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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전갑배 씨 생명 있는 것들의 봄!

돌돌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말 한 마리 노닌다. 덤불 속 풀꽃 향에 코 박은 것인지, 이파리들 사분대는 장난에 간지러워, 간지러워 웃는 것인지…. 우람하고 매무새 빼어난 말보다는 이렇게 짧은 다리, 오동보동한 허리의 조랑말이 좋다. 이 조랑말이 풀밭 위를 거닐면 방울 소리 떨어진 곳마다 꽃이 피어날 것만 같다.

화적 떼처럼 올라오는 봄기운에 가슴이 설레는 계절, 3월호 표지 작품 ‘생동-2’는 그렇게 봄의 정취로 가득하다. “제가 특히 말 그림을 많이 그립니다. 도약, 힘, 기운생동, 새 생명 같은 게 느껴지니까요. 무엇보다 말의 형태미가 재미있고요. 이 ‘생동-2’는 세상에 없는 말입니다. 제 가슴에서 태어난 분홍색의 말. 생동감을 더하고 싶어 인위적으로 색을 바꾼거죠.” 보는 내내 가슴에 벌겋게 꽃피는 이 어여쁜 그림. 저 어린 말, 저 꽃, 저 들을 보니 오늘은 참 좋다, 이 세상.

이 그림은 마음속 아련한 서정과 순수성 까지 불러일으키는 묘한 재주가 있다. “내가 아마도 자연이 키운 아이여서 그렇겠죠? 김해에서 나고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 자랐는데,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며 자란 내게 자연은 낙천성, 긍정적 에너지, 생명의 에너지를 줬어요. 그런 것이 항상 내 그림의 중심이 되어 왔고요. 반백이 된 지금까지 자연과의 친화력, 동심, 순수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는 게 작가로서 큰 장점일 것입니다. 그런 에너지들은 색과 연결되기도 하죠.” 자운영꽃이 핀 들판, 쇠꼬리를 잡고 뛰놀던 초원, 마을 뒷동산을 지키던 나무, 안개처럼 마을을 뒤덮곤 하던 밥 짓는 연기… 모두 색이 있었다.


(왼쪽) ‘동심 ’, 아트지에 오일 파스텔과 콘테, 57×38cm, 2012
(오른쪽) ‘생동-1 ’, 아트지에 오일 파스텔과 콘테・흑연, 57×38cm, 2012

그의 작품은 일견 어린아이의 서툰 그림처럼 보인다. “아이 되기. 예술에서 중요한 덕목이기도 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가식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적절하죠. 아이 눈으로 보는 것만큼 순수한 세상은 없으니까요.” 조금 설명하지만, 그래서 더 많이 설명하는, 아이의 것을 닮은 그림.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좀 투박하고, 어딘가 일그러진 형태인 것 같은데 별로 이상하지는 않고…’라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원래 우리가 살던 집, 쓰던 물건이 다 그랬어요. 그 기막히게 어정쩡하고도 탁월한 작품성, 무르익는 모순이 우리 문화의 특질 아닌가 싶습니다. 50년 넘게 그림 그리며 그런 위대한 미적 질서를 찾아냈다면 다행인 거죠.” ‘생동-2’를 찬찬히 들여다보시라. 호두껍데기처럼 닫혀 있던 마음에 ‘동심’이라는 작은 구멍이 다시 열리셨는지?

그는 인생의 중반부를 잘나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광고와 출판 등을 넘나들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연구소를 열고 한국적 일러스트레이션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김용택 시인과 펴낸 <우리 문화 그림책-맑은 날>로 대중과 친숙해진 일러스트레이션 작가이기도 하다. 무속 신화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당금애기> <바리데기> 같은 책도 세상에 내놨다. 교수가 된 후 다시 순수 회화에 몰두했지만, 20년 넘게 자기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시간만을 보냈다. 그가 20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5월 2일부터 8일까지 인사아트센터). “예전의 제 그림이 바싹 달려들어 ‘들여다보기’ 한 작품이라면, 지금은 한 발자국 떨어져 관조하듯 ‘바라보는’ 작품이 됐다 싶어요. 스스로도 제 그림을 보며 왜 이리 편해졌지? 왜 이리 즐거워졌지? 할 정도니까요. ‘그림이란 뭔가’ 고민하던 불면의 밤과 낮, 수없이 그렸다 지운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내 마음을, 그림을 다독인 것 같습니다. 이제 전갑배라는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를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해준다면 바랄 게 없겠죠.” 이번 개인전에서는 아트지에 오일 파스텔, 콘테로 그린 그림을 13~14점 정도 선보일 예정이다. 말과 사람, 꽃과 나무, 물고기와 새 등이 화폭 위에서 제 생명성을 마구 뽐낼 것이다. 그가 그림에서 끝없이 추구하던 전통성, 자연 회귀, 휴머니즘 같은 미덕이 이번에도 담겨 있을 듯하다.

다시 ‘생동-2’를 관조하듯 바라보시라. 언젠가 바람을 가르며 내달릴 저 어린 말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가. 바다를 목전에 둔 채.

전갑배 씨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다. 이후 대한전선, 제일기획, 삼미그룹 등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1984년부터는 일러스트레이션 연구소를 열고 출판, 광고 등을 통해 향토적, 토속적 이미지를 발표했다. 1986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바탕골미술관, 롯데 미술관, 갤러리 미건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