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진흔 씨는 가족이 사는 집 바로 옆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덕유산 자락이 이들의 보금자리를 감싸고 있다.
2 전남 장수에 있는 정진흔 씨의 사과 농장에서 4월 말 가장 분주한 존재는 바로 벌이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얀 사과 꽃 사이를 날며 꿀을 채취하는 동시에 암술과 수술을 비벼 수정시켜야 한다. 벌에겐 치열한 공작소인 이곳이 정진흔 씨의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놀이터다.
3 정진흔 씨가 농사를 시작했을 때 태어났다 하여 ‘농부의 아들’로 불리는 세영이는 아빠의 일손을 거드는 것보다 사다리 올라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화가의 딸, 농부의 아들 지인들 사이에서 정진흔 씨의 첫째 혜영 양은 ‘화가의 딸’로, 둘째 세영 군은 ‘농부의 아들’로 불린다. 여기에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장녀는 정진흔 씨가 전업 작가로 활동할 때 세상에 나왔고, 둘째는 그가 가족을 이끌고 전북 장수로 내려와 사과 농사를 지을 때 태어났다. 그러니까 ‘화가의 딸’ ‘농부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화가이자 8년째 이곳에서 사과를 키우는 농부인 정진흔 씨의 이력을 빗대 지어진 것이다. 대체로 전업 작가의 생계는 고달프기 마련이다. 작품에 매진하다 보면 ‘밥벌이 근육’을 발달시킬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정진흔 씨도 그랬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까지 생기니 무어라도 해서 딸린 입을 해결해야 했다. 문제는 ‘어떤 일을 하는가?’였다. 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업이 아니라 여겼고, 그 외의 다른 일들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8년 전 첫째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농사나 짓자’며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농사를 지어오신 부모님이 근방에 살고 계셔서 내심 한 수 배워가며 익히면 되겠다는 생각에 큰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게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농사씩이나’ 지을 결단을 했는지, 참….” 정진흔 씨는 ‘어허허’ 웃으며 담배를 피워 문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살리기 위해 도시 사람들은 ‘귀경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대체로 평화롭고 안온한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정진흔 씨도 귀경을 결심했을 때 낮에 밭 좀 일구다가 해질 무렵이면 그림을 그리는 낭만적이고 풍요로운 광경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농사도 현실이고, 현실은 냉혹했다’고 고백한다. 하기는 국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도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크게 운다는데 하물며 수천 그루의 사과나무는 어떠했겠는가. 젊은 부부의 경제적 여건으로는 말끔하게 개간된 농작지가 아닌, 소나무로 뒤덮인 덕유산 자락의 산지를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소나무를 뽑거나 잘라내 농지로 개간한 다음 농토를 비옥하게 가꾸고 사과 묘목을 심었다. 사과 묘목은 3년 정도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처음 3년 동안은 수확 없이 쉬지 않고 일만 했다. “묘목은 2년 동안 키워봐야 앙상한 가지 상태예요. 그때 비로소 ‘내가 내심 열매를 거저 먹을 생각을 했구나’ 하는 뉘우침이 들었습니다.” 3년째 되던 해 가을, 아주 조금이지만 첫 열매를 보았다. 처음으로 딴 사과 50상자를 마주하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 2천 상자를 거두었고, 그 다음 해부터 지금까지 매년 5천 상자의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1 일요일 오후, 정진흔 씨가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작업실이 아무리 어질러져 있어도,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고마운 장소다.
2 요즘 정진흔 씨가 새참으로 즐겨 먹는 것은 민들레잎 쌈밥이다. 여기에 ‘소맥’(소주와 맥주를 3 대 7로 섞은 술)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3 전라도 일대 고물상이나 빈집에서 구하는 작품 재료들. 세월은 주위 사물들의 모난 부분들을 깎아내기 때문에, 오래된 물건은 순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4 그가 요즘 몰두하는 것은 이처럼 물감 대신 단추나 검정 고무줄 등으로 형상을 만든 뒤 녹인 파라핀을 부어 굳힌 회화 작품이다. 무명색이 한국의 색이라고 말하는 그는 파라핀이 무명과 비슷한 색을 연출하기 때문에 오래된 문틀 같은 전통 소재와 잘 어울린다고 한다.
