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일대에 퍼져 있는 야생차 숲을 돌보는 박시도 대표(왼쪽)와 각종 차에 어울리는 다양한 음식을 선보이는 요리 연구가 메이.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 요.” 송창식의 ‘선운사’ 노랫말처럼 선운사의 봄은 동백이다. 그것도 겨울에 피지 않고 개화가 늦은 춘백이다. 완연한 봄이 되면 선운사 뜰에는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바람 불어 붉은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은 황홀한 장관을 연출한다. 사실 동백 못 지않게 선운산 골짜기마다 자리하는 것이 차나무다. 동백꽃이 질 무렵이면 어린 찻잎이 삐죽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선운사 근처 야생차 숲은 어림잡아 3만 평(숲속에 흩어져 있기에 정확한 면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20년 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차밭은 약 5만 평에 이른다.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3년에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어쨌거나 그 역사만 따져봐도 1천5백 년이 훌쩍 넘는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차밭을 제외하고 선운사 주변에 퍼져 있는 야생차 숲은 그 역사가 선운사와 비슷할 것이라 추정한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이곳 차는 맛과 향으로 유명했다. 미식가이던 추사 김정희가 선禪 논쟁을 치열하게 벌인 백파선사에게 이 지역 차를 선물 받고 극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곡우와 입하 사이에 새순만 따서 만든 작설차(참새 혀와 닮은 찻잎으로 만든 차)는 특산품으로 지정해 임금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1천 년이 넘는 시간을 품고 있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방치되어온 이곳이 최근 찻잎을 따는 손길로 분주하다. 그저 차가 좋아 느리지만 알차게 인생을 달려온 다문차의 박시도 대표 덕분이다. 그는 이곳에서 차 숲을 가꾸며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고, 차를 통해 사람과 소통한다.
가지 끝에 잎이 두세 장 나고 새로 돋아나는 창이 달린 상태를 1창 2기라 하는데, 지금 이 시기에만 나는 어린잎을 따 발효차로 만든다.
1천 년이 넘는 숲을 지키는 디자이너
박시도 대표가 차에 빠진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연유를 묻자, “좋아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요? 20대부터 차의 묘한 매력에 끌렸습니다. 젊은 시절에 무얼 했느냐고요? 차 마시면서 풍류를 즐겼지요”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스물아홉 살이 되던 1992년 그는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다문이라는 찻집을 인수했다. 작은 찻집이었지만 전통 음악을 알리는 산조 페스티벌도 기획하면서 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적 교류를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야생차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차의 북방한계선을 따라 익산과 순창, 고창, 전주 등으로 야생차 숲을 찾아 나섰다. 2000년대 초 순창 강경 마을에서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차 숲을 발견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숲의 주인이 되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고창 선운사 속 작은 오두막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재작년에 이곳을 맡아달라는 주지 스님의 부탁을 받고 밤낮으로 차 숲과 정원(차밭을 부르는 박시도 대표만의 표현)을 돌보는 숲 디자이너로 거듭난 것. “선운사 근처에는 야생차 숲과 차 정원이 있습니다. 제가 차밭이 아닌 정원이라 부르는 것은 농업 형태에서 벗어나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제 역할은 차 숲과 정원에서 차와 함께 놀 방법을 디자인하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차 한잔을 음미하고, 누군가는 사색을 즐기고, 누군가는 차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죠. 숲과 정원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즐거움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 부여가 되는 겁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쏟아내던 박시도 대표가 천천히 차를 우린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야외 테이블에서 신선놀음하듯 향기로운 차 한잔을 주고받은 뒤 본격적으로 차 숲 탐방에 나섰다. 선운사 주변에는 크고 작은 암자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 참당암이다. 촬영 당일 참당암 근처 야생차 숲에서 햇차 수확이 한창이라고 했다. 출입 금지라 쓰인 팻말을 지나쳐 산속으로 15분 정도 올라갔을까.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둥치가 어른 팔보다 두세 배 굵은 팽나무 아래 키가 작은 차나무가 빽빽하다. 그 속으로 들어서니 신비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돈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이 쏟아지고, 신선한 풀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 속 신성한 숲속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주위를 둘러보자 아주머니들이 허리춤에 주머니를 차고 찻잎을 따고 있다. “이곳은 차의 북방한계선 지점이라 다른 지역보다 햇차를 수확하는 시기가 15~20일 정도 늦어요. 차나무는 반그늘을 가장 좋아합니다. 주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잎이 지면 미생물에 의해 부엽토가 생겨나요. 이는 차나무에 최고의 영양분이 됩니다. 이것이 진짜 자연이고 상생이에요. 인간이 손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속에서 자라는 차나무를 지켜볼 뿐이죠.”
박시도 대표와 그의 아내는 햇차를 따다 나무틀에 고르게 펼쳐놓고 손으로 일일이 뒤집고 비벼가며 잎이 시들게 만든다. 고루 시들게 해야 조직이 파괴되어 잘 발효된다.
