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명지대파는 연백부가 유난히 길고 얇으며 단맛이 좋다.
1월의 어느 날, 찬 바람이 뼛속까지 스민다. 매섭게 달려온 겨울은 마침내 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의 파밭마저 뒤덮었다. 흙 위로 솟아 있는 푸른 이파리와 시들어버린 노란 이파리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낙동강 하구 최남단의 섬, 명지鳴旨. 조선시대 이 지역에는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영남 제일의 염전이 있었다. 염전업이 점차 사양길을 걸으면서 대파 재배가 유행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의 파 농장에서 일한 황수라는 농민이 ‘석창파’라는 종자를 들여와 농사지은 것이 시작이었다(1910년대 전후로 한국에 들어온 석창파는 1백 년 이상 이 땅에서 재배되었으며, 종자가 토착화되면서 매년 안정적인 수확량이 검증된 씨앗으로, 한반도 농업 생태계에서 농민이 선택하고 길러온 토종 작물로 봐도 무방하다). 1959년 태풍 사라가 염전을 휩쓸고 간 후 본격적으로 대파 농사를 지었다. 소금기가 적당히 함유된 모래 토양과 따뜻한 해양성기후, 온화한 해풍 등이 대파를 잘 자라게 해주었다. 1970년대에는 전국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과거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명지대파밭은 온데간데없다. 2012년 명지 국제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도시 개발을 하면서 파밭 대신 아파트가 그 자리를 점령해가고 있다. 2013년 1백25헥타르이였던 파밭이 현재는 50헥타르도 채 안 된다. 여느 토종 작물이 그러하듯 붙잡을 새 없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곳에서 대파와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김영모 농부를 만났다.
소문난 명지대파 농사꾼
명지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영모 농부는 스물일곱 살 때부터 대파 농사를 지었다. “파는 일년생 작물로 여름 파와 겨울 파로 나눕니다.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따뜻한 부산 명지와 신안, 진도 등에서 생산하는 파가 겨울 파에 속해요. 예부터 명지 땅은 해양 사질토라고 합디다. 땅을 파면 돌 하나 없고 고운 모래만 가득해 파농사를 짓기 좋았어요. 게다가 소금기를 몰고 온 바닷바람이 파 맛을 달게 만들어줬지요.” 그는 현재 전국 곳곳에 유명한 대파 산지도 명지 사람과 기술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 이 동네에 살던 한 농부가 석창파 씨앗을 일곱 가마니나 가져가 진도에 퍼뜨렸다고 해요. 그래서 진도 파가 유명해졌다는 소문도 있어요”라며 명지대파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20여 년 전부터 소비자들이 파란 잎 부분이 많은 대파를 선호하면서 석창파 대신 병충해에 강한 외래 품종을 심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석창파는 뿌리쪽 흰 부분인 연백부의 껍질이 매우 얇아(약 0.3mm) 식감이 부드러운 반면, 추위를 잘 견디지 못했다는 것. 다른 파에 비해 추대(식물이 꽃줄기를 내는 것)가 빨리 올라오다 보니 상품성이 떨어져 외래 품종에 밀리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석창파의 씨를 받아 재배해 온 김영모 농부는 명지대파 작목반을 만들어 그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몸이 아파 작년부터 농사짓던 땅을 친구에게 빌려줬습니다. 근데 농사 지은 꼴이 영 시원치 않아요. 어찌나 속상하던지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어요. 지금은 빈 땅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바쁘니 2~3년 지나면 파밭이 20헥타르도 채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각 지역의 농부로 부터 모은 토종 파. (왼쪽부터) 돼지파, 골파, 명지대파, 찰쪽파, 조선파.
넓적한 괭이로 이랑을 파서 파의 허리까지 두둑을 쌓아야만 연백부가 길어지고, 맛이 좋아진다.
바다처럼 끝없이 이어졌다는 파밭도 옛말이다.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가 밀고 들어오니 농사지을 땅이 자꾸만 줄어들어 창녕과 거제도, 임자도 등으로 이주하는 농민이 늘고 있다.
입말한식가 하미현과 김영모 농부는 대파를 뽑아 손질하는 작업을 함께 했다.
