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직접 돼지 뒷다릿살로 발효 생햄을 만드는 솔마당 오인숙 대표(왼쪽)와 맛있는 요리를 선보인 콘래드 서울 이승찬 총부주방장.
“맛과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길,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했다.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궁극적인 도는 결국 자연에 있다는 말이다. 요즘 자연에 몸담고 살고자 하는 이가 늘고, 음식도 자연 그대로의 것을 찾는 이가 많은 것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길 중 하나일 터.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에 한 발짝 다가서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을 조미료로 느리게 만든 발효 음식이 출신지를 떠나 각광받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데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시켜 만든 생햄, 다름아닌 스페인의 전통 음식 하몽이 지리산을 끼고 있는 산골 마을에서 숙성되어가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맛하고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맛있고 좋은 음식은 지역을 불문하고 들고 나는 것 같아요. 외국의 전통 음식이라 해도 토착화를 거쳐 우리 것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이 편하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명절은 물론 일상에서 흔히 먹는 만두도 중국에서 시작한 음식이고, 우리 전통 음식인 김치를 일본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소개하듯이 말이에요.”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이자 판소리 동편제의 발원지인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서 하몽과 살라미를 직접 숙성시키는 솔마당의 오인숙 대표가 발효 생햄을 선보이기 시작한 지는 어언 6년째. 양돈 육종을 연구하는 남편 박화춘 박사의 고향인 이곳에 2000년에 귀농해 본격적으로 돼지 농장을 시작했다. 건강식품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한국형 우량 흑돼지 품종 개량과 양돈 시스템 구축에 힘쓰던 이들은 돼지고기를 이용한 가공식품에도 공을 들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생햄, 바로 하몽이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나라에는 저마다 전통 생햄이 있어요. 그중에서도 스페인의 하몽은 고급 식재료 중 하나로 꼽히지요.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만드는데, 돼지 몸무게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이 부위가 후지살이라고 불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해요. 한데 수입한 하몽은 비싼 값을 지불하고도 찾아 먹는 이가 점점 늘고 있으니, 참 의아했어요. 그래서 국립축산과학원과 기술 협약을 맺고 생햄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지요. 말 그대로 ‘도전’이었어요.”
천연 재료 외에는 오직 자연에 기대어 만드는 만큼 중간에 폐기되는 비율이 70%에 육박하지만, 세월의 세례를 받은 특별한 음식이다. 솔마당에서는 생햄 체험 과정도 진행하는데, 생햄을 통으로 소장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1년에 단 한 번만 진행하며, 참가비는 30만 원.
하몽 이베리코 못지않은 생햄 버크셔K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들어설 때의 두려움이 왜 없었으랴. 하지만 오인숙 대표에겐 확신이 있었단다. 명품 생햄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급 생햄을 살펴보면 세 가지 특성이 있는데 첫째 ‘어떤 종자를 썼느냐’, 둘째 ‘어디서 자랐느냐’, 셋째 ‘어떻게 키웠느냐’라는 것. 바로 최고급 원재료와 천혜의 환경에 전문성과 정성이 더해져야 비로소 명품 생햄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몽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꼽히는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jamon iberico de bellota를 예로 들자면, 스페인어로 하몽은 뒷다리를, 이베리코는 흑돼지 품종을 가리키며 베요타는 도토리를 의미한다. 상수리나무 숲에서 도토리만 주워 먹으며 자란 흑돼지가 최고로, 30개월 이상 건조시켜 만들면 더 비싸고맛있다.
“생햄은 공기가 깨끗하고 수분이 적절하며 바람이 찬산간 지방에서 주로 생산해요. 지리산 청정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생햄 생산에 필요한 발효와 건조에 최적지로, 지리산 흑돈의 원료인 순수 버크셔종으로 만들어 최소 2년 6개월 이상 건조시키니 명품 생햄 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지요.” 여기서 짚어볼 것은 원재료인 순수 버크셔다. 버크셔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흑돼지로, 조직이 치밀하고, 기름은 탄력있고 맑으며, 누린내가 나지 않는 그야말로 최고의 품종이다. 그가 버크셔의 뒷다리로 생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남편 박화춘 박사가 직접 운영하는 돼지 농장이 순종 돼지를 생산하는 종돈장이기에 가능한 것.
“한국인의 입맛에 맞고 우리나라 풍토에서 잘 자라는 육질을 가진 품종를 찾다가 버크셔를 2005년에 들여와 우리 종자 자원으로 만들어 순종 가계를 만들었어요. 본래 종자의 이름에 코리아의 이니셜을 붙인 버크셔K가 생햄의 원료지요.” 근본 없이 만든 발효 생햄이 아니라 뿌리가 확실한 우수한 품종으로 만든 것이니 그 맛이 뛰어날 수밖에. 미식가들과 셰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생햄은 종잇장처럼 얇게 자르기 때문에 자른 후 바로 먹어야 하며, 상온에 두어야 입에 넣었을 때 지방이 부드럽게 녹는다.
