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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국립중앙박물관 김영나 관장 드디어 우리 품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요즘 ‘의궤’라는 단어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의궤란 말은 생소한 용어였으며 더구나 프랑스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는 소수의 전문가 외에는 직접 본 사람이 없는 베일에 싸인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외규장각 의궤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우선 외규장각이 무엇인지, 의궤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역사는 적자생존된 ‘이야기’다. 수많은 이야기가 명멸하는 가운데 살아남은 이야기만이 계보를 만들고, 우리는 이를 ‘역사’라고 부른다. 얼마 전 우리는 잊혀졌던 역사, 드라마틱한 사연을 지닌 채 프랑스 땅에서 살아남은 역사, 바로 외규장각 의궤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오래 살아남은 우리 것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있다. 1백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만나기 위해 10만 인파가 몰렸고, 뭉클함과 뿌듯함을 맛보고 돌아갔다.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조선 왕조의 의궤는 왕실에서 행하는 각종 행사의 순서, 동원한 기물, 참여한 인물에 관한 정보를 세세하게 담은 일종의 매뉴얼 북입니다. 의궤를 살피면 조선 왕실이 얼마나 예법과 정통성을 갖춘 왕조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궤를 제작한 목적이 왕실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있지 않았지요. 국가 운영의 기준을 바로세우고, 후대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게 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습니다. 의궤 속에서 반차도(왕의 행차도)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왕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행차가 아니라 임금이 힘 없는 백성을 살피려고 궁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났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나라의 왕조에도 이런 자료가 있지요. 하지만 그림까지 그려진 책자로 대를 이어 나라 행사를 기록해온 사례는 조선 왕조 의궤가 유일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국내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된 8백33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한데 제가 흥미롭게 본 사실은 우리나라 의궤의 반차도에는 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총책임자인 도제조만 등장하죠. 왕의 얼굴을 함부로 그리지 않는, 존왕尊王 의식이 드러난 대목입니다. 서양에서는 왕의 모습을 백성들에게 더 많이 전파하려고 했는데 말이지요.” 김영나 관장의 이야기처럼 의궤에는 조선 왕조의 통치 체계, 예법 등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조선 왕실의 의궤 중 특히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외규장각 의궤는 1백45년 전인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약탈해 갔는데, 강화도 앞바다에서 증기선에 실려간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이때 약탈당한 1백89종 3백40여 책 중에서 2백97책의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 국민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1975년 재불학자인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고 우리나라에 알렸습니다. 우리 정부가 공식 반환을 요청한 것이 1991년이고,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 때 의궤 한 권을 들고 오긴 했지만 그 이후로 반환 협상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지요.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2010년 11월 G20 서울정상회의 기간에 사르코지 대통령이 방한하면서부터입니다. 두 나라는 5년 단위로 갱신이 가능한 조건으로 ‘임대’ 방식으로 반환에 합의했지요. 이후 실무 협상을 거쳐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 4월과 5월 인천공항을 통해 되돌아왔습니다. 반환하는 과정에서 여러 난관을 겪었지만 각계각층이 반환을 위해 노력했고 결국은 이뤄냈다는 게 중요합니다.”

국립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 초대 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의 딸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서울대 박물관장 등을 지내며 문화재와 불가분의 관계로 살아온 김영나 관장. 그에게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어떤 의미일까. “개인적으로 외규장각 의궤가 가진 스토리가 굉장히 안쓰러웠습니다. 남의 나라 군인들에게 약탈당해 이역만리에 가 있다가 1백45년 만에야 돌아온 의궤가 왠지 조상님처럼 생각되더군요. 이번에 외규장각 의궤 반환과 관련해 특별 전시에서 의궤의 일부 내용을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만들어 선보이는데, 선조들에게 ‘우리나라가 그동안 이렇게 발 전해 IT 세계 최강국으로 이런 영상도 보여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큰 박물관도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자리 같더라고요. ‘그동안 고국으로 못 모시고 와서 죄송했으니 잘해드려야지’ 이런 생각으로 전시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 곁으로 다시 오기까지 유물 포장, 운반, 확인 작업, 소독 등 그 수송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유물의 산성화를 막는 포장재인 중 성지로 유물을 포장한 후 종이 상자에 한 번 싸고, 크레이트(명화나 유물을 운송하기 위해 충격 방지, 온도ㆍ습도 조절을 갖춘 특수 제작 상자)에 담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비행기를 통해 인천공항으로 수송되었는데,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 때문에 항공사 간 유치 경쟁이 치열했다는 후일담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후에는 무진동 특수차에 실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 외규장각 의궤 중 71점이 특별전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를 통해 일반 관람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 외의 의궤는 섭씨 20℃(±2℃), 습도 55%를 유지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고온다습하면 고서에 벌레가 잘 생기고 너무 건조하면 섬유질이 약해서 찢어질 우려가 있다 보니 항온ㆍ항습에 유의하고 있다. 특히 습도 조절 기능이 뛰어난 오동나무 장에 넣어 보관하게 된다.

“관람객들처럼 저도 표지나 장정, 그림의 색깔, 글씨 등이 거의 변색ㆍ변형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프랑스의 보존 기술 때문이라고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런 면도 있겠지만 우리가 제대로 잘 만든 까닭이라고 봅니다. 초주지라는 최적의 종이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채색도 수차례 거쳤지요. 왕이 보던 어람용 의궤속의 반차도는 인물의 수염까지 여전히 선명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의궤를 만든 종이인 초주지에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한다. 한지 원료인 1년생 닥나무 속에는 섬유가 딱딱해지거나 변색하는 것을 막는 리그닌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다. 또 종이를 뜰 때 푸는 풀(황촉규 뿌리로 만든다)이 닥 섬유를 pH 7.9 정도의 중성으로 만들어 변색을 막는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나라만의 초지법草紙法인데, 흘림뜨기 방식( 앞물을 떠서 뒤로 보내면서 섬유를 세로로 누이는 방법)으로 만든 한지는 섬유가 좌우로 교차해 강도가 강해진다. 마지막으로 다듬이로 두드려주는 과정을 거치면서 강도를 높이고 먹 번짐을 잡게 된다.

“이렇게 우수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구팀을 구성해 세부적인 연구를 해나갈 계획입니다. 1백45년 만에 힘겹게 우리 곁에 돌아온 우리 역사이니만큼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지켜야지요.” 이 이야기처럼 ‘역사’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건 우리 몫으로 남았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밝혀내 반환에 이르게 하는 단초를 만들어준 박병선 박사.

서울대 사범대 졸업 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그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임시직 사서로 일했다. 동료의 부탁으로 ‘아주 오래된 동양책’을 찾아주다 그것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임을 발견했다. 이후 스승 이병도 교수의 당부로 외규장각 의궤를 찾다 도서관의 베르사유 별관 내 수장고에서 비단 표지에 문고리 장식이 달린 책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외규장각 의궤다.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2백97권의 의궤를 찾아냈고, 10여년의 연구 끝에 의궤의 내용을 해석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에서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운동이 시작되는 불쏘시개 역할이 되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83세가 된 박병선 박사는 현재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
글 최혜경 기자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