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방주 중 하나인 울릉 홍감자를 재배하는 한귀숙 대표와 홍감자로 향토 음식에서 벗어나 색다른 서양 요리를 선보인 최준석 교수.
우리 고유의 맛을 지켜나가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음식 중 진짜 우리 땅에서 자란 음식은 몇 가지나 있을까? 세계적 저널리스트이자 환경 운동가,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이클 폴런은 자신의 저서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진짜 음식의 판단 기준은 “증조할머니가 아는 음식, 신선하고 살아 있으며 우리의 오감에 말을 거는 음식”이라고 했다. 사라져가는 토종 음식이 너무나 많은 요즘, 그가 말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진짜 음식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육지도 아닌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 울릉도에서 진짜 음식, 우리 고유의 맛을 찾았다. 겉은 붉고 속은 고구마처럼 샛노란 홍감자가 그 주인공. 1883년 울릉도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면서 재배해온 홍감자는 이곳의 역사와 음식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토종 먹거리다.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땅이 부족한 울릉도는 쌀이 귀해서 감자가 주식이나 다름없었어요. 울릉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라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이 홍감자를 심고 캐는 모습을 보며 자랐어요.옛날이야기처럼 홍감자 재배가 대대로 이어지면서 울릉도의 토종 먹거리로 자리매김한 셈이지요.”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 지형인 나리분지에서 홍감자를 직접 재배하는 산마을식당의 한귀숙 대표가 홍감자를 재배한 지는 어언 30년째다. 처음에는 농사만 지었지만, 평소 요리를 좋아하고 울릉도의 향토 음식을 지켜나가자는 생각으로 1997년부터 산마을식당을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원이 지정하는 농가 맛집으로도 선정되면서 어엿한 향토 음식 전문가가 된 한귀숙 대표는 울릉도의 토종 먹거리를 지키는 데 누구보다 적극 앞장서고 있다. 1만 평에 이르는 그의 농가에서 홍감자를 기르는 밭은 옥수수밭 사이에 위치한 7백 평 남짓. 단순히 판매하고 먹기 위한 목적으로 홍감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슬로푸드 정신과 가치를 중요시하는 만큼 종자 보존을 위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홍감자를 재배한다.
일반적으로 감자는 6월쯤에 수확하는데, 울릉도 나리분지에서는 7월 중순부터 홍감자를 캐기 시작한다. 곳곳에 보랏빛 감자 꽃이 남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토종의 힘이란 이런 것
‘몸과 태어난 땅은 하나’라는 뜻의 신토불이처럼 사람의 몸은 태어나고 자란 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농작물 역시 마찬가지. 감자 자체가 외래종이긴 하지만, 홍감자는 18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1백 년이 넘도록 울릉도에서 신토불이처럼 자라온 작물이다.
“대개 감자는 바이러스에 굉장히 취약합니다. 만약 그해에 비가 많이 오거나 극심한 가뭄이 들면 죄다 병들어 살아남지 못해요. 한데 홍감자는 달라요. 주변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꿋꿋하게 버텨서 살아남더라고요. 녹비 외에는 따로 농약이나 영양제를 뿌린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자생력이 뛰어난 홍감자를 보면서 토종이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그의 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토종’이다. 토종이란 특정 지역에서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생긴 변이종 중에 농부가 선택하고 안정화해 얻은 종자를 말한다. 세대에 걸쳐 이어져온 안정화 과정에서 작물은 그 지역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한다. 병충해에 강하고 기후변화에 잘 견디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자신의 확신이 옳다고 믿은 한귀숙 대표는 2013년 슬로푸드한국 협회의 제안으로 토종 종자와 씨앗을 연구하는 ‘토종 씨드름’의 대표인 안완식 박사에게 홍감자 검사를 의뢰했다.
“토종의 판단 기준은 외형과 내력이라고 합니다. 크기는 작지만 겉이 붉고 속이 노란 홍감자는 개량 감자와는 외형이 확연히 달라요. 내력도 꼼꼼히 살펴봐야 해요. 선대 때부터 1백 년이 넘도록 홍감자를 키운 역사와 주식으로 활용해온 식문화 덕분에 토종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어요.”
토종이기에 홍감자의 또 하나 독특한 점은 손자 감자를 키워 종자로 사용한다는 것. 손자 감자란 봄에 심어 7월에 캘 때 뿌리 끝에 알알이 맺힌 감자 중 크기가 아주 작은 감자를 다시 심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또 한 번 수확한 감자를 말한다. 즉 7월에 캔 감자를 아들 감자, 11월에 캔 감자를 손자 감자라고 이르는 것. 이렇게 생기는 손자 감자를 잘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심으면 알이 크고 튼실한 토종 홍감자를 수확할 수 있다. 손자 감자는 그 자체로 홍감자의 종자가 되는 셈. 바이러스 예방 차원에서 해마다 새로운 종자를 받아서 심어야 하는 관행 감자 농사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따른다. 한 대표는 사질양토에서 자연 그대로 키운 손자 감자를 통해 울릉 홍감자의 종자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지역 주민에게 종자를 보급한다.
뿌리 끝에 알알이 맺힌 감자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캐야 하며 막 캔 홍감자는 붉은빛이 제대로 살아 있다 . 크기가 큰 감자는 수확해서 먹고, 작은 감자는 다시 심어 손자 감자로 활용한다.
