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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문경 씨 영원히 박제된 세상이란 허상
김문경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첫 개인전을 연 후, 해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아르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단체 전시에 작품을 선보였다. 임신과 출산으로 짧은 휴식기를 보낸 후 다시 창작에 몰입하기 시작한 그는 올해 영국 사치 갤러리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각종 아트페어에서 호평을 받은 그의 작품은 새로운 도전과 시도의 변형을 거듭하며 관객을 만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1980~1990년대 포크송 그룹 ‘시인과촌장’은 사물이나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 곁에 있는 사람, 내 소박한 꿈이 이 노래 속 ‘제자리’일 터. 반면,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책 <우리가 사랑일까>에서 제자리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새끼손가락 꼭꼭 걸어 진짜 사랑이라고 확증한 남녀 사이. 혹시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닐까. 내 마음의 허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허기를 채우는 것일 수 있으며, 지금 단단한 제자리로 믿는 이 사랑이 훗날 또 다른 사랑을 만나 질량조차 보전되지 않은 채 증발하는 신기루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혹시 내가 ‘제자리’라고 믿는 인간관계, 사물의 상호 작용, 사회사의 현상과 존재가 눈속임이나 허상은 아닐까? <행복> 10월호의 표지 작가 김문경 씨에게 어느 날 이 물음이 도착했다. 때맞춰 배달된 청구서처럼, 미대 석사 과정을 마칠 때쯤 작가적 사유를 청구하는 이 의문이 마음에 도달한 것. 특이하게도 그 질문이 담겨온 봉투는 작가의 일상에 지천으로 있던 과일과 채소, 즉 ‘식물’이었다. “겉이 빨간 사과를 잘라보면 속이 노랗지요. 잿빛 털북숭이 키위의 속을 들여다보면 매끈한 연둣빛이에요.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과일과 채소 등 식물의 형태를 보니 사람과 닮아 보였어요. 작은 씨를 뿌리려고 화려한 색이나 달달한 과즙으로 자신을 알리는 과일이 인간과 비슷하지 않나요. 살아보니 가족, 친구, 사회생활, 삶 전체에서 믿은 것과 다른 이면裏面을 보게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요. 인간의 삶에 과연 진실이 존재할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도자기 작품으로 변형된 식물에서 보여주는 눈속임 기법은 인간관계, 사회생활, 문화 사이에 끊임없이 존재하는 눈속임을 대변하는 것이지요.”


‘Deformation04’, 2004

그는 도자공예를 전공했다. 즉 ‘흙으로 만들기’를 전공했다. 지문까지 다 찍어내는 세밀함이야말로 흙의 가장 큰 특성, 겉과 속이 다른 식물을 흙으로 세밀히 묘사해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식물과 흙은 둘 다 ‘자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또한 식물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이로써 흙은 또 다른 생물을 만들어내니 허상이든 실제든 부여잡고 연결되어 살아야 할 인간관계나 사회 구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썩지 않는, 즉 허상이 아닌 것은 무얼까. 김문경 씨는 흙으로 식물을 빚은 뒤 1250도의 펄펄 끓는 가마에 구워내 썩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창조한다. “유화는 벗겨지고 조각은 썩는데, 도자기 유물은 수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 보전돼죠. 1250도의 불로 구우면 흙이 경화硬貨되어 썩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아요. 썩어질 과일을 흙으로 빚어 불에 구우면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식물을 도자기로 만드는 것이 마치 ‘박제’하는 것 같죠.”

어쩌면 우리가 허상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허상 속에 박제돼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환기하려고 김문경 씨는 일상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박제된 식물 도자기를 놓는 ‘설치 작업’을 한다. <행복> 10월호 표지 작품처럼 드로잉하거나 사진을 찍어 배경을 만든 뒤 그 위에 변형된 식물 도자기 작품을 붙이거나 놓아두는 것. 특히 그의 작품에는 생물학, 과학, 미술, 문학적으로 다양한 의미가 있는 ‘사과’가 자주 등장하는데, 배경은 흑백 톤으로 처리하고 컬러를 선명하게 변형한 도자기 사과가 조명을 받아 마치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도자기는 초벌과 재벌로 완성하지만, 김문경 씨는 독특하고 선명한 색을 창조하기 위해 서너 번 이상 굽기도 한다. 이 작업은 온도와 시간 조절이 훨씬 까다롭지만, 일반 도자기가 발할 수 없는 특별한 색채가 그 수고를 보상해준다.


‘Beyond the Ceramics’, 2010

“작품 속 사과의 의미를 특별히 규정하고 싶지 않아요. 가마에 굽기 때문에 작품을 크게 만드는 데 한계가 있어 배경 등 다른 요소를 추가하죠. 익숙한 사과의 변형에서 관객은 낯익음과 낯설음을 모두 느낍니다. 늘 옆에 있어 익숙한 남편이 어느 순간 의외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처럼요” 벽에 거는 접시 형태의 작품을 선보인 것은 올해부터다. 창작을 하다가 환경 때문에 ‘썩어가는’ 많은 여성 작가처럼 그도 결혼과 출산이라는 환경 변화로 지난 몇 년간 작품 활동이 주춤했지만, 그 덕분에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열정이 포화되었고 무엇보다 ‘내 작업을 위해 희생하는 친정어머니, 아이, 남편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업을 하자’는 성숙한 깨달음을 얻었다. “세밀함과 영원함 외에 도자기 작품의 본질적 특성을 또 하나 발견했어요. 바로 ‘쓰임’입니다.

누군가 접시처럼 생긴 제 작품을 벽에 걸어 두고 감상하다가 귀한 손님이 온 날 접시로 쓸지 모르죠. 제 의도는 아니지만, 누군가 그런 변형을 꾀해 사과 작품에 과일을 담아 손님에게 내면 그 순간 바로 관객의 또 다른 설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감상’과 ‘쓰임’ 중 어떤 것이 허상이고 어떤 것이 본질인지 그 답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 자유로운 변형 가능성이 작가와 관객의 소통을 일으켜 김문경 씨의 애플 스토리 작품은 올해 헤이리 아트페어와 아트광주 등에서 큰 반응을 얻었다. 이에 작가는 도자기에 기능적 결합을 시도해 설치 전시 후 관객들이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변형 방식을 고민 중이다.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르는 이 고민의 박제를 관객은 내년 초쯤으로 예상되는 개인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감상과 쓰임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는 사이 박제된 ‘애플 스토리’ 작품 연작은 예술가 마을 헤이리의 퍼즈 갤러리에서 전시한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이명수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