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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변재희 자연의 리듬, 공기의 질감
긍정적 환상은 비록 실제로 도달할 수 없더라도, 현실에 더욱 확고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희망을 선사한다. 희망을 주는 환상, 변재희 작가의 ‘칼라 판타스마고리아’ 연작이 화려한 원색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변재희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공부한 후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에서 펠로십 작가로 활동했다. 도쿄 스도 미술관, LA 차랑 갤러리, 청남미술관, 인사갤러리, 갤러리 도스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중앙미술대전, MBC 미술대전, 신미술대전, 미술세계대상전 등에서 수상했다. 

온갖 원색으로 칠한 형상이 크고 작은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펼쳐진다. 화려한 색채의 조합. 멀리서 보면 아이스크림 같기도 하고, 폭죽놀이 같기도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물감을 흘리고, 점을 찍고, 뿌리고, 거칠게 긋는 등 온갖 표현 기법이 다 들어가 있는데, 유화물감 고유의 두꺼운 질감과 매끈한 붓질이 섞여 충돌하며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분명 그림은 가만히 있는데, 유동적 형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하다. 뭐라고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림인데, 화려한 원색이 요란하기보다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들뜨고 즐겁다. ‘칼라 판타스마고리아Color Phantasmagoria’라 이름 붙인 이 연작을 통해 회화 작가 변재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환상을 선사하려 한다.

“바로 옮기면 ‘색채의 환상적 집합체’쯤 되겠지요. 옛사람들에게 환상을 선사한 마술환등魔術幻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환상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날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주기도 하지요.” ‘칼라 판타스마고리아’ 연작 중 한 점인 11월호 표지작의 부제는 ‘행복한 정원’이다. 음악의 신 뮤즈Muse가 꽃잎이 흩날리는 행복한 정원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듯 화려한 색감을 경쾌한 붓 터치로 그려낸 작품. 변재희 작가는 구체적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칼라 판타스마고리아 연작을 통해 햇빛과 바람, 대기의 감촉과 향기를 전한다. 화사한 바탕에 색색의 물감이 옅게 흩어지는 모습은 바람에 꽃가루가 날리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화사한 꽃향기도 함께 퍼지는 듯하다.

변재희 작가는 다섯 살부터 줄곧 그림을 그려왔다. 그때부터 화가를 꿈꿔왔다고. “어른들 말씀이 어릴 때는 제가 벙어리인 줄 알았대요. 말없이 늘 혼자 노니까. 주로 그림 그리고 놀았죠. 놀이터 모래로도 그리고, 물감으로도 그렸어요. 유치원 미술부에 들어가서 처음 그린 그림이 지금 작품과 비슷했어요. 보라색으로 추상화를 그렸거든요. 어렴풋한 기억에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리려다가 마음대로 안 돼서 울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이렇게 그려도 괜찮아’라면서 제 손을 잡고 같이 완성해주었지요. 나중에 보니 제 그림만 추상적이었어요.”

선장이던 아버지는 출장에서 돌아오면 진귀한 이국의 물건과 함께 당시 한국에서 구할 수 없던 색색의 물감을 그에게 안겼다. 그때 익힌 화려하고 독특한 색감이 지금도 그의 작업에 남아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하던 1980년대 초반, 교수든 학생이든 죄다 어둡고 중후한 그림을 그릴 때도 변재희 작가는 원색과 형광색 등 ‘튀는’ 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색과 관련해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그에 상관없이 내 그림을 그렸어요. 젊은 시절이라 반발심도 있었겠지요. 그러다 미국으로 건너가 작업을 했는데 과감하게 색을 사용하는 그곳 작가들, 대가들의 전시를 보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였구나’ 자신감을 얻었죠.”

변재희 작가는 지난 2007년부터 ‘칼라 판타스마고리아’ 연작을 그려왔다. 그 이전엔 유화 대신 아크릴물감을 사용했고, 색채는 화려했지만 구체적 형상을 흐릿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여행에서 본 강과 구름, 건물들…. 지금의 연작에서 느껴지는 밝고 긍정적 기운 역시 여행에서 느낀 공기의 질감과 결, 대기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작업실에서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해요. 하지만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면 작업이 잘 안 되더군요. 그럴 때 여행을 떠나면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참을 수 없도록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요. 저는 그림 그리느라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면 작업이 풍부해지니까요. 예전엔 지중해나 뉴욕같은 곳이 좋았는데, 요즘엔 나이가 들었는지 우리나라가 참 좋아요. 파주의 하늘과 구름, 꽃과 바람….”

변재희 작가는 지금의 그림을 “형상을 빼고 정수만 남은 것”이라 표현한다. 중년으로 접어든 지금이 작가로서 진짜 작업을 할 수 있는 첫발을 내딛는 단계라는 그. 색채는 더욱 화려해졌고, 아메바amoeba 같은 형상이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뻗어나간다. 화려한 색감과 유동적 형상, 다채로운 표면을 눈으로 좇으면 자연스럽게 그림 속 경쾌한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비평가나 미학자보다는 그림을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작품에 보이는 반응을 훨씬 더 흥미롭게 여긴다. “어떤 분이 전시에 와서 제 그림을 보고 한 시간을 울다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3년 동안 몸이 아팠는데 제 그림을 보고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한참을 울었다더군요. 몸은 몰라도 그분의 마음은 제 그림으로 많이 치유되지 않았을까요? 며칠 전에는 일흔 살이 훌쩍 넘은 할아버님이 그림을 보더니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는 거예요. 10년 가까이 배우자 병수발을 하시던 분이었는데, 집에 가서도 거실이 너무 넓어 보인다고, 이럴 수 있냐고 하셨지요. 이제껏 들은 최고의 찬사였습니다. 그런 이야기에서 그림 그리는 원동력을 얻습니다.”

글 정규영 기자 사진 이기태 기자 취재 협조 카메라타 아트 스페이스(0505-300-3369)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