭귄과 소시지의 모험담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냥 기다린다고 다음 편을 보여줄 리가 없는 화면인데도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는 이 아기의 얼굴을 나는 쳐다보았다. 그 작은 얼굴에 지금 상황에 대한 의문과 다음에 펼쳐지리라 믿는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같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니 앉은키가 강아지나 고양이 크기밖에 되지 않아서, 크기로는 사람이라고 언뜻 생각하기 힘든 새롭고 신비한 생물체 같았는데, 그런데도 차분히 앉아 기다리는 자세는 너무나 사람다웠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했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이것은 중대한 일도 아니며 오래 이어진 사건도 아니었고 특별한 날의 사연도 아니었다. 평범한 날에 있었던 별로 대단치 않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깊이 남은 장면이다. 그 아기의 나이로부터 몇십 년이 더 지나 세상사에 닳고 닳은 삶을 사는 와중에도,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고 세상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알지 못하는 채, 그저 걱정하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결국 다들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말하고, 걷기 시작하는 무렵의 아이를 관찰하는 건 참 재미난 일입니다. 온통 처음 보고 경험하는 것뿐일 세상을 아이는 있는 힘껏 탐사하고 받아들이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지요. 최근 가장 주목받는 장르 문학 작가 곽재식의 눈을 통해 바라본 아이는 귀엽기도, 불쌍하기도,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평범한 날에  있었던 별로 대단치 않은 순간의 이야기라지만, 여러 번 웃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곽재식 작가는  화학 기업의 연구원으로  일하며 소설을 씁니다. 소설집으로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모살기> 등이 있으며, 최근 장편 소설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을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