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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일러스트레이터 김사문 내 머릿속 보통의 물건
한눈에 보기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정물화, 작품 제목도 ‘보통의 물건(Ordinary Object)’이다. 하지만 색연필을 종이에 대고 수없이 힘주어 눌러 그은 선으로 완성한 김시문 작가의 그림은 차분하면서도 미묘한 색감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서서히 사로잡는다.

1 ‘Series of Odinary Object #2’, 종이에 색연필, 78.8×54.5cm, 2017. 2 ‘Series of Odinary Object #24’, 종이에 색연필, 19×28cm, 2017. 3 ‘Series of Odinary Object #3’, 종이에 색연필, 78.8×109cm, 2017. 
김시문 작가가 그린 정물화는 한눈에 그 재료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 제 작품을 본 분들이 물어보세요. 판화인지, 아니면 프린트인지. 색연필로 그렸다고하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림 앞으로 다시 다가가 한참을 보시죠.”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또렷한 김시문 작가는 작품의 재료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자못 흥미로운 듯했다. 색연필을 종이에 대고 힘껏 눌러 그린 선으로 화면을 채우는 지난한 수공의 과정을 알아주지 않아 서운할 법도 한데, 그는 그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고.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 반응을 보이고 궁금해하는 일 자체가 신기한 작가 초년생. 한국에서의 전시도, 그림을 판매한 것도 지난 8월 24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아시아호텔아트페어(AHAF)가 처음이었다. 작가로서 매체와의 인터뷰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에서 일러스트를 전공한 김시문 작가는 졸업 후 1년간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후 한국에 돌아온 지 이제 두 달이다. 변변한 작업실도 구하지못한 상황에서 빠듯한 일정에 맞춰 그려낸 정물화 다섯 점이 아트페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전에 에칭etching 기법으로 만든 판화를 전시하려 했는데, 미국에서 발송한 작품들이 도착하지 않았어요. 서둘러 새로운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카페에 갔는데 비어 있는 벽이 너무 허전해 보여서 저 자리에 그림을 건다면 어떤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정물화를 그리고 싶어져서 늘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북에 연필로 스케치하고, 집에 와서 색을 입혔더니 괜찮아 보였어요. 그렇게 색연필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김시문 작가의 홈페이지(seethemoon.net)에서는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그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연작마다 그림을 그린 재료와 화풍이 조금씩 다르다.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기법도, 화풍도, 색을 쓰는 방식도 달라져요. 다양한 재료를 다룰 줄 안다는 건 작가로서 장점도, 단점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넓어지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하나를 결정해서 좀 더 깊게 파고들어야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가득한 집’ 특별호의 표지작 ‘오디너리 오브젝트 연작(Series of Ordinary Obect) #0’은 그가 처음으로 작업한 색연필 정물화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닌, 작가로서 그린 첫 작품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있는 물건을 그렸어요. 보통의 벽에 어울리는 보통의 물건들. 대상을 보지 않고 그려서인지 세부가 단순하고, 패턴도 없지요. 그래서 형태와 색감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어요.” 색연필을 수없이 그어 완성한 미묘한 색감과 겹쳐있는 여러 정물과 배경 색의 배치가 눈길을 잡아끈다. “이전에는 흑백 작업을 많이 했어요. 색을 쓰더라도 빨간색이나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번엔 색연필로 그리는 만큼 색 배치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습니다. 평생 정물화만 그린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 팝 아티스트 웨인 티에보Wayne Thiebaud 등의 작품을 보며 색을 활용하는 방법과 구도 등을 연구했어요. 친구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면서도 늘 색 배치를 고민합니다. 색연필은 좋아하는 재료지만 쓰기 어려운 점도 있어요. 색을 한번 정하면 바꿀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작업할 때 늘 작은 종이를 옆에 두었다가 먼저 색을 칠해 그림에 대본 후 작업해요. 한참 색을 칠하다 ‘아차’ 하는 순간도 있는데, 그래도 끝까지 완성할 수밖에 없어요. ‘망했구나. 너(작품)는 어디 못 가고 나랑 오래오래 함께 있어야겠다’고 혼잣말하면서 그렸는데, 그렇게 완성한 그림의 색이 마음에 들었을 때! 정말 기분 좋아요.(웃음)”

처음으로 참가한 아트페어에서 기대 밖의 호평을 얻은 김시문 작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일단은 그저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다고 답한다. “뉴욕에서 피카소 전시를 보는데, 큰 미술관 건물을 작품으로 가득 채우더라고요. 판화, 조각, 회화 등을 한 층씩 전시하는 식으로. 그게 정말 멋져 보였어요. 어떤 공간이라도 제 그림으로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작업하고 싶어요. 물론 많이 그리는 것만이 목표가 될 순 없겠죠.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어요.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붉은색 작품이었는데, 누군가에게 그런 경험을 준다는 건 작가로서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요?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무한정의 기간과 예산이 주어진다면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를 묻자, 천으로 건물 전체를 덮거나 섬을 둘러싸는 대지미술가 크리스토Christo 같은,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대규모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말투는 앳되고 수줍었지만 그 내용은 더없이 진지했다. 색연필을 수없이 힘주어 눌러 그은 선으로 완성한 차분한 색감처럼, 작은 체구에 담긴 큰 포부처럼.

1990년 창원에서 태어난 김시문 작가는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프리랜서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더스티 스튜디오와 협업했으며, 뉴욕에서 ‘Crime and Punishment’ ‘Equus and Such’ ‘Blending Boundaries’ 등 다양한 단체전에 참가했다. JIA(일본일러스트레이션협회) 어워드, 미술&디자인 계간지 <크리에이티브 쿼털리> 어워드, 소사이어티 오브 일러스트레이션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글 정규영 기자 사진 김규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