이랑 만들어 두둑 쌓고
명지대파를 보면 다른 파에 비해 연백부가 유난히 길다. 두둑(밭을 갈아 골을 타서 흙을 쌓아 만든 두둑한 부분)을 높게 쌓는 독특한 재배 방식 때문이다. 그 과정을 설명하면 이러하다. 먼저 3월부터 4월 사이 파종을 시작해 약 60일가량 키운다. 5~6월 사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랑(고랑을 파서 만든 작물을 심는 부분)을 깊게 파서 만든 본밭에 이 모종을 정식한다. “농기계가 도입되기 전에는 소에 쟁기를 채워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준비한 밭에 파종을 하고 나면 파가 잘 자라는지 관찰합니다. 일본말로 ‘구와’라고도 하는데, 볼이 넓적한 괭이로 흙을 퍼서 두둑을 돋워줘야 하지요. 파가 어느 정도 크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두둑을 2등분해서 반은 왼쪽 두둑에, 나머지 반은 오른쪽 두둑으로 보내 파의 허리까지 쌓아 올려요.” 추위를 피해 흙 속에 파묻혀 자란 파는 연백부가 약 45~50cm까지 자란다. 그 덕분에 명지대파는 다른 파에 비해서 하부가 길고 단단하면서 광택이 돈다. 향이 깊고 단맛도 진하게 난다. 틈나는 대로 두둑을 쌓아 귀하게 키운 대파는 11월부터 수확해 이듬해 4월까지 판매한다. 지금은 두둑 쌓는 일도 기계가 대신하다 보니 연백부가 약 30cm밖에 안 된다고.
전국에서 자란 각양각색 토종 파
석창파뿐 아니라 한반도에는 다양한 토종 파가 존재한다.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들어온 파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잎만 먹는 잎파와 전체를 다 먹는 쪽파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적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재배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대파의 경우 일제강점기 초반 일본에서 들어왔다. 대표적인 토종 파를 꼽자면 조선파라 불리던 서울파로,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많이 심었다. 전국씨앗도서관협회 박영재 대표는 지역마다 조선파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고 한다. 화성에서는 황파, 완주에서는 한로파라고 부른다. 조선파는 뿌리가 동글동글한 것이 특징이며, 대량으로 재배하기보다는 농가마다 텃밭에 조금씩 길러 자급자족용으로 소비했다. 맛이 굉장히 부드럽고 육수를 낼 때 누린내가 나지 않아 조선파만 사용하는 고깃집이 많았다. 제주도와 전북 무주에서 주로 재배한 골파는 키가 70cm까지 자라며, 잎이 좁고 여러 갈래로 퍼진다. 파 특유의 향이 강하게 나지 않는다. 득량만 해풍을 맞고 자란 보성 찰쪽파도 한반도에서 오래전부터 재배해온 재래종이다. 알뿌리가 통통해서 머리파라고도 불리는 돼지파는 각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으로, 형태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평택의 돼지파는 실처럼 가늘고, 전남 지역의 돼지파는 뿌리 주변에 붉은색이 돈다. 우리가 찾은 돼지파는 양파와 파의 교잡형으로 흔히 염교라고 알려져 있다. 알뿌리를 말려두었다 김치 담글 때 사용하기도 한다. 한 작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를 지탱해온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씨를 받아 잘 말려 소주병에 보관해왔다는 김영모 농부처럼 애정과 관심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 그가 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니 한숨을 크게 내쉰다. 뒤쪽으로는 잿빛 아파트 숲이 버티고 있고, 눈 밑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파밭이 펼쳐져 있었다.
입말한식가 하미현이 제안하는 파 맛
골파 흰 뿌리 부분이 굵고 자색빛이 돈다. 식감이 부드럽고 매운맛이 덜하며 연하다. 잘게 썰어 생으로 먹는 파 소스나 파 숙회로 추천한다.
명지대파 수분이 많고 향이 강하다. 단맛 속에 톡 쏘는 매운맛이 조화롭다. 연백부에 탄력이 있고, 잎 속에 진액이 많아 김치나 육수, 파기름을 낼 때 좋다.
조선파 연백부와 잎이 부드럽다. 다른 파에 비해 아린 맛이 강하다.
찰쪽파 매운맛 사이로 기분 좋은 떫은맛이 퍼져 나온다. 대가 얇지만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아 생선과 함께 구워 먹거나 튀김용으로 적합하다.
돼지파 일본에서는 피클로 담가 락교라고 한다. 양파의 단맛과 마늘의 매운맛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생으로 활용하면 좋다.
참고 도서 <한국토종작물자원도감>(이유), <낙동강 사람들>(부산민학회)
- 부산시 강서구 명지동 뿌리 깊은 토종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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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찬 바람에 끝이 노랗게 바랜 파 이파리가 흔들린다. 10여 년 전부터 명지동 일대에 개발 붐이 일면서 빽빽한 아파트 숲과 파밭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970년대만 해도 전국 파 생산량의 절반을 책임졌던 명지대파. 사라져가는 명지대파를 꿋꿋하게 농사짓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토종 파의 미래를 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