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각산과 철원 명성산 등 밀원지를 옮겨가며 생꿀을 생산하는 원강효 대표(왼쪽)와 각기 다른 맛과 향을 지닌 꿀로 요리를 선보인 김호윤 셰프.
어스름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달려 성북구 북악터널 뒤로 뻗은 삼각산 초입으로 들어섰다. 여래사라는 간판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서야 청년 양봉가가 있다는 공터에 다다랐다. 삼각산이 둘러싸고 있는 절 아래 펼쳐진 야트막한 평지, 이 아늑한 터에 자리한 그의 양봉장으로 들어서니 수백 개의 벌통이 놓여 있다. “새벽인 데다 산이라 아직 쌀쌀해요. 기온이 오르면 벌들이 예민해지는 탓에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시작해요.” 흰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꿀건달의 원강효 대표. 올해 첫 생꿀을 채밀하기 위해 벌통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는 그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다
“아버지께서는 1974년부터 제주도에서 양봉을 시작하셨어요. 1980년 초에 서울로 올라와 평창동과 삼각산 일대에 벌통을 놓으면서 ‘꿀벌 세상’이라는 브랜드를 만드셨지요. 그런데 재작년 말쯤 아버지께서 이제 그만 양봉을 내려놓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 일을 제대로 도와드린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더군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의 30년 인생이 담긴 양봉을 제 방식대로 이어 나가자고 결심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도와 생산하는 것은 생꿀이다. 꿀벌은 벌집을 꿀로 다 채우면 월동 먹이로 보존하기 위해 밀봉을 한다. 이를 즉시 개봉해 벌통에서 꿀을 꺼내자마자 채밀한 것이 생꿀이다. 일반 꿀의 경우 산패를 막기 위해 65℃ 전후의 열을 가해 수분 함량을 17%로 줄이는데, 이때 아무래도 벌꿀이 지닌 천연 효소와 미네랄 등의 영양소가 파괴된다. 반면 생꿀은 우리 몸에 이로운 영양 성분을 고스란히 간작하고 있어 천연 벌꿀이라고도 한다.
원강효 대표는 혜화동 도심 장터 마르쉐에서 젊은 친구들이 직접 만든 농산물을 신나게 판매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생꿀의 가치를 제대로 녹여낸 브랜딩 작업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아버지가 양봉 자체에 중심을 두었다면, 그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디자인을 접목했다. 꿀의 달콤함과 이로움을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전달하기 위해 브랜드 이름을 꿀건달(꿀이 아주 건강허니 달콤하군)이라 정하고, 꿀 생산부터 로고, 패키지까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작업했다. 그렇게 완성한 꿀건달을 2015년 5월 양재에서 열린 마르쉐 장터에서 처음 선보였다.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며 꿀의 다양한 맛과 향을 알렸고, 패키지에서 부족한 부분도 보완해나갔다. 그의 이런 열정이 통했던 걸까. 2015년 9월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세계양봉대 회 우수 상품 패키지 부문에서 당당히 동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그 후 텐바이텐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 마켓에 입점하면서 꿀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모든 일이 그가 꿀건달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돼서 일어났다.
