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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설경철 씨 책이 세상이 될 때


책장을 한 장 넘기자 시계의 초침이 움직인다. 바이올린 활이 바람 지나가듯 울면 병에 담긴 장미가 공중에 부유한다. 악보 위에 자리 잡은 음표들이 금세라도 ‘톡’ 튀어 올라 조잘거릴 것 같다. 시계가 멈추고 순식간에 공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것 같아 숨죽여 들여다보게 되는 활자 속 세상. 미하일 엔데의 소설 <끝없는 이야기>에서 책 속의 환상 세계 ‘환타젠’에 빠진 소년 바스티안이 된 것 같은 상상. 화가 설경철 씨의 ‘프롬 더 북From the Book’ 에피소드 연작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다. “2005년부터 책에 담긴 내용을 시각화하는 작업
을 해왔습니다. 책은 인류 문명의 기록이자 삶의 동반자지요. 하지만 책이 지닌 물성은 인쇄된 종이 뭉치일 뿐입니다. 책을 사면 고이 덮어서 책장에 꽂아두곤 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멈춘 세상이에요. 미라처럼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먼지만 뒤집어씁니다. 그 정지된 책에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일상의 사물에 투영해 책 주변에 그려 넣는 것이 제 작업입니다. 한마디로 읽는 독서가 아닌 보는 독서인 셈이지요.”

11월호 표지 작품 ‘프롬 더 북 - 에피소드 12-15’는 책 대신 악보가 그려져 있다. 글자 대신 악보가 춤을 추니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이다. 따스한 봄날에 달콤한 낮잠을 잔다면 이런 그림의 꿈을 꿀 것 같다. 배경 음악으로는 현악기 연주곡이 어울리겠다. “첼로 연습곡 악보예요. 그림을 그릴 때 음악학과 학생에게 연주를 부탁하곤 하는데, 그 음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사물을 그림 속에 그립니다. 직접 연주를 듣기 어려울 때는 녹음한 음반을 들으며 작업하지요. 책은 문장을 외우고 기록하고 다시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지만, 음악은 그렇지 않아요.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 여운만 남는 시간 예술입니다.”


Episode 0919(From The Book)’, Acrylic on canvas, 90.0×60.5cm, 2009

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 음악과 마찬가지로 책이 그림의 무대가 될 때는 배경이 되는 책을 여러 번 읽는다. 한 번 읽어서는 어떤 사물이 스쳐 지나가는지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열 번 이상 정독한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수많은 영감을 압축한 결과다. “세상에 서로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길 위의 몽돌과 잡초 하나도 존재의 의미가 있듯이, 그림 속 사물들도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시대 상황, 마음 상태 등이 모든 것을 반영합니다.”

날개, 책, 새, 시계, 꽃, 인형, 타자기, 종이학 등 책에서 튀어나온 일련의 사물은 단순히 악보와 책에 담긴 이야기만은 아니다. 순간적인 영감에서 튀어나온 것도 있고, 한 단어에서 파생된 연상 이미지도 있다. 그에게 책과 악보는 움직이는 세계다. “출근하기 위해 또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다시 귀가하잖아요. 책도 마찬가지예요. 책 속의 모든 글자가 밖으로 나와 초현실적 세계에서 부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가 결국 다시 책으로 들어가는 거죠.”

갈매기의 꿈을 그리다 그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가장 큰 이유는 샤프 포커스 리얼리즘, 말 그대로 날카롭고 섬세하게 대상을 묘사해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사진과 똑같이 그리는 포토 리얼리즘과는 다르다. “사진은 어느 한 부분만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흐려지는 단초점이에요. 하지만 인간의 눈은 두 개지요. 두 눈을 뜨고 보았을 때 카메라는 그 영역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리얼 아트는 인간의 눈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제 그림 속의 모든 사물이 잘 드러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구석구석 모든 요소가 다 중요하니까요.” 언뜻 보면 사진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간의 눈이 중심인 그의 그림에는 모든 사물이 주인공이다.

현재 그는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시뮬레이션 작업을 마치고 현재 40% 정도 진행한 상태다. 작품에서는 마치 당장이라도 갈매기가 날갯짓하며 튀어나올 것 같은 역동적인 생명력이 전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갈매기가 되어 영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섬에 착륙한다. 그의 그림은 그렇다. 상상 속의 꿈, 그 가슴 저리게 그리운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거룩한 메신저.

설경철 씨는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과 뉴욕 공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부산 고신대학교 조형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1년 제10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최연소로 특선을 수상했으며, 2011년 한중일 당대예술교류전과 2012년 21C IACEA 국제전 등 국내외 수십 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설경철 씨의 개인전이 지난 9월 5일부터 25일까지 빛갤러리에서 열렸다. 문의 02-720-2250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명수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