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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조장은 씨 엄마라서 예쁘지, 여자라서 예쁘지


“우리 집 앞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명동에서 내려 명동성당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백병원이 있다. 아이 둘을 키우니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했고, 자연스럽게 그 언덕길을 많이 오르게 되었다. 혹시라도 아이 잃어버릴까 봐 손 꼭 잡고 넘던 명동 고개. 손 잘 잡고 병원까지 갔는데 상연이가 없어졌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턴 선생이 자꾸만 주삿바늘을 잘못 찌르는 통에 일곱 살 아들이 이성을 잃고 병원에서 도망친 것이다. 화가 난 엄마는 아이를 혼꾸멍낼 요량으로 천 원을 쥐여주며 알아서 버스 타고 가라고 호통쳤다. 엄마는 아이를 몰래 뒤쫓아가고 있었는데, 그만 놓치고 만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는 집에 오지 않았다! 양가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 손으로 길에 버린 꼴이니 엄마는 그야말로 아연실색이다. 아이를 찾아 헤매기를 몇 시간째…. 아이는 태평하게 위층 친구 집에서 놀고 있었다. “초콜릿 사고 남은 돈 5백50원 거지 아저씨 주고, 지하철 공짜로 타고 동작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더니 엄마가 없더라고. 그래서 얘네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행복> 5월호 표지 작품 ‘이쁜 내 새끼’는 조장은 씨 엄마의 일기에서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깨벗고 칭얼칭얼, 까르르, 알랑알랑하며 하루 해를 보내는 아들놈, 그 ‘막무가내’ 막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쁜 세상 모든 엄마의 이야기다. “제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일기를 쓰고 있었어요. 엄마에게 일기는 하루의 통과의례 같은 일상이었죠. 몇년 전 엄마의 일기를 찬찬히 읽게 되었는데, 내가 그림으로 말하던 이야기보다 더 깊고 넓은 여자의 이야기가 그 안에 박혀 있었어요. 엄마의 일기장을 정리하고 거기에 그림을 붙여 책으로 낸 게 <엄마라서 예쁘지>예요. ‘이쁜 내 새끼’도 그 안에 담기 위해 그린 100×80cm짜리 한국화입니다.”

<엄마라서 예쁘지>에 담긴 그의 그림은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로 살아온 한 여자의 역사다. 하루 세끼 밥상에 매달리다 이게 정말 나일까, 인생이 이런 걸까 한숨짓는 여자, 집 안팎을 뱅뱅 돌며 일상에 휩싸여 사느라 낡아가지만, 그제야 사는 기쁨을 제대로 알게 된 여자의 이야기. 딸은 엄마의 그 역사를 복원하고 싶었고, 그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아니, 세상 모든 엄마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더러 엄마 닮았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습니다. 내 얘길 들은 엄마가 웃으며 말합니다. ‘엄마라서 예쁘지.’ 아, 그런 거였군요. 이 세상 엄마들은 다 예쁜 거였군요. 그러니 내 눈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요.”
(<엄마라서 예쁘지> 중)

내가 사는 이야기
그는 전에 <골 때리는 스물다섯> <센티멘탈도 하루 이틀> 등의 개인전을 통해 소다수처럼 알싸한 그림을 선보였다. 들뜬 열기, 어설픈 치기, 무모한 대담성으로 가득 찬 자신의 20대를 그림일기 쓰듯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그린다는데도 계속해서 “그러니까 직업이 뭐냐”고 묻는 이들 때문에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날도, 대학 졸업하고도 ‘청년 실업’에 일조하며 엄마에게 손 벌리는 날도, ‘화장까지 다 했는데 걸려온 전화, 나 오늘 못 만나’ 때문에 흥분한 날도 모두 작품에 담았다(이 문구는 고스란히 작품 제목이 되었다). “저기 저편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지금 바로 여기 펼쳐지는, 내가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비록 그게 ‘찌질하고’ 부끄러워 가끔씩 눈을 질끈 감게 해도. 뭐 어때요?”

그 찬란한 젊음은 분채(동양화에 쓰는 가루 물감)로 칠해 더 말개 보인다. 여러 번 칠할수록 더 맑은 색채를 내는 분채의 성격은 그의 그림과 찰떡궁합이다. “염색을 하듯 종이에 스며드는 분채의 느낌이 참 좋아요. 어느 정도 스며들고, 어느 정도 종이 위에 얹히는데 그 깊이감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어릴 때 제가 덮고 자던 색동 이불의 색감과 닮아 더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왼쪽) ‘나 아직 괜찮나봐’, 65×53cm, 장지에 채색, 2011

한 인간이 세상에 나와, 세상과 섞이고 부딪치면서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담은 그의 그림엔 옛 문인화처럼 그림과 문자가 함께 노닌다. 서로 보완하고 지지한다. ‘뉘 집 자식들인지’ ‘한 놈 잡았따’ ‘착하게 살기 싫어요’ ‘죽 쒀서 개 줬다’ ‘밧데리가 없어서 참는다’처럼 화폭 안에서 그림과 한 몸처럼 노는 문자들. 21세기를 사는 여자의 일상이 장지(한지의 종류)에 분채로, 조선 후기 추상화법처럼 표현한 인물들로 나타나고 게다가 글자의 향기까지 담아냈다니! 한편으론 만화 같기도 한데, 좌충우돌 말썽쟁이로 사는 게 당연한 우리 청춘의 고통과 해학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서른 살의 강을 건넌 조장은 씨. 그도 우리처럼 언젠가 결혼을 하고, 패키지여행 상품처럼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렇게 옆집, 뒷집, 앞집 여자들처럼 적당히 나이 들고 적당히 진부해져 가겠지만 그는 그게 두렵지 않다. “오히려 기대가 돼요.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가면서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일상을 그려내고 싶어요.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운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한 켜 한 켜 쌓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 짐이기도 하지만 덤이기도 한 일상을 쌓아가다 보면 이렇게 고운 그림이 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깨닫는다. 맞아, 엄마라서 예쁘지, 여자라서 예쁘지!
 

조장은 씨는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위로를 주는 그림일기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색시한 그림일기> <골 때리는 스물다섯> <센티멘탈도 하루 이틀>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골 때리는 스물다섯> <엄마라서 예쁘지> 등의 책을 펴냈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