깊고 풍부한 향을 지닌 발효차
“차는 크게 불발효차와 발효차로 나눕니다. 어린잎을 따자마자 덖어서 만드는 녹차가 불발효차이고, 발효 과정을 거쳐 맛과 향을 극대화하는 홍차가 발효차에 속하지요. 이곳은 일교 차가 커 고산지대에서 자란 차처럼 맛이 쫀쫀해요. 찻잎에 기감이 서려 있다고 할까요. 새순에서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차를 만드는 데 정답은 없지만 맛이나 향을 쪼개는 것은 만드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원재료도 중요하고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 찻잎으로 고급 홍차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박시도 대표는 선운사에 온 이후로 녹차보다 발효차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갓 수확한 어린 찻잎을 판판한 나무틀에 고르게 펼쳐놓는다. 줄기부터 잎까지 골고루 시들게 하기 위해 손으로 일일이 찻잎을 뒤집고 비빈다. 찻잎을 비벼야 조직이 파괴되면서 잘 발효되기 때문. 시들해진 잎을 천으로 꽁꽁 감싼 뒤 따뜻한 곳에 두어 열두 시간 정도 1차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찻잎을 나무틀에 펼쳐 고루 비빈 후 다시 천에 감싸 따뜻한 곳에서 네 시간 동안 2차 발효시킨다. 마지막으로 실내 온도가 50~60℃로 유지되는 공간에서 네 시간 동안 건조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완성한 것이 바로 박시도표 홍차다. 그 맛과 향을 이야기하자면 지금껏 맛본 홍차와 확연히 달랐다. 황금빛을 띠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면 입안에서 수십 송이 꽃 향이 그득하게 퍼진다. “우리 차로는 좋은 홍차를 만들 수 없다고 단정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야생차로 만든 발효차의 맛과 향이 고급 홍차의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3 20년 전부터 인위적으로 조성한 차밭. 자신을 차 숲 디자이너라 일컫는 박시도 대표가 이곳으로 오면서 아름다운 정원 형태로 거듭나고 있다.
요리 연구가 메이는 녹차물밥, 화채, 음료 등을 선보였고, 녹차물밥에는 두릅과 토마토 장아찌를 곁들였다.
야생 찻잎으로 만든 박시도표 홍차는 30g당 5만 원에 판매하며, 입안 가득 꽃향기가 퍼지는 듯한 맛이 좋다.
햇차와 발효차로 차린 제철 한 찬
“얼마 전 가족이 함께 차 박람회에 다녀왔어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는데 아이가 찻잔을 잡고 ‘엄마, 왠지 경건한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 순간 차가 지닌 문화적 힘이 이런 거구나 하며 내심 놀랐어요. 이곳 야생차 숲과 정원을 경험하고 발효차를 마시면서 차가 지닌 문화적 가치를 다시 한번 느꼈지요. 최근에는 차 만드는 법이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적으로 진화하고 있어요. 이것은 녹차, 저것은 홍차라고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에서 벗어나 만드는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추세예요. 이곳 발효차 역시 일반적으로 홍차를 만든 방법과 차이가 있지만, 마시는 순간 여러 가지 꽃 향이 입안에서 피어나는 듯한 느낌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아름다운 차 숲을 지키려는 박시도 대표의 열정에도 감탄했고요.” 요리 연구가 메이는 이날 발효차와 햇차를 활용한 제철 한 찬을 선보였다. 그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발효차는 진하게 우려 우유와 섞어 밀크티로 마셔도 좋고, 경단과 제철 과일에 찻물을 부어 화채처럼 즐겨도 맛있다고 조언한다. “딱 지금 시기에만 구할 수 있는 어린 찻잎으로 오차즈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녹차물밥을 만들어보세요. 햇차 또는 발효차를 우린 물을 밥에 붓고 남은 잎을 올리면 1년에 딱 한 번만 맛볼 수 있는 호사스러운 밥상이 되죠. 다소 맛이 심심하다면 간장을 베이스로 만든 두릅장아찌와 소금에 절인 토마토 장아찌를 곁들여보세요. 새순은 그냥 먹으면 떫은맛이 강하니 물에 우려낸 후 먹는 것이 좋아요. 나물처럼 양념해서 밥에 살짝 곁들여도 맛있지요.”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야생차 숲이, 발효차의 맛과 향이 잊히지 않는다. 괜한 아쉬움을 담아 노래 ‘선운사’의 마지막 노랫말에 두 소절만 몰래 붙여본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동백나무 아래 신비로운 차나무가 있는 그곳 말이에요. 신비로운 야생차 숲에 반하고 꽃 내음 가득 풍기는 홍차 맛에 취하는 그곳 말이에요.
- 전북 고창 다문차 야생차, 풍미 깊은 발효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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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산에는 천년 고찰 선운사가 있는데, 그 주변에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야생차 숲이 펼쳐져 있다. ‘숲 디자이너’라 불리는 박시도 대표는 방치된 야생차 숲을 2년 전부터 돌보며 햇차를 수확해 향이 짙은 발효차를 만든다. 요리 연구가 메이와 함께 햇차 수확이 한창인 야생차 숲에 다녀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