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이광호씨 애무의 흔적
찬란하게 붉은 사랑의 마음을 간절히 밀어 올린 것이냐. 환장하도록 아리따운 꽃 몇 송이 피어났구나. 온몸에 독 오른 바늘을 꽂고 엄한 경계령만 내리는 줄 알았더니 이토록 아리따운 꽃 피우려 그랬구나. 사랑의 꽃 피우는 일이 이토록 가슴 미어지는 일인 줄 몰랐구나.

<행복> 10월호 표지 작품인 이광호 작가의 ‘캑터스Cactus No. 63’은 화농처럼 꽃봉오리 피어난 선인장 그림이다. 너무도 세밀해 언뜻 사진으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시털에 난 붓질 자국까지 선명한 그림이다. 우리는 그를 ‘한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라 부른다. 어쩌면 노동자에 가까운 화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화면에서 스며 나오는 그 공력을 짐작했다면 더더욱.

“아침에 망설이는 시간 없이 바로 붓을 들 때가 참 좋아요. 아침 8시 반이면 작업실에 출근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해요.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는 온종일 열심히 그리죠.” 참한 동사무소 주사처럼 하루를 성실로 채우는 그. 선인장연구소에서 사진을 찍고 손바닥만 한 선인장을 작게는 수십 배, 크게는 수백 배까지 확대해 캔버스에 그린다. 녹색 기둥은 물감을 두드려서 칠하고, 잔가시는 뾰족한 바늘로 찍어 표현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린 선인장은 어딘지 낯설어 보인다. 장독대 옆에 의뭉스럽게 놓인 ‘화초’가 아니라 굵직한 남근처럼 보이기도 하고, 광막한 공간 속에 고립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에 인간의 뜻을 전하는 석상 같기도 하다. 녹색 줄기와 무채색에 가까운 가시 그리고 눈부신 흰색 배경 앞에 선 낯선 존재. “선인장은 단지 소재일 뿐이죠. 어느 날 종로5가를 지나다 화초 가게에서 선인장을 발견했는데, 선인장이야말로 촉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2006년쯤인데 그때부터 선인장을 그리기 시작했죠. 선인장 그림에 어떤 메시지를 넣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설명적 요소도 배제하죠.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만 몰두하죠.” 아직까지는 그의 말이 암호 같아 그 말을 할딱거리며 뒤쫓는다.

그리고 싶은 욕구, 사랑하고 싶은 욕구
원래 그는 인물화를 그렸다. 첫 개인전의 주제는 ‘시선’이었다. 짝사랑한 여자 그리고 그녀에게 비틀거리느라 섧디섧은 자신의 감정 변화를 인물화에 담았다. 그때도 대상 자체를 그린다기보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 그녀와 자신 사이에 오고간 시선을 그렸다. 그 후 결혼도 하고(짝사랑 그녀는 아니다) 초롱종지 같은 아이도 낳는 보통 사람의 삶을 꾸리면서 그는 ‘가족’을 주제로 또 줄기차게 그렸다. 이번엔 마주 보는 관계(아내와 아이)를 그렸다. “그때까진 사연을 그렸으나, 점점 나이가 들고 사연이 없어지더라”는 그는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스튜디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들어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바로 ‘인터뷰Inter-view’ 시리즈로 1백여 명의 인물화를 그렸다. 작가, 주부, 수사, 학생, 큐레이터, 노동자 등 직업·성별·연령·계층에 상관없이 그들을 실제로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내면적인 정보를 찾아내고 그 기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들과의 대화를 동영상으로 기록하고, 그들과 연관 있는 사물(염주, 안경집, 열쇠, 볼펜, 티셔츠 따위)을 함께 전시해 관람자가 그 존재의 생생한 결을 느끼게 했다.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 대신 대상을 오롯이 보여주자, 언어적 측면을 빼버리고 촉각과 감각으로 보여주자, 생각했죠. 피부와 옷의 존재감이 생생히 드러나도록 세밀하게 그려나갔죠. 그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까지 한 번쯤 만져보고 싶게끔. 그때부터였어요. 촉감에 몰두하게 된 건.”

(오른쪽) Cactus No.71’, 캔버스에 유채, 107.5×145.5cm, 2011

이후 그는 줄기차게 선인장을 그렸다. 캔버스 위에 붓으로 열렬한 애무를 쏟아놓았다. 그와 절친한 평론가 김윤섭 씨는 “그의 붓엔 혀가 달린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캔버스 위에서 물감을 자분자분 비벼대고, 유화가 마르기 전 전광석화 같은 속필로 가는 선을 풀어낸다. ‘기술적 완벽함을 가진 회화의 마스터’라는 별칭답게 그는 물감을 나이프로 긁어내기도 하고, 표면을 문지르기도 하면서 캔버스에 묻은 최소한의 물감으로 섬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제가 무언가를 그린다는 건 그 대상에 대한 내 사랑을 드러내는 겁니다. 내 사랑의 방법은 육감적, 촉감적이죠. 그래서 제게 그린다는 건 애무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입니다. 캔버스에 붓이 닿는 순간, 내 모든 감각과 감정은 결정됩니다. 손끝에 에너지가 충만해지면서 무의식 속에 잠들었던 욕망이 깨어나죠. 그리고 싶은 욕구, 사랑하고 싶은 욕구.” 그렇게 붓질의 애무가 지나간 자리마다 닫혔던 꽃망울이 움트고, 살빛 뜨거운 꽃이 피어난다. 선인장 기둥의 무거운 척추로도 욕망이 흘러내린다.

동물적이라고 느낄 만큼 육감적인 이 거대한 식물의 이미지는 우리 내면의 숨은 욕망까지 건드린다. 바로 살아 있음, 살고 싶음이라는 본능과 생존의 욕망. 환한 꽃대를 달고 폭발하듯 새끼 치는 생명의 욕망. 그 하염없는 욕망을 질러놓고야 마는 이광호 작가의 그림 앞에서 어찌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을 수 있나. 그것이 단지 간지러운 허무의 촉감이라 해도.

화가 이광호 씨는 1967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갤러리 보다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한 이래 <이중 간첩> <주석 달기> <인터뷰 인 창동inter-view in changdong> 같은 인물 초상 전시를 했고, 2006년부터 선인장 작업을 시작해 2010년 국제갤러리에서 <터치Touch>전을 열었다. 10월 2일까지 부산의 조현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 <터치Touch>가 열리고 있다.
문의 051-747-8853
글 최혜경 기자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