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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화 그리는 화가 김선희 씨 까탈스러운 옻으로 채색한 여백의 미
김선희 씨의 작품은 시각보다 후각이 먼저 옛 기억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 은은히 풍기는 옻 냄새 때문이다. 벽에 고가구 한 점 걸어둔 듯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그의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선희 씨의 손끝은 늘 먹물에 담갔다가 꺼낸 양 새까맣다. 자세히 보면 길게 기른 손톱이 한쪽 방향으로 기이하게 닳아 있기도 하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면 그의 손끝이 무엇에 물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먹이나 잉크가 아닌 옻 자국이다. 손톱 모양이 그러한 것은 나무에 옻을 바르고 갈아내고 다시 바르는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손톱이 나무판에 갈리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옻칠 공예를 하시는군요?”라 묻는다. “옻으로 그림을 그려요”라는 대답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옻칠 가구나 공예품은 잘 알려져 있지만 옻칠 그림은 국내에서 생소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선희 씨는 먹 대신 옻을 택했다. 옻칠 그림은 한국화의 전통 기법은 아니다. 대학교 때 중국에 연수 갔다가 우연히 옻칠 그림에 매료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옻칠 기법을 익힌 뒤 7년째 옻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옻은 다루기가 아주 까다로운 재료다. 가격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한 면에 여러 번 세심하게 덧칠해야 하니 번거롭다. 건조 조건을 맞추기도 쉽지 않고 마르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게다가 옻이 심하게 오르면 상당히 곤혹스럽다. 김선희 씨는 ‘운이 좋은지 옻을 타지 않는다’며 싱긋 웃는다. 그러곤 곧바로 진지한 낯을 하고 이렇게 말한다. “옻의 매력에 중독된 것 같아요. 옻은 제게 가장 완벽한 재료예요.”

옻은 거의 영구적이다. 옻칠 그림은 유화에 비할 수 없이 오래 보존할 수 있다. 고구려 벽화나 <팔만대장경>이 지금까지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옻의 힘 덕분이다. 또한 옻은 칠하고 갈아낸 뒤 덧칠을 반복할수록 깊이를 더한다는 점도 옻칠 그림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이다.

특히 김선희 씨가 좋아하는 고가구를 묘사하기에 옻만큼 적합한 재료가 없다. “고가구가 손때를 덧입은 긴 시간을 상상하면 들뜨고 말아요. 시간이 덕지덕지 묻은 고가구를 표현하고 싶어서 질감 표현에 공을 많이 들이죠. 옻칠은 오래된 느낌을 표현하기에 알맞습니다.” 고가구 표면의 나이테와 불규칙하게 갈라진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그는 세심한 손길로 옻칠을 하고, 갈고 덧칠하고 다시 갈기를 반복한다. 그의 작품에서 특유의 차분하고 잔잔한 색감이 느껴지는 것도 옻칠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림 속 가구만 옻칠을 하는 줄 아는데, 사실 화판 전체에 옻칠을 수차례 한 뒤 그 위에 또다시 옻에 안료를 섞은 것으로 과일이며 그릇을 채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전체에서 옻의 누르스름한 색조가 배어난다. 세월을 입은 창호지의 누런 색감과 닮았다. 혹은 오후 5시 무렵의 지는 해가 비춘 거실 풍경 같다.


(위) 김선희 씨의 옻칠 그림 ‘목애당’(2007)은 가구가 놓인 방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을 본 이들은 나이 지긋한 작가를 떠올리기에, 전시장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그를 보고 놀란다고.
1, 2, 3 ’목애당’(2005). 모든 작품은 나무판에 옻칠을 무수히 반복한 끝에 태어난다.

김선희 씨는 정물화를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가정이 화목해서 그런지, 밖보다는 안에 머물기를 편안히 여기기 때문인가 봐요. 한자리에 놓인 지 오래되어 안정적인 가구 혹은 방에서 내다본 고즈넉한 바깥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모든 작품의 제목도 한결같이 ‘목애당牧愛堂’이다. ‘사랑을 기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랑이 피어나는 집 하면 이런 공간이 떠올라요. 단정한 사물들, 그리고 오래되어 더욱 향긋한 냄새가 그 공간을 차지하겠죠.”

한국화를 공부한 덕인지 구도가 정적이다. 긴 수평선이 주로 등장하는 정면의 일자 구도는 작가를 편안하게 한단다. 특이한 것은 안정감과 함께 긴장감을 준다는 점이다. 낮고, 아담하고, 소박한 멋이 돋보이는 가구를 어느 지점에서 뚝 ‘잘랐다’. 과감한 트리밍이다. 그래서 모던하기도 하다. “제 토대는 한국화지만, 엉뚱한 시도가 가미된 작업이 즐거워요.” 고가구에 달린 장석을 그리는 대신 오래된 장석을 구해 실제로 표면에 박는 것도 유쾌한 콜라주 작업의 일환이다. “화판에 완전한 옻칠 가구 한 점을 짜 넣는 기분이에요. 비록 가구의 일부만 화면에 나올지라도 말이죠. 고가구의 질감을 묘사하는 일은 고되면서도 카타르시스가 차올라요. 작품을 완성시키고 나면 또 하나의 즐거움이 기다립니다. 바로 여백이지요. 저뿐 아니라 작품을 보는 다른 이들도 여백에서 충만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