자연과 시간을 조미료로 만든 슬로 푸드
“처음엔 돼지고기와 소금만 있으면 된다는 소리에,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있구나’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1년 동안 시설 없이 한옥 처마에 매달아두고 건조했더니 습도가 안 맞아 곰팡이가 생기는 등 비위생적이더군요. 그길로 스페인의 하몽 공장에 직접 가보고 노하우를 배워왔지요.” 그가 만드는 생햄은 스페인의 하몽과 맥락을 같이하며, 철저히 자연 발효를 고집한다. 생햄은 발효와 건조 기술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생햄 만드는 법을 말하자면 김장을 담그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은데, 순서는 이렇다. 늦가을에 찬 바람이 불면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염지한다. 돼지 뒷다리도 양돈장에서 일부러 몸집이 큰 돼지를 생햄용으로 골라 다리를 상하지 않게 관리해 별도로 손질하는데, 외국과 달리 삼겹살 문화에 맞춰 돼지를 키우다 보니 특별 관리가 필요한 것. 보통 12kg 정도 되는 돼지 뒷다리를 골라 같은 분량의 천일염만 사용해 한 달 정도 절인 후에는 깨끗이 세척해서 염도를 낮춘다. 겨울은 건조 기간으로 온도 12℃, 습도 75~85%가 건조하기 좋다. 3월에 날씨가 풀리고 온도가 20℃ 정도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서 발효가 시작된다. 한여름에는 별도의 시설을 갖춘 냉장고에 넣지만, 기계에 의존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지역의 온도와 습도를 관망하다가 틈틈이 창문을 열어서 바람을 넣어줘야 한다.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것이 아닌 것. 돼지 지방을 녹여 겉에 발라주는 작업도 중요한데, 이 또한 습도를 조절해주는 일이다. 급격하게 건조하면 껍데기만 딱딱해지고 안은 말랑한 상태로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발효 생햄을 만들 때 보통 1년 6개월 걸리지만, 버크셔는 지방이 풍부해서 2년 이상 꾸준히 관리해야 맛이 들어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요. 처음엔 잡냄새를 없애고 맛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허브를 넣기도 했지만 다 불필요하더군요. 버크셔 종자는 미국에서 고급 튀김에 녹여서 사용할 정도로 지방이 깔끔해 아무것도 양념하지 않고 발효한 것이 맛과 향이 훨씬 깊고 좋아요. 조미료가 있다면 자연뿐이지요.”
솔마당의 발효 생햄, 하몽과 살라미 등이 있다.
우리 제철 식재료와 어우러지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관심이다. 식재료도 다르지 않다. 솔마당 오인숙 대표가 만드는 생햄이 외국의 전통 음식을 토착화해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관심에서 시작한 것이라면, 우리 식재료에 대한 관심으로 생햄을 ‘발견’한 이는 콘래드 서울 이승찬 총부주방장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외국 식재료를 쓸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우리 땅에서 난 식재료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은 요리사다운 욕심이 그의 눈을 보배로 만들었을 터.
“콘래드 호텔의 ‘37그릴 앤 바’는 내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반반입니다. 양쪽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방법을 늘 고민하지만, 우리 식재료를 외려 외국인에게 소개하려는 마음을 사명감처럼 갖고 있지요. 지리산에서 만든 생햄을 처음 접했을 땐 슬라이스된 상태인 데다 온도와 습도 등 만드는 조건 자체가 까다롭기 때문에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먹어보니 ‘어라?’ 맛이 나쁘지 않더군요. 통으로 직접 카빙해 슬라이스한 것을 먹어봤더니 비로소 제맛과 향을 느낄 수 있었어요. 스페인 하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생햄은 발효시킨 돼지 뒷다릿살을 잘라 곧바로 생으로 먹었을 때 가장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프로의 솜씨로 슬라이스하더라도 뼈에 바짝 붙어 있는 고기는 어쩔 수 없이 자투리 부분으로 남게 마련. 리소토는 생햄을 다양한 조리법으로 즐기는 것은 물론 자투리 부분까지 알뜰하게 활용할 수 있는 메뉴다. “조금만 아이디어를 더하면 특별한 별미가 됩니다. 친숙한 우리 식재료를 더하면 그 의미는 배가되지요.”
곤드레나물과 자투리 생햄을 넣어 만든 리소토 위에 가나시로 올린 생햄 칩은 얇게 포를 뜬 생햄을 실링 페이퍼(오븐용 고무 페이퍼)에 겹쳐서 아주 낮은 온도로 구워낸 것. 샐러드는 복분자가 제철인 만큼 베리류를 곁들이고, 달래와 참나물 등 우리의 봄나물을 더했는데, 그 맛과 식재료의 조화가 서양에서 많이 즐기는 멜론이나 무화과 못지않다. “발효 생햄은 맛이 진하고 풍미가 뛰어납니다. 개성이 강한 음식인 만큼 좋은 걸 제대로 먹어야 진가를 느낄 수 있지요. 외국 식재료라도 우리 땅에서 제대로 만든 것을 좇다 보면 우리의 음식 문화도 더욱 다양하고 깊어질 겁니다. 관심이 문화를 만드는 법이니까요.”
콘래드 서울 이승찬 총부주방장이 선보인 생햄 칩 올린 곤드레나물 리소토와 우리 제철 나물과 생햄이 어우러진 샐러드.
요리 이승찬(콘래드 서울 총부주방장, 02-6137-7110) 촬영 협조 솔마당(070-4150-4179)