5 낡은 됫박으로 만든 프레임 안에서 노니는 목조각들은 우리나라 전통 목인木人을 연상시킨다. 주황, 청록, 노랑 등 화려한 원색 칠을 덧입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사과 농장에 사과가 제대로 맺히기까지 4년 동안 그는 체력의 극한을 경험했다. “사실 육체적 고통보다는 작품 활동을 할 틈이 없어서 생긴 정신적 고통을 훨씬 참기 어려웠습니다.” 과수원 일을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던 이유도 사과나무를 살리기 위해 쏟는 노동량이 너무 많아 그림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술계 사람들이 그를 두고 ‘해외에 나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할 정도로 정진흔 씨는 농사 일에만 매진했다.“농장의 모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린 해에 남편은 4년 만에 붓을 잡았어요.
제가 이곳으로 내려온 이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지요.” 결혼 전에는 남편이 하루도 그림 작업을 쉬지 않았던 것을 알기에, 부인 정실비아 씨는 걱정이 많았단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남편의 작업실이 환하게 밝혀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우리 아빠 직업은 ‘화가’
정진흔 씨는 농부이기 전에 화가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농사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삶의 이유’라는 데 방점을 찍는 말이다. 이는 사과 농장을 하는 지금도 유효하다. 말하지 않았는데 자식들도 안다. 혜영이와 세영이는 아버지 직업을 쓰는 곳에 ‘화가’라고 적는다. 평면 회화를 주로 하던 그는 이곳에 정착한 뒤부터 오브제 작업을 많이 한다.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낡은 됫박이나 문틀을 액자로 삼고 그 안에 사람이나 사물 등을 본딴 목조각을 넣는 조소 작품이나, 물감 대신 검정 고무줄, 단추 등으로 형상을 만든 뒤 녹인 파라핀을 부어 굳힌 회화 작품을 한다. 전라도 일대의 폐가가 된 시골집을 뒤져서 닳고 닳은 목자재를 구하는 일에서부터 작업은 시작된다. 검정 고무줄이나 됫박이라니, 소재가 생소하다. 아니, 흔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작품 소재로 삼는다는 사실이 낯설다. 왜 오래된 것을 작품 재료로 삼았을까?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어요. 됫박 같은 도구들은 어린 시절부터 보아와서 익숙한 것들이지요. 작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먼저 떠올린 것도 그때의 풍경입니다. 이곳에 내려온 뒤에 본격적으로 작업했고요.” 오래된 물건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따뜻하고 친숙하게 연출하는 역할도 하지만, 정진흔 씨는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전하는 상징물로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 시절, 가령 이 문은 그리운 이를 기다리며 몇 번을 여닫아보았을 것이고, 창호지를 바른 문 밖으로 들리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에 행복감에 젖어보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문틀은 자기 자신의 마음 혹은 외부와의 소통을 상징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됫박 같은 가재도구에는 서민층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고요.”
농사를 지은 뒤로 도시에 살 때는 생각하지 못한 모티프를 얻곤 한다. ‘달빛 아래 모내기’라는 작품도 이곳 어르신들이 달빛을 조명 삼아 모내기를 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이루어졌다. 이런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한국화를 전공했냐고 묻기도 한다. 한층 단순해진 선과 정적인 구도에서 여운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점점 장식이나 꾸밈을 덜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와 씨름하는 도시 사람들 중에 이걸 보면서 ‘쉼표 같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사과 농사와 그림 사이
옛 선비들은 낮에 밭 갈고 밤에 책을 읽었다. 고매한 지성과 덕을 쌓는 공부도 몸으로 힘써 생산 활동에 참여했을 때 현학을 벗어나 일상에 견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정진흔 씨 역시 노동으로 키운 신체적·정신적 근력이 작품 세계를 넓고 깊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봅니다. 생명을 돌보며 계절의 변화에 더욱 민감해졌고, 흙을 만지며 감성의 텃밭도 넓어졌어요. 단, 이것은 노동이 어느 선까지 이루어졌을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초기 3년 동안 사과 밭에만 투신해야 했을 때는 농사 외에 다른 것을 겸할 수 없었지요. 농장이 안정되면서 비로소 제 작업 시간이 확보되었습니다.” 요즘은 아침 5시 반부터 저녁까지 농장 일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부터는 작업실에 ‘은닉’한다. 한참 몰두하다 보면 새벽 1~2시쯤 작업을 마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루 내내 밖에서 육체 노동을 했으니 보통 고되지 않을 듯싶다. “작업하다가 피곤하면 술 한잔 하기도 해요. 진하게 우린 뜨거운 홍차에 위스키를 섞어서 마시면 찌뿌드드한 몸이 어느 정도 편안해지죠.” 요즘 그의 작품 활동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전시회를 두 번이나 했고, 하반기 중에 한 번 더 앞두고 있다. “농사를 지어보니, 작업도 농사라는 확신이 듭니다. 농사짓는 마음가짐으로 한결같이 매진해야 참된 작품을 수확할 수 있지요.” 사과 농장을 걸으며 이렇게 말하는 정진흔 씨는 이야기 틈틈이 습관처럼 활짝 피었거나 아직 만개하지 못한 사과꽃 봉우리를 따낸다.
