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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노을 집이라는 평범한 비밀

박노을 작가는 1983년생으로 국립강릉대학교와 홍익대학교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고 2014년 한국은행이 선정한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들’에 뽑혔다.

겨울비 내리는 오후, 연희동 주택가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박노을 작가를 만났다. 아! 그런데 마중 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이 분홍색이다. 분홍 머리에 분홍색맨투맨 티셔츠를 입었는데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아티스트 몇 명이 함께 쓴다는 널찍한 작업실 한편에 박노을 작가의 아기자기한 공간이 있었다.

박노을 작가는 지난 2월 15일까지 최정아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 <광휘를 찾아가는 집>을 통해 약간의 변화를 시도했다. 전작보다 좀 더 채도가 낮은 색을 사용했고, 캔버스에서 여백의 면적을 늘렸으며,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 상징적 의미가 바로 ‘광휘’다. “이번 전시 타이틀은 알고 지내는 평론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다 정했어요. 광휘는 ‘눈부신 반짝임’을 뜻하는데, 눈부심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눈부심 너머의 어떤 끝을 바라보며 가자’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했어요.” 작가의 전작 시리즈 ‘Fictional World’가 캔버스 아래쪽부터 집을 차곡차곡 쌓아 올라갔다면, 이번에는 집 사이마다 길을 잇거나 중간중간 마당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여백도 좀 더 생겼다. “주변에서 ‘왜그렇게 많이 비워두냐’는 말도 들어요. 수많은 집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 자신과 같은 의미거든요. 우리도 살면서 마음 둘 수 있는 일상의 여백이 필요하듯이, 그림에도 ‘숨구멍’을 남겨두고 싶었어요.”

‘집’이라는 소재는 박노을 작가가 지금까지 선보인 전시에서 언제나 주인공이었다. 그에게 집이란 어떤 공간이고 어떤 의미일까? “제가 그린 집들을 보면 모두 평면적이잖아요.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처럼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백내장이어서 한쪽 눈의 시력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유일한 안식처이자 도피처로 생각한 곳이 바로 집이었죠.” 테이블, 주전자, 화분처럼 일상 사물이 등장하는 작가의 그림엔 원근감이 빠져 있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에요.학교에서 ‘사물의 덩어리 감을 살려서 입체적으로 그려라’라고 배울 때도 사실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했어요. 제 눈에는 길에 늘어서 있는 집과 건물들이 그저 편평한 형태로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작가는 보통 작업에 들어가면 하루 8~10시간씩 앉아서 그리는데, 긴 시간 동안 눈을 최대한 피로하지 않게 하려고 채도가 낮은 색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작가의 말처럼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원근감이 빠진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 일상적이고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마저 든다. 파스텔컬러처럼 부드러운 채도가 낮은 색들이 평범한 일상성을 더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달 표지 작품 ‘차곡차곡’ 역시 작가의 어머니가 모으던 커피 잔을 그린 것이다. “커피 잔, 화분 같은 것은 엄마가 많이 모으시던 물건이에요. 집 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느 순간 저와 그 사물들이 동일시되더라고요. 생명은 없지만, 한 공간에 머물면서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든 거죠.” 커피 잔 옆에 달린 말풍선은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울 때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궁금하듯 커피 잔을 의인화해 표현한 것이다. “내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을 함께해주는, 나와 그 시간을 교감하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말풍선을 그려 넣었어요.”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acrylic on panel, 91×91cm, 2015
주로 집 안에 있는 사물을 그리던 박노을 작가는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다양하게 풀어내고 싶어 최근 자료 수집에 공들이고 있다. 주로 혼자 산책을 하거나 친구와 국내 곳곳을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을 보며 기억과 이미지를 재구성 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여행에서 모티프를 많이 얻는 편이에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어떤 풍경, 집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지나칠 때 색의 조화가 너무 예쁜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다가 작업할 때 소스로 활용하죠. 작업에 가장 많이 반영한 여행지는 태백의 탄광촌이에요. 집들의 모습이 기이하면서도 신기하고, 부조화인 것 같은데 이렇게 저렇게 덩어리처럼 잘 붙어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4월에 또 다른 젊은 작가들과 함께 하는 전시를 준비 중인 박노을 작가는 3월이 되기 전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둘러볼 계획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그림 속 집들과 닮은 마을이 있는 이탈리아 남부 여행도 꿈꾸고 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박노을 작가의 작업대 옆 책상 앞에 붙어 있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를 바라본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말이다. 박노을 작가 역시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교감’과 ‘공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가와 관객이 교감과 공감을 통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박노을 작가는 오늘도 일상의 고요 속에서 사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캔버스 위에 옮긴다.


글 유주희 기자 | 사진 이기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