애정을 쏟는 만큼 보답하는 꿀벌
“벌통 한 개당 여왕벌 한 마리와 일벌, 수벌을 포함해서 약 3만 마리가 생활합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이 무리를 봉군蜂群이라고 하지요. 귀소본능이 뛰어난 꿀벌은 같은 자리에 수백 개, 수 천 개의 벌통이 있어도 정확히 제집으로 찾아가요. 이 속에서 여왕벌은 수벌과 교미를 통해 알을 낳고 지배합니다. 일벌은 여왕벌을 보필하고 벌집을 짓고 아기 벌을 돌보며 실질적인 살림을 도맡지요. 각자의 일도 정확하게 분업화되어 있어요. 물을 가져 오고, 꽃꿀을 가져오고, 화분을 가져오는 벌이 각각 정해져 있지요. 이렇게 모은 물과 꽃꿀, 화분을 입속 효소로 숙성시키고 날갯짓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우리가 먹는 바로 그 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벌을 애지중지할 수밖에요.” 원강효 대표 는 아버지에게 꿀벌 역시 애완동물처럼 애정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채밀 기간인 4월 중순부터 7월까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을 나선다. 양봉장에 도착하면 벌통을 열어 보고 봉군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 벌통 내부가 더우면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추우면 담요를 덮어 따뜻하게 만든다. 개체수가 늘어나 집이 좁아 든다 싶으면 얼른 소초광(꿀벌이 집을 짓는 기초가 되는 파라핀을 섞어 만든 판)을 넣어 벌들이 벌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돕는다. 새로운 여왕벌이 태어나려고 하면 집을 두 개로 나누거나, 밀도(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데 쓰는 기구)를 사용해 제거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여왕벌은 무리를 이끌고 집을 떠나버린다. 애써 키운 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벌을 돌봐야 한다.
“8월부터 10월까지는 월동 준비를 합니다. 추운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방역을 하고 벌통 밑에 포근한 볏단을 깔아주고 비닐 막과 담요를 덮어주지요. 이때 꿀벌은 꿀을 가져올 수 없으니 화분떡 같은 식량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12월부터는 꿀벌이 본격적으로 동면 상태에 접어들어요. 이 시기를 잘 보내야 기온이 따뜻해지는 2월에 여왕벌이 몸을 키우고 알을 낳을 준비를 할 수 있어요. 그래야 4월부터 다시 채밀을 시작할 수 있고요.”
꽃 따라 이동하는 양봉
양봉에서 꿀벌 관리만큼 중요한 것이 좋은 밀원지를 찾는 일이다. 밀원지란 꿀벌이 꿀을 빨아오는 원천, 즉 꽃밭을 말한다. 꿀 건달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밀원지가 좋은 곳으로 옮겨 다니며 꿀을 채밀한다. 그는 4월이 되면 고양시의 농원을 떠나 7백 개나 되는 벌통을 들고 삼각산으로 이동한다.
“삼각산 일대는 산벚나무와 팥배나무가 주로 서식하는 군락지 입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꿀을 채밀해온 아버지 덕분에 여래사 측에서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지요. 4월 초부터 피는 산벚나무는 향긋한 향이 좋아요. 맛은 아카시아 꿀처럼 부드럽고 깔 끔하지요. 벌집에서 산벚나무 꿀을 채밀하다 발견한 빨간 꿀이 팥배나무 꿀이에요. 어떤 꿀일까 싶어 농촌진흥원에 검사를 의뢰했어요. 대진대학교 생명화학부 백원기 교수와 농촌진흥원 국립농업과학원 잠사양봉소재과 심하식 박사를 비롯해 전문가가 연구를 진행했는데, 팥배나무 꿀 속 영양 성분이 아카시아 꿀에 비해 무려 12.49배나 높게 나왔어요. 구수한 맛도 독특하고요.” 5월 중순이 되면 강원도 철원 명성산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아카시아 꿀을 채밀한 뒤 6월부터 감로 꿀을 채밀한다. 그 후 농원이 있는 고양시로 다시 돌아와 검은색에 가까운 밤 꿀을 채밀한다. 꿀건달에서 가장 독특한 꿀은 감로 꿀이다.
“감로 꿀은 꽃에서 꿀을 채취하는 화밀꿀과 달리 나무에서 가져오는 수밀꿀입니다. 날이 뜨거워지면 식물이 조직 내 수분을 증발시켜 잎의 온도를 떨어뜨리는데, 이때 그 수분에 섞여 있는 당분을 꿀벌이 수집해 벌집에 저장하고 숙성시키면 만들어져요. 화밀꿀에 비해 단맛은 약하지만 항산화 성분인 폴리페놀과 미네랄을 풍부하게 함유하지요.” 꿀건달은 한국양봉농업협동조합장이 주관하는 2015년 벌꿀시험성적서에서 1등급을 받았다.