“사과 꽃이 참 예쁘게 피었지요? 그런데 어떤 꽃은 사과로 자랄 놈이고 어떤 꽃은 과일이 되지 못할 놈이라는 게 금방 보여요. 그래서 과일로 크지 못할 꽃은 한시바삐 따내고 싶어요. 사과 한 알을 알차게 키우기 위해서는 주변으로 영양분이 퍼지는 것을 어서 막고 싶은 거죠.” 그도 처음에는 애써 피워낸 꽃이 아까워서 차마 솎아내지 못했다. 그랬더니 속이 덜 찼거나 제 크기로 여물지 못한 사과만 그득했다. 그림 그리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과거의 세계관을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로 거듭 태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진흔 씨가 농사를 지으며 배운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다. “비가 안 오면 가지가 바짝 마르고, 일조량이 부족하면 사과의 당도가 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의 힘입니다. 인간이 하는 역할은 미미합니다.” 불모지에서 사과 5천 상자를 수확하는 과수원으로 발전했는데도 과연 그러하냐고 묻자 그는 재차 “제가 한 것이 아니에요. 자연의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한다. 하긴 이곳은 지형과 기후의 혜택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 지대는 황토밭이라 사과의 색이 맑고 투명해 상품 가치가 높고, 고랭지 지형이기 때문에 사과의 당도가 높고 육질이 아삭아삭하다. 일조량이 풍부한 덕에 다른 지역보다 과실이 빨리 여물기 때문에 앞서서 출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정진흔 씨가 사과 전문가가 된 사이, 아내 정실비아 씨는 흙에 손도 안 댔다. 남편의 완고한 의지이기도 했지만, 이곳에 올 때 첫째 아이가 7개월이었으니 농사를 거들기는커녕 아이를 돌보거나 농부의 안주인 역할에 충실하기도 바빴다. 농번기 때는 인부가 30~40명 정도 와서 돕는데, 이들에게 혼자 세 끼 식사 및 새참을 내려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이제는 이 일을 능숙하게 해내며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처음에는 이곳이 하도 적막해서 낮에 개라도 짖으면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어떤 불편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남편이 처음 시골로 내려가자고 했을 때 아무 이견 없이 동의했던 그 마음이 변치를 않더란다. 그러자 정진흔 씨는 “산골에서 한 10년쯤 살았으니, 혈기 왕성할 때 다시 도시로 돌아가 10년쯤 살고, 그 뒤에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네”라고 말한다. 부인에게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어디든지 함께 가지요.” 부드럽고 확신에 찬 이 부부의 목소리를 들으면, 10년 단위의 유목 생활도 어쩐지 아늑하고 풍요로울 것 같다.
* 정진흔 씨가 운영하는 ‘OK 장수 사과 농장’에서는 저농약 사과를 재배합니다. 또 왕겨, 기름을 짜낸 깻묵 등 천연 재료를 썩혀 만든 유기질 비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이로울 뿐 아니라 나무에 잔뿌리가 많이 생겨 수분과 영양분을 잘 빨아들이므로 사과 맛이 더욱 좋답니다. 7월 중순부터 다양한 품종의 사과가 차례로 수확되며, 홈페이지(www.jsokapple.com)를 통해 주문하면 가정에서 택배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직접 사과를 수확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열매가 맺기 전 사과나무를 통째로 분양하고 있답니다. 각자 분양받은 나무는 사과가 맺힐 때까지 정진흔 씨가 딸 키우듯 곱게 돌봅니다. 사과를 따는 날, 야유회 겸 온 가족이 농장을 방문해 나무 아래서 기념사진도 찍고 고기도 구워먹으면 특별한 추억을 쌓을 수 있겠지요. 문의 064-353-3635
- 전남 장수에서 사과 농장 운영하는 화가 정진흔 씨 낮에 밭 갈고 밤에 그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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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만발한 4월 말, 전북 장수의 사과 농장을 방문했다. 주인 정진흔 씨가 투박한 농부의 손을 내밀며 맞이한다. 일행에게 사과 꽃이 하얗게 핀 사과 밭을 보여준 그는 다시 왕성한 작업량을 자랑하듯 크고 작은 그림과 오브제들로 가득 찬 작업실로 이끈다. 서울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던 그가 8년 전 이곳에 3만 평의 사과 농장을 개간한 사연부터 요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