홍감자, 맛의 방주에 승선하다
토종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 예가 국제슬로푸드본부가 이끄는 ‘맛의 방주’로,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있지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알리고 지켜나가는 운동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부터 지금까지 총 서른두 가지 음식이 맛의 방주에 올라가 있는데, 울릉 홍감자는 2014년 맛의 방주에 승선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내륙 지방과 왕래가 잦아지면서 점점 잊혀가는 홍감자가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중 2013년부터 울릉도에서 슬로푸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슬로푸드 설명회에 참석한 후 우리 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어요. 홍감자는 맛도 좋지만 선조가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에요. 울릉도 주민의 식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니 맛의 방주의 선정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더라고요. 안완식 박사님에게 토종 종자라고 인정받은 후 슬로푸드한국협회와 함께 홍감자를 맛의 방주에 올렸습니다.
”맛의 방주에 등록한 후 홍감자에 대한 인식도 확연히 달라졌다. 울릉도 내에서는 홍감자를 재배하려는 이가 늘었고, 유명 백화점에서도 판매 요청이 쇄도했다. 울릉군 역시 자체적으로 홍감자를 맛볼 수 있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홍감자는 맛의 방주의 조건처럼 소규모로 재배하기 때문에 생산량을 늘리기가 어려워 대량 판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귀숙 대표는 토종 종자가 필요한 이에게 홍감자를 내주고 난 후 남은 감자는 포슬포슬하게 쪄서 산마을식당을 방문하는 이에게 대접한다.
겉이 붉고 속은 샛노래 마치 고구마처럼 보이는 홍감자는 일반 감자에 비해 단맛이 강해 그냥 쪄서 먹어도 맛있다.
팍신하고 부드러운 맛
감자는 영양가가 높고 포만감이 있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식으로 이용하는 식재료다. 곡식이 귀하던 울릉도에서는 감자를 밀가루와 쌀 대신 사용해서 송편이나 인절미 등을 만들어 먹는 전통 요리법이 발달했다. 그러나 홍감자 자체가 멸종 위기를 겪으면서 전통 조리법 또한 점점 사라졌고, 현재 울릉도식 전통 감자 요리는 몇 안 되는 가정에서 겨우 맛볼 수 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서양 요리를 가르치는 최준석 교수는 슬로푸드한국협회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정도로 슬로푸드 운동과 토종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는 전통 음식 말고도 홍감자의 활용법을 알리기 위해 서양에서 주로 먹는 감자 요리 중 하나인 크로켓을 제안했다.
“홍감자의 첫인상은 사실 일반 감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에서 홍감자를 난생처음 맛봤는데, 단맛이 꽤 강했어요. 찐 후 감자를 으스러뜨려보니 입자가 곱고 매우 부드럽더군요. 전분의 함량도 적절해 크로켓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부터 울릉도는 홍감자를 사용해 인절미나 감자전을 만들어 먹었는데,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최준석 교수는 홍감자를 색다르게 즐길 수 있도록 치즈와 잘 어우러지는 그라탱과 바삭거리는 식감이 좋은 크로켓을 선보였다.
그가 알려준 방법으로 크로켓을 만들면 홍감자를 색다르게 먹을 수 있다. 레시피도 간단한다. 삶은 감자를 으깨서 체에 곱게 내려 버터, 치즈 가루, 우유를 넣고 섞는다. 동그랗게 빚은 후 밀가루, 달걀, 빵가루 순으로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살짝 튀긴다. 크로켓 속에 모차렐라나 산양 치즈를 넣으면 식감이 더욱 부드러워지고 풍미를 더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홍감자가 매력적인 식재료라고 말한 최준석 교수는 크로켓과 함께 홍감자 그라탱도 선보였다. 용기에 감자를 썰어 켜켜이 쌓은 후 우유, 크림, 파르메산 치즈를 넣고 오븐에 구운 그라탱은 홍감자의 부드러운 식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요리였다. 산마을식당에서 울릉도 향토 음식을 선보이는 한귀숙 대표 역시 홍감자전을 만들며 활용 방법을 적극 고민한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슬로푸드한국협회와 함께 홍감자와 울릉도의 토종 먹거리이자 맛의 방주인 섬말나리, 옥수수엿청주, 손꽁치 등을 맛볼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전자 변형과 무분별한 종자 개량으로 점점 획일화되고 있는 요즘, 토종 먹거리를 찾는 일은 단순히 지킨다는 의미를 넘어 종자를 보존하는 일의 시작이다. 한귀숙 대표는 홍감자를 기르면서 조급해하지 않고 토종 종자로 남을 수 있도록 자신의 밭을 지켜나갈 것이다.
요리 최준석 촬영 협조 산마을식당(054-791-4643)
- 우리 섬의 기운을 고이 간직한 울릉 홍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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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사이로 무성한 감자 잎사귀가 드문드문 보인다. 작년 봄부터 땅기운을 받고 자라나 자주색 꽃도 싱그럽게 피었다. 예부터 곡식이 귀하던 울릉도에서 주민의 끼니를 해결해준 울릉도의 토종 음식 홍감자다. 내륙 지방과 왕래가 잦아지면서 외래종에 밀려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꿋꿋이 뿌리를 지켜나가고 있는 울릉도 나리분지에 위치한 한귀숙 씨의 홍감자밭을 찾았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