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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사진작가 김광수 씨 추억이라는 기억

다락 안에 기어들어가 꽃보자기를 걷으면 배시시 분 바른 ‘그녀’가 있었다. 제사상에 귀하게 올리는 무지개 젤리가 설탕 분 바른채 색시처럼 앉아 있고, 그걸 바라보는 애녀석 얼굴에선 누런 콧물, 묽은 침이 들락날락했다. <행복> 7월호 표지 작품 ‘무지개 사탕 02’에는 그렇게 소년의 오후가 숨어 있다. 손자놈 바지 주머니에 젤리를 채워주시던 할머니, 손가락까지 쪽 핥으면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던 그 상냥한 맛, 고추 달린 놈이 단것만 밝힌다고 엄마가 뭐라시면 할머니 뒤춤에 숨으면 그만인 소년의 오후.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어렸을 때 좋은 추억이 있었나 보다고 해요. 종손인나를 할머니가 애지중지하셨어요. 닭이 막 낳은 달걀은 늘 내 차지였고, 할머니의 다락은 내 보물창고였죠. 이 작품 속 젤리는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처럼 다락에 숨은 내 기억의 오브제예요. 여기서 기억은 사랑의 다른 단어겠죠. 세상이 총천연색 기쁨으로 빛나던 시절의 판타지까지 담은, 그래서 젤리가 둥둥 떠다니는….”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것도 같지만 이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다. 정교하게 계획되고 재구성된 정물 사진.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먼저 스케치를 하고, 그에 맞는 소품을 찾으러 시장을 돌고, 그렇게 구한 물건을 방에 놓아둔 채 1년이고 2년이고 보고 또 본다. 어린 시절부터 모은 장난감, 젤리와 사탕, 정물 사진의 모델인 사과까지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에서 그 물건들을 돌려보고 만져본다. “사람 얼굴처럼 물건에도 표정이 있어요. 사물이 빛(조명)을 만나면 색도 형태도 변화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특정 용도를 지닌 사물에서 벗어나 추상성까지 느껴져요. 마치 환상 속의 어떤 존재처럼 말이죠.” 그렇게 그 물건이 ‘존재’로 다가오면 그때 사진을 찍는다. 그 다음 어떤 부분은 확대하고, 합성한다(허공에 뜬 젤리 처럼).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판타지’ 시리즈다. 장난감 자동차가 줄지어 달리다 콩! 하고 부딪히는 순간 하늘에선 총천연색 사탕과 젤리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이 작품은 제목이 ‘황홀한 충돌’이다), 낡았지만 씩씩한 장난감 자동차가 머리 위에 젤리를 모자처럼 쓴 채 달리고 (왼쪽 페이지의 인물 사진 뒤로 보이는 작품), 사과의 우윳빛 속살을 탐하는 중인지 나비 한 마리가 사과에 붙어 있다. 모두 ‘판타지’ 시리즈다. 사과를 찍을 때도 그의 공력은 여전하다. ‘15도 틀어진 사과의 빨간색’을 표현하기 위해 사과를 몇 박스나 잘라낸다.


김광수, ‘사과나무’ 시리즈, 2011

구름과 별과 사과나무와…
그는 20년 넘게 흑백 구름 사진을 찍어온, 이 땅에서 ‘구름 사진’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작가다(그전에는 광고와 잡지 사진을 찍었고, 연예인들의 얼굴에서 세속잡사를 떨쳐낸 초상 사진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구름 사진에는 하늘과 땅과 구름이 함께 존재한다. 구름을 찍을 때 그의 눈길은 늘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 쏟아진다. 그 눈길은 고요하지만 또 열렬해서 사람 하나 없는 지평선을 찍었는데 그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사진 평론가 진동선 씨는 “그는 구름을 통해 순간(한때)을, 또 관계(삶)를, 부재(소멸)를 이야기한다”라고 평했다. 그는 하늘과 땅과 구름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지평선을 찾아 내몽골 사막,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까지 떠돈다. “구름 사진은 오랜 기다림과 고독, 그리움 뒤에 만들어집니다. 내 몽골 사막에 7~8번 가서 겨우한 작품만 찍고 올 때도 있어요. 이제 20년 넘어가니 원하는 구름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언제 어떻게 생기는지도 알아요. 구름 사진을 찍을 때도 먼저 스케치를 하고 그에 맞는 지형을 찾아다녀요. 그렇게 내 마음에 맞는 지형을 찾으면 그곳에 가서 기다리죠. ‘그때’가 오기를.” 나는 그의 구름 사진이 ‘시간을 오래 견뎌낸 사람이 본 저 너머의 세상’이라 말하고 싶다. 구름 사진은 꼭 뜸 들이며 보시길 바란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별’ 시리즈도 찍고 있다. 구름을 찍으러 케냐 투르카나 호수엘 갔다가 별에도 색깔이 있다는 걸 알았다. 빨간 별, 파란 별, 노란 별이 하늘에 그리는 풍경을 그는 추상화 같은 사진에 담았다. 이 ‘별’ 시리즈는 내년쯤 개인전에서 볼 수 있다는데, 미리 슬쩍 본 바로는 ‘대단하고 장엄하다’. 최근에 그는 ‘사과나무’ 시리즈도 시작했다. “장호원의 과수원에 ‘내 사과나무’를 한 그루 사뒀어요. 새벽에 장호원엘 내려가서 내 나무 옆을 거닐다 와요.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 행복해요. 그걸 사진으로 찍는데, 에덴의 사과나무를 생각하며 나무 아래 모래를 깔았어요. 나무 뒤에 배경막까지 치고 나면 굉장히 추상적인 나무가 돼요. 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동양화 한 폭 같기도 하고. 한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먹지 않으면 못 배길 유혹의 나무죠. ‘이브의 사과’라고 부를까 생각하고 있어요.”

구름을 찍었고, 젤리와 사탕을 찍다 별을 찍고, 사과나무를 찍는그.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은 구름처럼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으나, 늘 ‘그곳’에 있었다. 구름처럼 떠다니면서 그가 작품으로 이야기하려는 건 기억이 아닐까. 찰나의 기억(구름), 추억이라는 기억 (사탕), 지구의 기억(별), 생명의 기억(사과나무). 그는 곧 또 하나의 기억을 찾아 아프리카 사막으로 떠날 것이다. 그곳에서 들짐승처럼 웅크린 채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을 것이다.

(오른쪽) 김광수, ‘나의 구름’, 1990

김광수 씨는 1957년생으로 신구대학 사진과를 졸업했다. 1979년에 연 개인전 <벽>을 시작으로 <구름Ⅰ> <구름Ⅱ> <김광수의 이야기> <나의 구름> <메모리 올드 앤 뉴> <달콤한 기억> 등의 개인전을 가졌다.
글 최혜경 기자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