1 날갯짓으로 열을 발생시켜 벌집을 35~36℃로 유지하며 알이 들어 있는 방을 보호한다. 흰색 결정체는 로열젤리로 이를 먹고 자라는 벌이 여왕벌로 성장한다. 2 벌집에 꿀이 가득 차면 채밀기에 넣고 돌린다. 원심력에 의해 떨어지는 꿀의 불순물을 잘 걸러낸 뒤 병에 담는다. 농축 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꿀이라 부른다. 3 꿀건달의 패키지는 제 44회 세계양봉대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 원강효 대표는 각기 맛과 향이 다른 꿀을 어여쁜 병에 담아 판매한다. 4 김호윤 셰프는 겉면에 꿀을 발라 바삭하게 구운 고등어구이를 선보였고, 관자 위에 꿀로 맛을 낸 달래 드레싱을 곁들였다. 검은색 접시는 지승민의 공기 제품.
완벽한 달콤함
양봉을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생꿀을 생산하는 원강효 대표. 그리고 한 접시 음식을 만들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호윤 셰프. 식재료의 소중함을 알고 각자의 방식대로 그 맛을 표현하는 두 사람은 삶의 태도가 참 많이 닮아 있다. 김호윤 셰프가 꿀건달의 꿀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이 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에 꿀은 굉장히 중요한 감미료입니다. 꿀건달을 보자마자 디자인에 놀라고 그 맛에 감탄했어요. 꿀의 맛과 향을 세분화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아카시아, 밤나무 맛이 모두 달라서 음식에 풍미를 더할 때 요긴해요. ” 김호윤 셰프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를 살짝 구운 뒤 팥배나무 꿀을 얇게 발라 토치로 한 번 더 익힌 고등어구이를 선보였다. 겉면에 바삭한 꿀 크러스트가 생기면서 고등어의 짠맛과 팥배나무 꿀의 단맛이 어우러져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제철 열무와 요구르트, 쑥 등으로 만든 퓌레를 곁들였다.
“꿀은 단맛이 없는 요리에 증폭제 역할을 합니다. 씁쓸한 맛의 봄나물을 튀겨 꿀을 바르면 정과처럼 즐길 수 있어요. 올리브유에 절인 관자 위에 레몬즙, 소금, 후춧가루 등을 뿌린 뒤 달래 드레싱을 곁들였어요. 달래 드레싱을 만들 때 꿀을 더하면 쓴맛을 잡아주고 향을 끌어올려줍니다.”
그는 팥배나무 꿀을 영하 40℃에서 보관해 결정체가 생긴 크림 꿀도 유용하다고 덧붙였다. 잼 대신 스프레드로 활용하거나 불에 그을리면 바삭한 꿀 크러스트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양봉 후 버리는 박스를 활용해 업사이클링 조명등과 시계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 많은 청년 원강효 대표. 그가 꿀건달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가치는 ‘무병청밀’이다. 무병장수와 무병장생 이라는 말이 있듯이 도심 인근에서 자연과 공생하면서 병이 없고 깨끗하며 달콤한 꿀을 생산하겠다는 그의 신념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가 닿길 바란다.
요리 김호윤(스와니예 수셰프, 02-3477-9386) 취재 협조 꿀건달(www.ggulgundal.com)
- 꿀 따는 청년 꿀건달 '꿀'이 아주 '건'강허니 '달'콤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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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윙윙” 귓전을 울리는 꿀벌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벌통을 조심스레 연다. 나뭇잎을 태워 퍼져나가는 연기로 꿀벌을 진정시키자 육각형 벌집을 빼곡히 채운 꿀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과 꿀벌의 공생으로 탄생한 이 꿀은 꿀건달의 원강효 대표가 올해 처음으로 채밀한 생꿀이다. 그는 양봉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자 꿀 따는 청년으로 거듭났다.#생꿀 #꿀건달 #원강효 대표 #김호윤 셰프글 김혜민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